전체 글 897

김경주,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팔월과 구월 사이, 간절기)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

문학노트 09:40:53

정호승, '짜장면의 힘' (경전을 읽는 일요일 아침)

짜장면의 힘 짜장면은 힘이 있다 아버지의 힘이다 짜장면은 장딴지에 꿈틀대던 아버지의 젊은 핏줄이다 핏줄의 힘이다 나는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젊어진다 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짜장면을 먹고 길을 달린다 아버지가 짜장면을 사주실 때마다 힘차게 더 빨리 달린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짜장면의 힘에 대해 슬퍼해보았다 아버지의 짜장면을 먹던 내가 오히려 늙은 아버지가 되었다 밤하늘은 짜장면처럼 캄캄하다 별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진다 서울에 사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다가 손수건을 꺼내 밤하늘의 눈물을 닦아준다 짜장면은 힘이 세다 짜장면을 먹으며 가난도 함께 나누면 가난이 아니다 죽기 전에 맛있는 짜..

문학노트 2026.08.30

정현우, '늦잠' (모처럼 늦잠)

늦잠 죽은 할머니와 고양이가 눈 밟는 소리에 깼다 눈곱을 떼며 문을 나섰다. 늦잠이 없는 것들은 벌써 일어나 가버렸나, 저 눈 고개를 넘어 주검 속을 다녀올 수 있다면 내가 서두를 수 있다면 미안, 내가 많이 늦었다고 인간에게 잠이 없다면 어떤 이별도 없겠지. 나는 잠이 들 때마다 그곳에 갈 수 있다. # 정현우,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2021) ... 모처럼 늦잠 : 늦은 하계여행을 다녀온 후에 곧장 늦잠을 잤습니다.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탓도 있겠고 다소는 시읽기가 지지부진했던 모양도 있었을 겁니다. 팔월이 저무는 주말이고요. 곧 점심시간입니다. ..

문학노트 2026.08.28

김이듬, '가을하다' (기다림에 익숙해지는 계절)

가을하다 10월이 제일 좋아 이렇게 말하고 너는 사라졌다 너는 10월 외에는 아무것과도 닿고 싶지 않은지 내가 바다를 좋아해서 바닷가에 숨는 건 아닌데 잠수부도 올라오던데 네 답장을 기다리다가 나는 왜 하필 10월인지 네가 태어난 달인지 가을의 어원까지 찾아본다 달빛이 천금 같다 실낱 같은 초승달이 일찍 지기에 10월 밤은 온 힘으로 깜깜해진다 네게 보낸 이메일은 며칠 내내 읽지않음으로 표시된다 대놓고 전화나 문자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10월에 나는 불안한 사람이 된다 10월에는 10월에 관한 시가 많고 8월에는 여름을 노래하는 시가 많고 나는 살고 싶은 달이 없어서 아무 날 아..

문학노트 2026.08.23

유병록, '돌봄' ('어쩌지 못함'과 아무 요구도 없는 사랑)

돌봄 도무지 힘이 나지 않거든 무엇이라도 돌보면 어떻겠냐는 조언을 듣고 무엇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돌, 봄, 그래, 돌이 좋겠다 조막만 한 돌을 주워다가 잘 씻어서 햇볕 드는 곳에 두고 자주 쓰다듬었다 바라는 대로 될 거야 걱정하지 마 틈날 때마다 말해주었다 새가 되어 날아오르거나 고맙다 인사하길 바란 건 아니지만 무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봄이 오도록 눈 감고 돌을 쓰다듬으며 그 심정을 짐작할 때 내가 돌이었던 때가 떠올랐지 몸을 스쳐 간 손길들이 되살아났지 비로소 사랑에 대하여 조막만큼 알게 되었지 # 유병록, 우리는 멸종하지 않는다 (창비, 2026) ..

문학노트 2026.08.21

양안다, '불과 몸통' (김수영 문학상과 창작동인 '뿔')

불과 몸통 너는 잠에서 깨어난다. 너는 그것을 생각한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숲속.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까르르 웃음. 사방이 녹색이고. 그리고 흙바닥이고. 너의 손은 그것의 감촉을 기억한다. 숲은 거대한 새장. 나무의 몸통으로 만든 음악에 대해. 흐릿하다. 귀가 멀었나. 너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새가 지저귐.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불탄다. 그것은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숲의 일부다. 그것은 새를 가둔다. 그것은 열기다. 너는 그것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본다. 그것은 단수이자 복수다. 그것은 뼈다. 그것은 소리다. 너는 피부색이 어두운 아이들을 본다. 그것은 남쪽으로 기울어진다. # 양안다, "이것은 천재의 사랑" (타이피스트, 2..

