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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아는 사람 다섯을 만났다

종로에서 아는 사람 다섯을 만났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께의 종로를 우연히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색한 미소로 인사하면서 지나치곤 했지     정독도서관에서 한강을 닮은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고         뒷모습을 한참 쳐다봤어 머리카락이 너무 하얗게 세서    아직도 멀쩡한 나는 글쓰기가 부족해서일 거라고 믿었지     새벽마다 글쓰기를 연습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리 똑같애    부지런한 새가 일찍 죽는다던 허튼 농담이 더 지겨워서 그래       소격동 골목길에서 회사 사람을 만났는데 인사도 없이         유니폼만 서로 힐끗 쳐다보았어 각자의 점심시간을 잊은 채    다가올 구조조정의 순간들을 서로 애도하며 분주하기만 할 뿐     직급을 없애겠다며 너도 나도 프로 골퍼..

글/습작 2024.05.01

늦봄

늦봄       개여울을 한참 바라본 적 있었습니다     청계천과 진관사를 오간 걸음이 숨을 고르고 어느 한철을 인화한 순간     빌딩숲과 능선을 따라 두둥실 구름들이 흐르면 그게 그리 좋았습니다     얼음이 녹고 물이 흐르고 벚꽃이 흐드러진 동안    개울가에 소복하게 쌓인 꽃잎이 천천히 썩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떠나고 바람이 부는 동안은 기억도 함께 풍화된 순간들이었고         제법 두툼해진 라일락 잎이 영롱히 빛나는 동안    더는 없을 벚꽃에 대한 그리움도 연초록으로 갈아입는 풍경을 봅니다          늦봄입니다    오지도 않을 사람을 턱없이 기다리는 일은 내내 허망하였을 뿐이고       가지도 않을 바람을 보낸다는 일도 때로는 내내 맞아보는 일입니다      ..

글/습작 2024.04.30

필사의 나이테

필사의 나이테                계단을 세워 제단을 덧대서    죽음과 죽음 이후의 기분을 꺼내고    가장 먼 곳에 차려질 식탁을 준비한다     이름을 부르는 쪽에    이름이 저무는 쪽에     긴 문장을 새긴 채 대답을 비워둔다    벗어나려고 찾은 입구와    굳어지기 싫어하는 발목         - 정영효, '도달할 미래'에서 ("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 문학동네 2023)       등단생활 15년 동안 시집 한 권인 시인의 시를 읽으면     습작생활 30년 내내 시집 한 권인 나 역시 과작이었고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일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슬픔과 죽음에 대해 한참 동안을 생각했으며     사랑과 헌신에 대해 한참 동안을 고민..

글/습작 2024.04.28

황무지

황무지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못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 장옥관, ‘봄밤이다 1’에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기억은 늘 다가온다    한사코 손사래를 치지만 어김없이 다가온다    다가와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곁에 앉는다    그럴 적마다 저어하는 표정으로 또 쳐다보지만    안중에도 없는 기색으로 그렇게 다가와서는    그동안 무얼 했냐면서 금세 까먹은 거냐면서    묻지도 않고 아무 말없이 그렇게 곁에 앉는다       기억이 앉아 있는 자리에 민들레가 ..

글/습작 2024.04.27

유보적인 단어들

유보적인 단어들       이상하지 않니    저 아름다움을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움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어     문을 열면 어둠이 이동한다     눈밭 위에서 우리는 덜 검은 것이라 불리기에 적당했다    입고 온 하얀 스웨터를 부를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 김리윤, '비결정적인 선'에서 ("투명도 혼합 공간", 문지 2022)       한참을 서성였다    마지못해 한 마디 말이 식사 인사라면 우린 헤어졌을까    끝끝내 답을 찾지 못하였고     함께 한 시절들이 있어서 좋았다     어느 차가운 겨울밤 네가 건네준 따뜻한 위로처럼    어느 선선한 새벽에 말갛게 웃던 네 대화창처럼    때때로 신선한 기운은 연초록 잎으로 무성하고     함께 그리워한 시절들도 있었다     어느 ..

