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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악마는 디테일' (아름다움과 자본주의의 상관관계)

악마는 디테일 그런 건가요, 하고 내가 쓸쓸하게 중얼거리자 당신은 악마는 유물론자고 천사는 관념론자예요, 라고 말했네. 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대답했고 은행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지. 돈을 빌리려고 길고 장황하고 상투적인 문장이 되어 통유리 저편으로 오후의 햇살이 가득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유리의 저편이 아니라 유리 자체를 유리 자체를 바라보는 사람 그건 대단한 재능예요, 라고 나는 말했네. 유혹을 느끼지 않고 악마를 바라볼 수 있는 희귀한 능력이라서 당신은 웃었다. 당신은 웃었지. 햇빛에는 형이상학이 없어요, 엄청난 근육질이죠, 다 부숴버린다. 나는 행복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네. ..

문학노트 2026.10.25

이병률, '북강변' (고백한 지 이틀째)

북강변 나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한밤중의 이 나비 떼는 남쪽에서 온 무리겠지만 서둘러 수면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보면서 무조건 이해하자 하였습니다 당신 마당에서 자꾸 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팔월의 비를 맞느라 할 말이 많은 감이었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감을 따서 한쪽에 쌓아두었더니 나무의 키가 훌쩍 높아졌다며 팽팽하게 당신이 웃었습니다 길은 막히고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 # 이병률, 눈사람 여관 (문지, 2013) ... 고백한 지 이틀째 : 어떤 남녀가 서로한테 감정을 고백한..

문학노트 2026.10.24

이병률, '기억의 집' (한파주의보)

기억의 집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

문학노트 2026.10.22

이성복, '49 - 무언가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계절)

49 무언가 아름다운 것 아침마다 꽃들은 피어났어요 밤새 옆구리가 결리거나 겨드랑이가 쑤시거나 밤새 아픈 것들은 뜬눈으로 잠 한숨 못 자고 아침엔 손을 뻗쳐 무심코 만져지는 것이 무언가 아름다운 것인 줄 몰랐어요 #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문지, 2003) ... 가장 아름다운 계절 : 가을이 제법 무르익어 어느덧 저물 시기만을 남겨놓으려나 봅니다. 날씨가 제법 추워졌고 아침 기온 역시 한 자릿수를 맴돌더니 이젠 서리나 안개도 익숙해진 풍경이 된 채 나뭇잎들이 점차 붉은색을 띠며 올해를 마무리할 채비를 갖추는 중입니다. 며칠 후면 '상강'이기도 합니다. 미리 계절 인사를 드리는 까닭은 ..

문학노트 2026.10.21

이성복, '그 여름의 끝' (시월 하순을 맞으며)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이성복, 같은 제목의 시집 (문지, 1990) ... 시월 하순을 맞으며 : 모처럼 이성복 시인의 옛 시집을 읽는데, 마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을 때처럼 매우 고색창연하기만 합니다. 절절한 사랑 노래들을 어찌 이렇게 담았을까 ..

문학노트 2026.10.20

이형초, '디아스포라' (2027년 신춘문예, AI와 시인의 차이)

디아스포라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 입구는 화물차처럼 만들자 좁은 열차에 갇혀 초원을 가로질렀던 순간처럼 긴 철로를 지나 부모를 만나러 가고 싶다 척박한 평야에서 씨앗을 뿌리고 토굴을 짓고 새를 잡아먹으며 봄이 오기를 기다렸던 먼 사람들의 이야기 흠뻑 젖은 곡괭이와 밤의 나뭇가지들 따뜻한 진열창에 넣어두자 우연한 행인처럼 그곳을 지나치며 우리의 역사래, 러시아어로 중얼거릴 것이다 유리창 사이로 언어와 계절이 바뀌고 러시아인도 카자흐인도 한국인도 아닌 무국적자의 밤이 쌓이는 곳 비가 오든 눈이 내리든 자신들만의 농장을 만들었답니다, 말하던 큐레이터는 사실 그들의 가족이고, 새벽마다 불을 밝히는 경비원은 자기 이름 대신 그들의 이름을 외우던 가득 찬..