문학노트 2026.08.19

이제니, '영원이 미래를 돌아본다' (칠석을 맞는 기다림의 자세)

영원이 미래를 돌아본다 들판이 바람을 불러내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아직은 죽지 마. 죽기 전까진 미리 죽지 마. 이미 죽은 적이 있는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뒤집어쓴 채 속삭이고 있다. 각자의 거울 앞에서만 울고 서로의 이름 앞에서는 들판을 이어갔다. 실은 둘 중 이미 하나는 죽었다. 나 아니면 너. 어제 아니면 오늘. 바람은 죽은 것을 사랑하는 냄새를 풍기고 있어서 들판은 보이지 않는 꽃을 그리고 있다. 먼 나라에서 온 꽃의 이름은 잊은 지 오래였다.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길 끝에서 걸어오는 하나의 사람. 두 팔을 벌려도 안을 수 없는 나무둥치 아래로 마음을 잃은 마음이 모여든다. 눈과 귀와 맑은 얼굴들이 모여 만든 목소리의 빛 그늘. 영원이 미래의 얼굴을 돌아볼 때 바람과 들판은 손을 ..

문학노트 2026.08.18

고선경, '진희와 희진' ('시절인연'의 무게감)

진희와 희진 진희와 희진은 어릴 적 친구였으나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어른이 된 진희와 희진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진희와 희진이 서로를 기억한다는 점 사소한 버릇 이층집에 살며 개를 키우기로 했던 약속 천변을 산책하며 나누던 이야기 진희는 그때 왜 그랬을까 생각에 잠긴다 그 시각 희진은 카페 바닥을 닦는다 손님이 깨뜨린 유리컵과 커피를 치운다 몇 년 뒤 진희와 희진은 동창 결혼식에 참석하지만 서로를 보지 못한다 단체 사진을 찍기로 했을 때 진희가 웃고 희진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운다 희진이 사랑하는 장면은 카페 문 닫고 돌아서면 보이는 여전히 환한 거리 잠긴 문을 당기며 가게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 스스로 주인처럼 웃어 보는 것 그..

문학노트 2026.08.17

전남진, '뒤돌아보면 아프다' (결별이 남겨놓을 수 있는 상처)

뒤돌아보면 아프다 출근길 지하도를 나오자 전단 한 장 쑥 들어온다 무심결에 피해 가다 뒤를 당기는 것 같아 돌아보니 허리 굽은 할머니 사람들에게 전단을 내밀고 있다 장애물 피하듯 비켜 가는 사람들을 할머니 축 처진 몸빼 바지가 바라본다 보도블록 위로 발자국 찍힌 전단 버려진 아이처럼 할머니를 보다가 바람에 떠밀려 팔락팔락 구석에 박힌다 눈에 물기가 많으면 같은 바람도 더 차가운 법이다 후회가 많으면 추억도 아픈 법이다 전단 한 장 받아줄 마음 한 장 없이 나는 살았구나 가난보다 가난하게 나는 살았구나 뒤돌아서서야 눈물나는 나는 뒤돌아서서야 서러운 나는. # 전남진, 월요일은 ..

문학노트 2026.08.16

정호승, '하동포구에서' (광복절 아침에 읽는 시 한 편)

하동포구에서 모든 사랑은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동포구에서 만난다 지리산이 섬진강을 만나듯 섬진강이 바다를 만나듯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동포구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하동포구에서는 강물에 그물을 던지면 강물이 물고기처럼 그물에 걸린다 눈부신 햇살과 모래가 그물에 걸려 은어떼처럼 파닥거린다 강은 바다를 만나는 일이 평생에 가장 감사한 일이다 나도 당신을 만난 일이 평생에 가장 감사한 일이다 해 질 무렵 하동포구에서 바다를 따라 사라져가는 강물의 뒷모습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고향집 골목에서 젊은 어머니가 저녁밥을 짓기 위해 물지게로 물을 길어 가시는 뒷모습만큼 거룩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

문학노트 2026.08.15

장석남, '서정시를 쓰십니까?' (서정시를 써야 하는 시대)

서정시를 쓰십니까? 꽃 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그림쟁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두번째 것만이 나를 책상으로 몬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서정시를 쓰십니까? 아니요 벼락을 씁니다 벼락 맞을 짓이라는 말을 들어봤나요? 벼락 맞을 짓을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벼락에 고하는 글을 씁니다 벼락에 고하는 글 화평한 서정시를 쓰고 싶습니다 위선과 비열, 몰염치와 야비, 교활하기까지 한 그 가면들을 순간의 빛 속에 가두고 때리는 서정시를 쓰십니까? 아니요 '서정시'를 씁니다 벼락같은 # ..