글/습작 2024.04.25

저녁에 내린 봄비

저녁에 내린 봄비 우리는 옥상에서 젖은 몸속으로 무덤 냄새가 추락할 때까지 서로의 빛을 마시며 십자가를 태워 올렸다 너무 아름다워서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믿었다 - 최백규, ‘너의 18번째 여름을 축하해’에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2022) 비가 내린다 봄비가 내린다 봄비는 자기의 정체성이 아니라며 나무 바람 햇살 풀꽃이 더 가깝다며 오늘은 바람이 불어서 좋았다면서 봄비가 내리고 있다 봄비를 맞으러 밖에 나간다 #

글/습작 2024.04.24

우리의 노래가 한 줌 모래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노래가 한 줌 모래가 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부르던 노래가 떠올랐다 이 광장을 벗어날 수가 없구나 이 노래는 끝나지 않는구나 매일 밤 모든 길은 광장으로 이어졌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그랬다 - 강성은, '밤의 광장'에서 (Lo-fi, 문지 2018) 우리의 노래가 한 줌 모래가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모래성을 쌓는 소녀를 불러내고 소녀로 하여금 하얀 모래성을 쌓게 만들고 비바람에 모래가 씻겨 설령 소녀가 울어도 등을 토닥이면서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면 때때금 잔혹한 상처들은 모래성만도 못해 노래가 사라진 광장에는 햇볕만 가득하고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 속 맑은 한 점 구름 유일하게 오갈 수 있는 교통수단? 이 낙타 다시 낙타의 볼을 쓰다듬고 함께 대화하면 너 왜 자꾸 반말이야? 미안해..

글/습작 2024.04.23

덴마크로 떠난 미인

덴마크로 떠난 미인 나는 같은 남자와 두 번 연애에 빠졌고 두 번 작별인사를 했다. 안녕. 택시는 종로1가에서 종로2가로, 동대문으로 미끄러지듯 미끄러지고 있었다. 안녕. 낙엽 몇 장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경관 한 명이 갑자기 모자를 벗어던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몽둥이가 공기를 휘저어댔다. 너무나 깨끗한 거리였고 어느 누구도 겁에 질리지 않았다. 달리는 사람은 헉, 헉, 헉, 입김을 내놓는다. 낙엽 몇 장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 김행숙, '깨끗한 거리'에서 (이별의 능력, 문지 2007) 백만 원을 훔쳐 달아난 직원을 쫓고자 온 직원이 수소문하며 혼비백산인 동안 나는 시큰거리는 허리채만 붙잡은 채 찡긋, 하며 사라지던 표정을 기억했고 덴마크에서 살고 싶어요 이랬다면 또 단서가 될까... ..

글/습작 2024.04.22

앤솔로지 2

저자의 말 희망과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요즘이다. 비관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가 비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쉬운 지금, 우리에게 시는 특별하고도 소중하다. 시란 다른 세계를 꿈꾸도록 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우리 앞에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세계의 가능성을 개진하는 것이야말로 시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한권의 시집은 하나의 세계에 준하는 것이고, 한권의 시집을 읽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므로, 시를 사랑하는 우리는 한권의 시집을 읽으며 우리 자신조차 몰랐던 우리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선택지가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비관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다른 세상을 상상할 힘이 아닐까. 우리는 시를 통해 그 힘을 잠..

문학노트 2024.04.21

그토록 부끄러웠던

그토록 부끄러웠던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 김소연, '다른 이야기'에서 (i에게, 아침달 2018) 처음 만난 날에 오천 원 삥을 뜯었다. 친구들 술값을 내주느라 집에 갈 차비도 털려 하교하던 길의 오늘 처음 본 표정을 붙잡고 삥을 뜯었다. 문학회를 탈퇴했던 바람에 금방 도로 갚지도 못해 한참 동안을 서성였다.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조용히 앉아 ..