문학노트 2026.10.19

김상혁, '남겨질 여자에게 남김' (토요일 오후)

남겨질 여자에게 남김 질통에 긴 머리칼은 담그고 네가 소란함을 씻는 동안 교역자의 임무는 조용한 식물들을 태양 아래 심는 것 퇴비로 죽어 가는 말의 눈동자가 빛 속에 떠도는 먼지를 좇는다 마을 밖으로 우리는 오직 달리는 가운데 기도했다 혼자 아름다워서 너는 버려진 모든 창밖에 쪼그려 앉아 묽은 창공을 누르고 있다 # 김상혁,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민음, 2013) ... 토요일 오후 : 비교적 늦게 시작한 하루는 느즈막히 글을 쓰는 자리를 내놓습니다. 김상혁 시인의 시들 중에선 다소 낯설게만 느껴진 대목들이 많은데, 이것 역시 '상상'의 소산일지 아니면 뜻밖에도 '낯선' 경험에 기반한 것일지가 좀 궁금했습..

문학노트 2026.10.17

황성희,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 그는 한 가지만 빼고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 가지에 대한 궁금증은 생겨나지 않았다 한 가지만 빼고 모든 것을 말씀드렸다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람들은 그의 한 가지를 한 번은 들어야 하지 않겠냐며 어쩌면 우리가 묻지 않아 이야기하지 않은 걸 수 있다며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모든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은 한 가지에 귀 기울이는 게 아니겠냐며 이런 이야기를 나눈 날에는 이만하면 우리도 괜찮다고 소외된 것과 타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저는 오늘도 한 ..

문학노트 2026.10.15

황학주, '지장천을 보며' (35년 동안의 퇴고)

지장천을 보며 더 검으면 더 강할 지장천변의 삶에 간 치지 않은 건대구 길쭉길쭉 뜯듯 진눈깨비 떨어질 때 어디엔가 두고 온 벌벌 흔들리는 검은 핏덩이들의 서럽도록 뜨겁고 징그러운 것들, 밑불로 살아 있는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알았지만 완행이 놓쳐버린 소읍의 시간 달러 이자처럼 늘어나는 눈발 속으로 사북 3리 검은 다방 안에 앉은 나의 사랑은 아 나의 사랑은 언 정육처럼 유리창 안의 꽃처럼 의견이 없다 아니면 구두처럼 닦은 나의 절망이라는 것도 너무나 세련된 것이지, 아니냐 혼자서는 아프지 않은 편지를 쓰며 입술은 눈물을 깨물며 어딘가를 찾아가는 것이냐 병반 광부와 을반 광부가 교대하는 이 시간에 사랑이라는 말의 뜻..

문학노트 2026.10.14

박소란, '백색소음' (가을비 저무는 저녁)

백색소음 유튜브에서 찾은 밤의 빗소리는 진짜 같다 진짜보다 더 자주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 빗소리는 차츰 거세진다 급히 우산을 펼쳐 든 꿈이 무른 잠꼬대를 흘리고 누군가와 이 일을 이야기하고 싶어 있잖아, 비 내리는 골목을 한창 쏘다니는데 누가 이름을 부르는 거야, 누구지? 하고 돌아보는데 돌아보는데 아무도 없다, 유령인가? 괜히 오싹해져서 근처 24시 커피숍으로 뛰어 들어간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다 보면 안심이 된다 글쎄 밤마다 빌라 주차장에 모여 우는 고양이들 때문에 죽겠어요 얼마나 구슬프게 우는지 어쩔 땐 따라 흐느끼게 된다니까요 울음은 멈추지 않고 ..

문학노트 2026.10.13

김영승, '더러운 손수건' (낡아가는 루틴)

더러운 손수건 손수건을 왜 매일 새 걸 들고 나가냐 나는 한 일주일 들고 다녀도 괜찮다 나는 그 정도로 더러운 나의 손수건을 그냥 목련 같다고 여긴다 아직 피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 손수건을 빨랫비누로 직접 손빨래를 해서 넌다 그러면 목련이다 곧 꽃이 피면 꽃도 목련의 손수건이다 # 김영승, 파리 팔휘 토끼 톡휘 다리 달휘 (창비, 2026) ... 낡아가는 루틴 : 김영승 시인의 '반성'이 꽤 오래전부터 널리 회자된 편인 반면에, 신작시집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로 출간되었습니다. 오늘 꺼내는 시집입니다. "한 일주일 들고 다녀도 괜찮다"는 말처럼 또 "목련의 손수건"처럼 일상에도 점점 더 낡아가..