문학노트 2026.08.14

안희연,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명실상부한 '오피니언 리더'에 관하여)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나는 시간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것은 색색의 털실 뭉치. 그중 하나를 골라 풀어내는 것이 내 일. 오늘따라 유난히 긴 털실을 집었다. 온종일 풀어도 끝이 없었다. 매듭이 너무 많아서 손이 아파요. 할아버지, 흘깃 이쪽을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늘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할아버지는 뭔가를 쪼개고 있었다. 아가야, 나는 이것을 작게 만들어야 한단다. 그리고 아주 깊숙한 곳에 감추어야 하지. 어디가 깊은 곳인데요? 얘야, 지척에. 흘러가버리는 순간순간에. 그것은 눈부시게 빛났지만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털실은 강물 같았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보기에 좋아야 한단다 아가야, 허물 수 없다면 세계가 아니란다. 털실의 길이는 제각기 달랐..

문학노트 2026.08.13

유희경, '여름 팔월' (계절에 어울릴 법한 시)

여름 팔월 여름 팔월은 참 짙고 아득해서 나는 그렇게 있다 이곳엔 볕이 너무 많아 귀하지 않지 다리를 떨면서 다리를 떠는군 생각하면서 나는 아무 건물 아무 이 층 아무 사무실 아무 창문 위에서 볼 수 있는 아무 블라인드와 같은, 여름 팔월의 볕 구석에 매달린 흔하고 틈 많은 사연을 내리며 있다 조금 어두워졌다고 믿는다 나는 조금 어두워졌고 시원해졌다는 믿음 아래 있다 잠자코 검은 양산 하나를 펼쳐 나눠 쓰고 걸어가는 여자들을 본다 여름 팔월은 아랑곳없이 나무 그늘 아래를 지나가듯 걸어가는 그들을 본다 그들을 보고 있던 그런 내가 병과 주의와 주장과 그것들의 크기 그런 것들의 자취 그들의 미래와 후퇴에 대해 떠들어대듯 여름 팔월, 블라인드처럼 드리워놓은 사연들 속 그 덕분에 ..

문학노트 2026.08.12

최현우, '오후 네시' (마음을 믿지 못하는 일)

오후 네시 어느 날 마음이 먼저 죽는 날이 올 거다 어떤 어깨 오른쪽으로 가방을 메는 사람에게는 왼손을 비워두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거다 풍경에 길들여진 얼굴은 지하철에서도 자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물건을 오래 쓰고 고쳐 쓰다보면 흔적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처음 빙판을 걸었을 때 보폭을 망가뜨리는 일이 즐거웠다 둘 다 서투니까 손을 놓을 수 없으니까 자꾸 같이 넘어지면 먼저 일어나서 일으켜주고 싶어지니까 내가 아는 속기사는 형편없는 기억력을 가졌는데 병실에 누워 의식이 부서질 때도 옆 침대에서 들리는 유언을 받아 적었다 그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떤 첼로 ..

문학노트 2026.08.11

이소호, '손 없는 날' (한 세대 이후의 가계 질서)

손 없는 날 이사 날은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우리는 밥솥을 두고 왔다 엄마 밥솥만 혼자 이사 가는 이유는 뭐예요? 손 없는 날은 이삿짐센터 값이 배로 뛰어 우리 집은 어째서 미신과 행운, 요행이 우선일까 우리는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침대 발치에 거울을 두지 않는다 집 안에서 우산을 펴지 않고 금을 밟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와 텔레비전 사이 놓인 아버지 다리를 넘었다 개념 없는 년이라고 어른은 넘나드는 게 아니라고 화를 냈다 텔레비전 속에는 죽음이 즐비하고 희망은 날씨뿐이다 아나운서는 코로나 이후 가정 폭력 지수가 늘었다고 말했다 잠시 지옥이 있었다 엄마는 도마 위에서 푸르..