글/습작 2024.04.20

사월의 아침이 잔인하다면

사월의 아침이 잔인하다면 나로부터 사과 한알이 떨어진다 덜 익은 껍질을 속옷처럼 입고 거리와 부딪친다 사월이 주워 담지 못한 한마디 끝없이 구른다 사월이 끝나도 나는 끝나지 않듯이 - 한재범, '사월이 좋아'에서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창비 2024) 꽃잔디가 한가득인 거리엔 봄바람이 일고 봄의 바람이 몽글한 구름들 곁으로 흐르면 이윽고 아침이 찾아온다 초미세먼지가 가득한 창문 밖을 쳐다보면 마스크를 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함께 걷고 있다 초미세먼지만 평등한 것이지 마스크는 그렇지가 못해 간밤에 흩뿌려진 대화들이 차곡차곡 쌓인 숫자들만 어김없이 시간을 재촉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순간에도 계속 누군가는 밀어를 시도했지만 또 누군가는 애써 외면하고픈 시절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는..

글/습작 2024.04.19

김수영, ‘푸른 하늘을’

[4·19 특집] 푸른 하늘을 김수영 (金洙暎, 1921~1968)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김수영 시인이 1960년 6월15일에 발표한 작품. 4·19가 일어나고 두 달이 못 되어, 투쟁의 피가 마르기 전에 나온 시. 첫 연은 다소 산문적으로 시작한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수정되어야 한다”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의 하나로 이어진 긴 문장으로 포문을 연 뒤에 2 연에서 탄알 튕기듯 선명한 언어들을 던지며 산문에서..

문학노트 2024.04.19

앤솔로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두 권의 앤솔로지인 창비의 과 문지의 를 훑어보는 시간입니다. 먼저 더 오래된 창비는 창비시선 중 총 74명의 시인들을 추렸고, 창비시선 1호인 신경림의 가 아닌 2호인 조태일의 즉 1975년부터 493호인 황유원의 즉 2023년까지를 담아냈고요. 46판 변형 (127×200m)의 크기로 아르떼 표지를 채택하였고 총 175페이지 분량에 가격은 7,000원에 냈습니다. (출판단지라서인지 확실히 출판경쟁력은 독보적인 편예요.) 창비시선 전체를 아우른다는 면에서 기념비적 요소를 가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창비가 자부심을 가질만한 이정표들로 꼽힐 1978년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1981년 신춘문예 당선작이 아닌 1983년 창비시선 버전) 등이 함..

문학노트 2024.04.19

조급해지지 말기

조급해지지 말기 11월부터 성탄절 트리 켜놓듯 사람들은 피지도 않은 벚꽃축제 일정을 잡고 피지도 않은 연꽃모양 등으로 초파일을 맞고 또 설 연휴까지 켜둔 트리처럼 눈처럼 벚꽃이 다 지면 가을까지 그리워하고 큼지막한 연잎이 모두 시들 때까지 지켜본다 조급해지지 말기 사랑이 덧난다 기다림과 그리움은 제각각의 분량이 있었고 더 오래라 늘어나지도 짧다고 줄지도 않아서 그저 정주행하면 그만일 법 이게 각자의 최선이기 때문 조급해지지 말기 속절없는 그리움만큼 녹슨 상처 #

글/습작 2024.04.18

솟대

솟대 오리백숙을 먹은 다음날 아침 전지를 한 나무 끝 매달린 하늘 밤새 오리가 날았었나 봐 사람과 하늘을 이어준다 믿었고 가지를 쳐낸 확신도 굳건했겠지 정작 오리는 하늘을 날지 못해 밥상 위에 올려졌을 뿐 가끔 오리를 닮은 이가 등장해서 나만 믿으라고, 거침없는 말들 속 푸른 날개를 혹 가졌나 훔쳐보면 의심하는 버릇만 생겼어 밥상 위의 오리를 품평하는 동안 어김없이 하늘은 가지 끝에 걸려 맘만 먹어도 오를 수 있었을 텐데 비평하는 게 제일 쉬웠어 질문은 해도 판단을 않는다는 게 날아오른다던 오리를 믿어 본 일 어젯밤 역시 그렇다면 다행일 법 #