문학노트 2026.10.12

한재범, '없는 게 없는' (24시간 편의점 시대)

없는 게 없는 무인 매장에 갔다 사장 대신 키오스크가 있다 누가 보면 내가 사장이다 누가 들어오면 나를 해명해야 할 거 같아 무인 매장에 서 있다 이 길목에는 무인 매장이 많다 무인 매장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고 사장님이 보고 계신다 카메라 너머로 이러면 공간 낭비잖아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무인 매장에 서 있다 누가 나를 다녀갔을까 창밖으로 무인 매장을 본다 무덤처럼 눈 감지 않는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거기 안 계세요? 소리가 들려 나갔는데 무인 매장에 서 있다 사장님이 퇴직금으로 차린 매장이다 우리는 한날한시에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 한재범,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창비, 2024) ... 24시간 편의점 시대 : 백화점과 대형마..

문학노트 2026.10.10

나태주, '사랑에 답함' (시월의 두 번째 연휴, 한글날)

사랑에 답함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 나태주,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지혜, 2015) ... 시월의 두 번째 연휴, 한글날 : 우리나라에서 한글을 가장 잘 쓰는 시인이 있다면? 다양한 기준이 있겠고, 그 각각에 따라 어떤 이들은 서정주나 정호승 시인을 아니면 윤동주 시인과 백석 시인과 정지용 시인을 또 누군가는 곽재구 시인의 를 또는 언젠가부터 박준 시인의 이나 한백양 시인의 을 꺼내기도 할 테지만... 교보문고 집계 기준만으로는 단연..

문학노트 2026.10.08

문태준, '시월에' (시월의 첫 주말)

시월에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문태준, 가재미 (문지, 2006) ... 시월의 첫 주말 : 문태준 시집을 꺼냅니다. 이윽고 시월이 되었으며, 공기는 사뭇 선선하기만 해서 좀체 떠나지 않을 줄 알았던 여름철도 이젠 추억..

문학노트 2026.10.02

김경주, 'Let me in' (연휴 마지막 날, 일요일)

Let me in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너라는 이름이야 너를 처음 보았을 때 하얀 눈 위에 넌 잠들어 있었지 네 곁에 나는 가만히 누웠어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난 잠옷을 입고 널 따라갔어 네 잠옷 속에 들어가 웅크렸지 무서워도 난 소리 내지 않고 사랑해 무서워서 난 소리 내지 않고 사랑해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네가 불러준 이름이야 # 김경주, 고래와 수증기 (문지, 2014) ... 연휴 마지막 날, 일요일 : 추석 연휴가 마무리되는 날, 일요일 아침입니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어서 해도 뜨질 않았고 바깥은 어두..

문학노트 2026.09.27

허연, '혜화동 1' (어머니에 관한 추억)

혜화동 1 "엄마랑 같이 걷는 거 창피하지?" 아들 때문에 학생 주임한테 불려 왔던 다리 불편한 어머니는 혜화동 동양서림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소년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밤 잠든 머리맡으로 깨진 음표 같은 게 쏟아져 내렸다 이제는 하늘에 계신(神) 어머니 # 허연, 작약과 공터 (문지, 2025) ... 어머니에 관한 추억 : 추석 아침을 맞으며 처음 꺼낸 시집은 허연의 최신작인 입니다. (어쩌면 올해 대산문학상을 수상할 가능성도 높은 시집들 중 하나입니다.) 허연 시인을 그동안 꽤나 많이 소개한 탓인지 고르고 골라서 올려놓은 시편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명절이기도 해서 부모님에 관한 시..

문학노트 2026.09.25

황유원, '아침' (추석 인사)

아침 네팔의 라이족은 손님이 떠난 후 비질을 하지 않는다 흔적을 쓸어낸다 생각해서 손님은 떠나기 전 직접 마당을 쓴다 자기가 남긴 흔적 스스로 지우며 폐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깨끗한 마당처럼만 나를 기억하라고 쓸어도 쓸어도 쓸리지 않는 것들로 마당은 더렵혀지고 있었고 어차피 더럽혀지는 평생을 평생 쓸다 가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듣기 좋은 건 아침에 마당 쓰는 소리 언제나 가장 좋은 건 자고 일어나 마시는 백차 한잔 산중에 휴대폰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 정지용 「인동차」, "산중에 책력도 없이/삼동이 하이얗다." 변용 #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창비, 2023) ..