문학노트 2026.08.10

강혜빈, '돌아오는 우연' (가장 현대적인 연애시)

돌아오는 우연 오래된 커피숍에는 빛과 먼지가 많다 ​ 죽은 꽃나무도 있고 꽃나무의 영혼도 있다 ​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아 우연의 왼쪽 귀를 본다 ​ 셔츠 깃처럼 가지런히 접혀 있다 ​ 우리는 이번 생이 지루해진 시간 여행자이거나 연인일지도 모른다 ​ 우연은 땀을 흘리지 않는다 우연은 벤야민을 읽는다 ​시시한 농담을 던지고는 혼자 웃는다 ​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웃었던 사람처럼 ​ 꿈속에서 염소가 된 일 아니 될 사람을 좋아한 일 이틀 내내 죽은 듯이 잠든 일 ​ 가끔 손등 냄새 맡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 ​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웃어본다 ​ ..

문학노트 2026.08.09

박지일, '큐브' (낯설기만 한 입추의 39도)

큐브 우리는 하나였다. 저기 저 줄다리기하면서 흔들리는 상반신들. 마치 지네 다리, 제각각 꿈틀거리는 결정적인 순간이면 눈 질끈 감는 버릇 있지. 누군가 중얼거린다면 너도?너도?너의너와너의너의너도? 머릿수 늘려가면서 하나는 우리였다. 공책 선물 받고 보물 이름 적힌 쪽지 찾아 풀숲으로 떠나고 트랙에 탁탁 침 뱉으며 만국기 아래 우리는 하나로 불릴 수도 있다. 화창한 날씨 가로질러 터널 속으로 나는 신나게 차 몰고 간다. 빛 없어 눈먼 사람과 빛에 갇혀 눈먼 사람 얼굴은 두려움과 공허함으로 모양이 다르겠으나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이 상상한 자신의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하나였고 눈 감긴 얼굴로도 우리 하나 될 수 있었으나 눈 감으면서 하나..

문학노트 2026.08.07

정호승, '부치지 않은 편지' (시대와 시의 시대성)

부치지 않은 편지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 정호승, 새벽편지 (민음, 1987) ... 시대와 시의 시대성 : '반시' 동인을 김명인 시인과 함께 했으며 1980년대를 관통한 시인들 중 가장 '롱런'을 하고 있는 케이스라면? 당연히 정호승 시인이 있겠습니다. 가장 최근까지도 활발..

문학노트 2026.08.06

류근, '영화로운 나날' (언제나 영화처럼)

영화로운 나날 가끔은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갈 곳 없는 아침이었다 혼자서 객석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더러는 중년의 남녀가 코를 골기도 하였다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아서 혼자 순댓국집 같은 데 앉아 낮술 마시는 일은 스스로를 시무룩하게 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날은 길었다 다행히 밤이 와주기도 하였으나 어둠 속에서는 조금 덜 괴로울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든 내가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밖에서 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은 공연했다 심야 상영관 영화를 기다리는 일로 저녁 시간이 느리게 가는 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식민지 출신이었다 아프리카엔 우리가 모르는 암표도 많을 것이다 입..

문학노트 2026.08.05

도종환, '노을' (여름의 노을을 관통하는 시간)

노을 그대가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능소화보다 더 진한 노을이 그대 뒤에 있었다 그대가 기진맥진해 있을 때 감빛 노을에 어둠의 먹물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대의 한쪽 무릎이 주저앉을 때 노을은 한쪽 가슴이 까맣게 타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라 재가 된 하늘 위에 사리 같은 별이 뜬다 그 별이 더 많은 별을 불러올 것이다 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허리를 펴라 어둠 속에 어둠만 있는 게 아니다 저녁 바람도 초승달도 모두 그대 편이다 # 도종환,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창비, 2024) ... 여름의 노을을 관통하는 시간 : 중복부터 말복까지는 초복부터 중복까지의 두 배, 즉 스무 날 정도가 됩니다. 이번 해 역시 초..