글/습작 2024.04.18

쓰린 속을 부여안은 채 너는

쓰린 속을 부여안은 채 너는 엑스트라 배우가 카메라 조명을 벗어나 무심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진단을 받고 치료를 포기하고 혼자 깨어나 천장을 바라보는 새벽 어둠이란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다. - 이장욱,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중에 ("음악집", 문지 2024) 흐려진 화면 위 몇 개의 물방울이 떨어지던 순간 기어코 아무 말없이 화면을 닫은 적이 있었다 이른 새벽 쌀쌀한 공기 그제부터는 역류성 식도염 약을 먹기 시작했고 초여름의 한기가 약기운처럼 몸속을 파고든다 따뜻해지면 좋겠어, 좋겠어서 이불을 다시 감싸 쥐고 누워서 물끄러미 예전 대화들을 되짚어보는 순간이 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동이 트는 일만 같아서 단 한 번 절망한 적 없이 인내심을 키워온 것뿐 때때로 반갑게 인사하던 때를 그리워한다..

글/습작 2024.04.18

확고부동한 미래, 광화문에 피던 수국

확고부동한 미래, 광화문에 피던 수국 그 밤을 묻힌 붓은 이미 붓을 초과하는 무엇이고 그 붓 지나간 자린 모조리 한밤중 텅 빈 골목이 되어 누군가 밤새 그곳을 서성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서 있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거기 놓인 문진의 무게만큼이나 확고 부동한 밤 - 황유원, '검고 맑은 잠' 중에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학동네 2023) 따갑기만 한 봄볕 아래 광화문 거리를 거닐다 수국이 피던 자리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았어 지난 여름 어느 한 저녁, 어두운 골목에서 너는 연초록으로 물든 수국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 - 하얗게 핀 네가 금세 연초록으로 변하던 순간 넌 이제 수선화도 물망초도 아닌 연초록 수국 일방적 선언을 하였을 때, 수선화를 닮았던 네 표정도 함께 투명해졌어 투명하기만 한 여름을 ..

글/습작 2024.04.17

진은영, '청혼'

모처럼 '오래된 거리처럼' 오래된 시 한 편을 꺼내듭니다. 10년 전의 크디큰 트라우마를 겪던 대한민국은 계간 을 통해 진은영의 시 한 편을 접하게 됩니다. 마치 1980년 5월을 겪은 대한민국 전체가 숨죽여 맞던 이듬해 신춘문예에서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다수는 그 어떤 감정의 '정화'를 떠올렸을 법합니다. 그토록 오래된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저항은 하나이고 사랑과 치유도 하나"라고 시집 전체가 작게 말할 뿐이라던, 또 "예술은 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며,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적은 시집 발문에서도 아마 동일한 느낌을 얻으셨으리라..

문학노트 2024.04.16

욕망, 부질없음에 관하여

욕망, 부질없음에 관하여 모처럼 단잠에 빠졌다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그런 걸 소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내 주변엔 많다 어제나 오늘로 충분한 게 아니고 내일이 과분해서 그런데 사랑은 해야겠지 얼마나 정직할 수 있을까 돈과 노동과 사랑 앞에서 정직한가 돈과 노동과 사랑은 만져지지 않는 부위가 만져지기를 바라는 그런 걸 소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인 것 - 고선경, '돈이 많았으면 좋겠지' 중에 ("샤워젤과 소다수", 문학동네 2023) 스스럼없이 바란다는 게 부질없음은 그걸 제대로 상실해 본 다음에 느낄 법 오늘도 마리는 산책을 가자 조르지만 매일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몰라도 열심히 자주 산책을 시켰으면 좋겠어 적어도 남한테 피해를 주진 않으니까 세상 일들이 맘처럼 그리 편하지 않아 눈치도 살펴야..