문학노트 2026.09.23

문태준, '아무 까닭도 없이' (9월의 하순)

아무 까닭도 없이 돌담을 지나가고 있었다 귀뚜라미가 돌담 속에서 울고 있었다 구렁이가 살던 곳이라고 했다 돌담을 돌아도 돌담이 이어졌다 귀뚜라미가 따라오며 울었다 집으로 얼른 돌아와 목침(木枕)을 베고 누웠다 빈방에 가만히 있었다 귀뚜라미가 따라와 목침 속에서 울었다 방이 어두워지자 밤이 밤의 뜻으로 깊어지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 까닭도 없이 # 문태준, 그늘의 발달 (문지, 2008) ... 9월의 하순 : 벌써 9월도 불과 열흘밖에 남지가 않았습니다.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 주중부터 주말에 걸쳐 있을 예정이며, 이제 곧 9월이 저물면 올 한 해도 마지막 4분의 1만을 남기게 ..

문학노트 2026.09.21

나희덕, '잉여의 시간' (떠난 자와 남은 자)

잉여의 시간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문학노트 2026.09.14

김선오, '부르는 불' (추석을 앞둔 상상력의 계절)

부르는 불 우리, 눈 감고 있었지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말하기로 했지 떠오른 것은 떠올랐기에 사라졌지 네가 사라진다, 사라진다, 반복하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사라진다, 사라진다, 하던 네가 갑자기 다른 나라의 단어를 내뱉었을 때, 나는 내가 모르는 언어임에도 사라진다, 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너는 그 말이 축하한다, 라는 뜻이라고 했지 나는 금세 거짓말임을 알았지만 그렇구나, 답했고 그렇구나, 그렇구나, 억양을 조금씩 바꾸며 몇 번 더 말해보았다 감은 눈의 안쪽으로 떠오르는 촛농과 깃털, 셔츠와 성상 그 모든 것을 묘사하듯이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러자 너는 어둠 위로 나의 그렇구나, 가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너의 사라진다, 가 보이지 않았어 어쩌..

문학노트 2026.09.13

장이지, '시' (시평 쓰는 시인)

시* 고백이란 제도에 어서 오세요. 여기서는 진실만을 말하세요. 그리고 잊지 마세요. 마지막엔 강물 위로 비어 있는 죽음을 띄우는 것을. 이를테면 죽은 채로 되돌아오는 아도니스 인형을, 시체의 의식을. 눈물의 유속(流速)을 계산하는 걸 잊지 마세요. 고백이란 회사에 어서 오세요. 연분홍 치마에 어서 오세요. '문학소녀가 이렇게 예쁠리 없어'에 어서 오세요. '알바 하는 문단 아이돌'에 어서 오세요. 시와 음악이 있는 문학 콘서트에 어서 오세요. 시를 사랑하는 모임의 육담(肉談)에 어서 오세요. '기교 시인은 상처받지 않고......' '언제나 이 고비를 넘어가는 법의 사각을 알고......' 회사에서 ..

문학노트 2026.09.08

김행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대산문학상과 '전망'에 대한 의문부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사람처럼 내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녔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촛불이 바람벽에다 키우는 그림자처럼 기시감이 무섭게 너울거렸다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 아카시아나무보다 더 큰 아카시아나무그림자 그러나 처음 보는 노인인데...... 힘이 세군, 내 기억이 벌써 노인을 만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 # 김행숙,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문지, 2020) ... 대산문학상과 '전망'에 대한 의문부호 ..

문학노트 2026.09.04

이훤, '라스트 워드' (사진으로서의 예술, 시학)

라스트 워드 근래에 무얼 했어요? 워드 플레이와 닭 튀김 빠지고 묻고 길어 올리고 선택하지 않은 곤경과 선택 가능한 유익 사이 얼마나 간편하니 얼마나 다행이니 타자가 있어서 우리를 간과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잊게 되는 질문과 다 잊고 나면 그제야 궁금해지는 몇 개의 말 우리를 지탱하는 그래서 어제 빠뜨린 문장이 오늘 몇 도로 익고 있나요 손으로 만지면 쥐고 있던 것들 사라진다 입에 맞는 말을 찾고 있다 우는 표정으로 튀겨지는 동안 친구의 선의가 폭력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모르는 이의 질문이 우릴 구원하고 애인이 손톱을 숨기기도 하는 어쨌거나 믿음과 말은 별개의 닭 말이 믿음..