문학노트 2026.08.04

한정원, 'Scene #27' (잊어야 함과 잊지 못함)

Scene #27 - 소녀의 목소리. 꿈을 꾸던 그대로 걷고 있어 창들이 검은 눈을 켜고 말을 붙여 소녀야, 또 맨발이구나 네게 갈 때마다 잠옷 차림인 걸 용서해 이런 어른스러운 말투를 배우게 됐어 살이 트고 있거든 더 차가운 사람이 될 거야 눈이나 서리가 된다면 더 좋을 거야 네게 업힐 수 있겠지 업히고도 무겁지 않을 만큼만 자랄 수 있겠지 예쁘게도 얼었다 내 발은 닿자마자 얼음 위에 붙어버려 얼음 밑에 사랑하는 소년이 살아서 그런 거지 심장의 절반을 얼음에 대고 오래 비스듬해 내가 수심을 재는 방법이야 하지만 결말을 알고 있지?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려, 빌이 없는 듯이, 왔던 밤을..

문학노트 2026.08.03

한연희,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수박을 생각하는 오후)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여름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얼어붙은 강, 누군가와 마주 잡은 손의 온기,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서 누운 밤, 쟁반 가득 쌓인 귤껍질들이 말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은 창을 열고 나를 눅눅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이끼처럼 자꾸 방 안에서 자라는 냄새들이, 귤 알갱이처럼 똑똑 씹히는 말들이 혓바닥에서 미끄러진다 곰이 그 위에 누워 있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곰이, 수박을 우걱우걱 먹어치우던 곰이 나를 쳐다본다 곰에게서 침 범벅의 수박 물이 떨어진다 여기가 동물원이 아니라 내 방이라는 것을 알아갈 때쯤, 나는 혼자 남아 8월을 벗어난다 그러니까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차가운 방바닥에 눕는 것을 좋아한다 피가 나도록 긁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

문학노트 2026.08.02

차호지, '사랑' (잔인한 서정, 역설적인 상상)

사랑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너와 나의 발 사이에 놓인 바닥에 붙은 껌을 바라보면서. 머리 위 햇볕이 뜨겁다. 수없이 밟힌 껌은 이미 검어져 껌이 아닌 것처럼 보였으나 점점 바닥으로부터 유리될 것처럼 흐물거렸고 자세히 보면 그것이 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발로 밟으면 발바닥에 들어붙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너에게 한 발 다가갈 것이다. 너 역시 줄곧 바닥을 보고 있었으므로 거기 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너는 처음부터 껌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닥에는 껌 이외 아무것도 없다. 나는 힘을 준 왼발로 몸을 지지하고 오른발을 우리 둘 사이로 내딛는다. 나는 정확히 껌을 밟게 될 것이다. 이후 어느 방향이든 간에 오른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에 신발이 붙었다 떨어질 것이..

문학노트 2026.08.01

함민복,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술을 줄여야 하는 시절)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 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닌 나의 생활인데 비가 와 더 선명해진 원고지 칸 같은 보도블록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 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 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를 질문의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 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

문학노트 2026.07.31

김혜순, '연인과의 타이틀매치' (칠월 말에 쓰는 사랑시)

연인과의 타이틀매치 사랑을 보여줘 하면 내 옷을 찢어야 하나 춤이라도 춰야 하나 사랑을 보여줘 하면 하늘에 뜬 물조리개로 머리에 물을 뿌리고 가서 보여주자 이 물이 마를 때까지만 사랑할게 그렇게 말하자 사랑을 보여줘 하면 갓 배달 온 세탁물처럼 비닐을 뒤집어쓰고 가서 말하자 이 안개 같은 비닐을 벗을 때까지 사랑할게 얼른 보여줘 자꾸 보여줘 하면 둘이 같이 비닐을 쓰고 비를 맞자 이 비닐을 벗고 싶을 때까지 사랑하자 그렇게 말하자 아니면 좁디좁은 우주선에 둘이 타고 우주로 나가서 냄새 지독하고 폐소공포증 터지는 우주선에서 내리고 싶을 때까지 사랑하자 그렇게 말하자 안개의 체온은 몇 도일까 ..

문학노트 2026.07.30

차유오, '순수한 기쁨'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게 만든 힘, 기억)

순수한 기쁨 손을 씻자 비누를 따라 작아지는 사람들 물은 거품을 데리고 어디론가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떠날 때 그들로부터 비롯된 더러움이 크기를 키워갈 때 자신에게는 어떤 모양이 있는지 비누는 보고 싶었다 매일 바뀌는 모양을 기억할 수 없었으므로 흘러가는 대로 두게 되는 생각들 커지는 거품과 다르게 비누는 작아지는 버릇이 있었다 더는 자라지 않고 끝없이 작아지는 노인의 몸처럼 작아지기만 했다 비누는 그런 자신을 멈추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깨끗함을 갖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손을 씻었다 비누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끝에 대해 생각했다 ..