문학노트 2026.09.03

김경미, '무거운 여행' (낯선 여행, 낯선 생각)

무거운 여행 여행가방에는 공기 같은 가벼운 옷과 설렘만 챙긴다지만 나는 가장 무거운 어둠만 골라서 챙긴다 매일 오르내리는 시내버스 발판의 어둠 혀를 삭히는 회사 월급의 어둠 계산기를 두드리고 난 뒤의 어둠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어둠 좀처럼 상처 낫지 않는 어둠 꾸역꾸역 참은 어둠 웃어본 일 오래된 어둠 무거워 떠날 수 없을 만큼 챙겨 넣고 낯선 곳에 당도하면 그 어둠들 하나씩 꺼내어 판다 처음 보는 길과 골목과 구름을 살 수 있고 처음 보는 공기와 나뭇잎들, 바닷가 모래와 커피집도 살 수 있다 양털을 닮은 사람들에게는 밥도 살 수 있다 마지막 하나까지 다 팔고 나면 새들이 뼈 속..

문학노트 2026.09.02

이문재, '예술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법)

예술가 화가같이 생기셨어요 본관 뒤 작은 연못가 벤치 환자복 차림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연못에는 팔뚝만 한 비단잉어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화가요?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평상복 차림의 아주머니가 거들었다 멋지게 생기셨어요 쨍한 수면에 동그라미 몇개가 그려졌다 왁자한 매미 소리에 빈틈이 없었다 내가 화가처럼 보인다? 이발소에서 두어번 철학하는 사람 같습니다 교회 근처 커피숍에서 또 두어번 목회 활동 하시나 봐요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대학병원에서 산책 나온 두분께 덕담 한마디 남기고 돌아섰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지요 눈부시게 푸르른 늦여름 살고 있는 전셋집 경매 ..

문학노트 2026.09.01

김경주,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팔월과 구월 사이, 간절기)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

문학노트 2026.08.31

정호승, '짜장면의 힘' (경전을 읽는 일요일 아침)

짜장면의 힘 짜장면은 힘이 있다 아버지의 힘이다 짜장면은 장딴지에 꿈틀대던 아버지의 젊은 핏줄이다 핏줄의 힘이다 나는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젊어진다 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짜장면을 먹고 길을 달린다 아버지가 짜장면을 사주실 때마다 힘차게 더 빨리 달린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짜장면의 힘에 대해 슬퍼해보았다 아버지의 짜장면을 먹던 내가 오히려 늙은 아버지가 되었다 밤하늘은 짜장면처럼 캄캄하다 별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진다 서울에 사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다가 손수건을 꺼내 밤하늘의 눈물을 닦아준다 짜장면은 힘이 세다 짜장면을 먹으며 가난도 함께 나누면 가난이 아니다 죽기 전에 맛있는 짜..

문학노트 2026.08.30

정현우, '늦잠' (모처럼 늦잠)

늦잠 죽은 할머니와 고양이가 눈 밟는 소리에 깼다 눈곱을 떼며 문을 나섰다. 늦잠이 없는 것들은 벌써 일어나 가버렸나, 저 눈 고개를 넘어 주검 속을 다녀올 수 있다면 내가 서두를 수 있다면 미안, 내가 많이 늦었다고 인간에게 잠이 없다면 어떤 이별도 없겠지. 나는 잠이 들 때마다 그곳에 갈 수 있다. # 정현우,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2021) ... 모처럼 늦잠 : 늦은 하계여행을 다녀온 후에 곧장 늦잠을 잤습니다.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탓도 있겠고 다소는 시읽기가 지지부진했던 모양도 있었을 겁니다. 팔월이 저무는 주말이고요. 곧 점심시간입니다. ..

문학노트 2026.08.28

김이듬, '가을하다' (기다림에 익숙해지는 계절)

가을하다 10월이 제일 좋아 이렇게 말하고 너는 사라졌다 너는 10월 외에는 아무것과도 닿고 싶지 않은지 내가 바다를 좋아해서 바닷가에 숨는 건 아닌데 잠수부도 올라오던데 네 답장을 기다리다가 나는 왜 하필 10월인지 네가 태어난 달인지 가을의 어원까지 찾아본다 달빛이 천금 같다 실낱 같은 초승달이 일찍 지기에 10월 밤은 온 힘으로 깜깜해진다 네게 보낸 이메일은 며칠 내내 읽지않음으로 표시된다 대놓고 전화나 문자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10월에 나는 불안한 사람이 된다 10월에는 10월에 관한 시가 많고 8월에는 여름을 노래하는 시가 많고 나는 살고 싶은 달이 없어서 아무 날 아..

문학노트 202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