문학노트 2026.07.29

이대흠, '베릿내에서는 별들이 뿌리를 씻는다' (서정시의 율격, 형용의 적층과 심상의 스토리텔링)

베릿내에서는 별들이 뿌리를 씻는다 이 여윈 숲 그늘에 꽃 피어날 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에서 당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세월이 어떻게 동그란 무늬로 익어가는지 천천히 지켜보다가 달빛 내리는 언덕을 쳐다보며 꽃의 고통과 꽃의 숨결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가만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먼 데 있는 강물은 제 소리를 지우며 흘러가고 베릿내 골짜기에는 지친 별들이 내려와 제 뿌리를 씻을 것이다 그런 날엔 삶의 난간을 겨우 넘어온 당신에게 가장 높은 난간이 별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그래서 살아 있는 새들은 하늘 한칸 얻어 집을 짓는 것이라고 눈으로 말해주고 싶다 서러운 날은 입김에 지워지는 성에꽃처럼 잠시 머물 뿐 창을 지우지는 못한다 우리의 삶은..

문학노트 2026.07.28

윤은성, '나의 서울' ('인서울'에 관한 한 단상)

나의 서울 커다란 손과 붙잡힌 어깨가 있었다 계속 붙잡고 있어 달라는 말수 적은 부탁이 있었다 뒤돌아보면 눈이 멀 것 같았다 떨어뜨린 동전들이 굴러가 사라지는 장면은 어째서 기억이 잘 날까 길바닥, 하수구, 수풀, 마르지 않은 도로, 한강대교 북단, 평일에도 이사를 다니는 사람들, 삼각지, 의족과 가발을 파는 가게, 밥과 찬을 가져와 나누어 먹는 교회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 애가 나와 함께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달에 한 번씩 가진 게 없는 연인들이 결혼식을 감행하는 곳이었다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선배와 법전을 외워 알려주는 선배와 마..

문학노트 2026.07.27

이성복, '잊지 못하는 자여, 이제는 잊어라' (중복에 읽는 시)

잊지 못하는 자여, 이제는 잊어라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과 더불어 논다 그는 편지를 쓴다 그는 날이 어두워지면 독일로 편지를 쓴다 너의 금빛 머리털 마르가레테 -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 모든 것은 법이다. 편지도 우유도 휘파람도 법이다. 뱀도 사냥개도 금발머리도 법이다. 맑은 시냇물 속 백동전의 '100'자처럼 투명한 법이 아니라, 숯불 위 몸 비트는 아나고처럼 춤추는 법이다. 진흙탕 아나고가 언제 무도학원 다닌 적 있던가. 사교댄스 안 배운 우리도 법의 잉걸불 위에서라면 스텝 기차게 밟을 수 있다. 그러니 잊지 못하는 자여, 이제는 잊어라. 하늘 무덤 위 꽂힌 곡괭이 사슴뿔처럼 빛나고, 지하 정화조 속 시집 못 간 암퇘지 맑..

문학노트 2026.07.25

백은선, '말 없는 애인' (이데올로기로서의 성애)

말 없는 애인 창틀에 앉은 새 몰랐던 것을 사랑하기에 사위가 어둠으로 뒤덮이고 물은 아래부터 솟아오른다 찌극찌극 우는 작고 노란 새 숲은 너무나 먼데 종지에 물과 쌀을 담아 베란다로 나가자 날아갔다 이젠 아무도 필요치 않은 것을 둘 자리가 필요해서 광화문 언덕을 지나 카페에 들어가면 잠깐 숲을 오해하기 좋았다 그게 자꾸만 나를 이끌었고 언젠가는 모든 날이 비로 채워지리라 그럼 새들은 어디에서 안식을 찾을까 벽들이 벽의 단호함으로 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한 뒤부터 나는 점점 많은 말을 하게 되었다 이기려고 무엇을? 이름이 있었다 불리기 전부터 노래가 시작된 곳이 그 작은 몸속 몇 밀리미터의 심장이라는 게 너무 이상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한쪽 눈은 달콤한 눈물 한쪽 눈은 검은 ..

문학노트 2026.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