글/습작 2024.04.15

진은영, '방을 위한 엘레지'

방을 위한 엘레지 1 꿈이 죽은 도시에서 사는 일은 괴롭다 누군가 살해된 방에서 사는 일처럼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이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듯 봄이 겨울을 이기고 온다는 것과 그 반대도 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뒤에 오는 것이 승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화성이여 지구를 이기길 내일이여 오늘을 이기길 썰물이여 밀물을 이기길 그러나 봄, 여름 뒤엔 다시 겨울이고 무지노트와 지구본 연필깎이와 제본한 『예술의 규칙』을 한 줄로 늘어놓은 내 방 책상 위로 가장 나중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든 다른 것이 시작될 때마다 예언은 빛나며 빗나갈 테니까 여기는 방이 아니라 거리이며 나는 다만, 여기를 걸어서 지나가는 거라고 벽과 벽 사이를 서성이며 생각하는 것이다 2 이 방에는 수만 개의 유채꽃이 겨울의 ..

문학노트 2024.04.13

인연

인연 어디서든, 우리는 텅, 텅 비어, 머리카락 몇 개가 날릴 뿐이었다. 누가 돼지를 칠 것인가. 닭들은 달을 향해 날아올랐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얼룩덜룩, 재치 있는 말들이 달을 향해 울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는. 아무것도.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시인해야만 했다. - 서정학,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중에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지, 2017) 날 선 고독이 옆자리의 손짓을 외면한 채 제 발등만 노려보는 계절이 있어 노려본다기보다는 어쩌면 응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삶에 대한 깨달음은 항상 어떤 계기를 두고 뒤늦게 발동하기 시작해 스스로 가파른 무덤에 오르게 되면 함께 할 벗들도 사라져 온전히 제 혼자의 힘으로 정상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걸 ..

글/습작 2024.04.08

껌 종이를 열자 반짝이는 은색이었다 무수한 햇빛이 그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너무 환하게 웃는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벌써 몇십 년째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 - 김선오, '껌 종이' 중에 ("사랑에 대답하는 시", 아침달, 2021) 껌을 좋아한다며 종류도 여러 가지인 걸 차곡히 쌓아놓는 버릇 한 번도 같은 종류를 꺼낸 적 없었고 문학회 후배가 낙서장에 대고 썼던 얘기 단물 다 빠지면 아무렇게나 툭 뱉는 인연 같아 후배를 그런 취급하지는 말아 달라던 읍소였고 졸업하고 선배들을 그런 취급했던 건 그 후배 성공하지 못하면 서러운 법 하다못해 부모님 장례식장에 면이라도 서려면 그립다는 말 한 마디조차 못해본 채로 껌이 되어 수십 년을 함께 살았어 이젠 그만 한 번 뱉은 껌을 도로 씹는 일도 없으니까 무..

글/습작 2024.04.06

연분홍, 연초록,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퍼플, 2024)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연분홍, 연초록 단편집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차례 작가의 말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졸업 오이도 북극곰과 두더지의 상관관계 ( 빈 칸을 채우시오* ) *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헤이리의 가을, ...... ※ 에필로그 (벚꽃, 종로학파)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작가의 말 처음 습작을 하던 때가 기억난다. 하룻밤에 쓴 소설들이 태반이며, 하나같이 치기 어린 잡글이기 일쑤였다. 그 흔적들을 묶어보는 까닭은? 일종의 출사표 같다는 생각일 뿐.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 2024년 봄 호수를 품은 정..

2024.04.06

'2판'이라는 숙제, 일단은 '2쇄'부터

이른 새벽부터 작업을 해 꽤나 어렵게 마무리를 했다 사실 '퇴고'라는 일은 늘상 해오던 일임에도, 막상 '개정판'을 염두에 둔 작업들은 그리 익숙치가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시집과 단평집을 좀 더 가독성이 좋도록 조판의 형태를 변경하였고, 표지 디자인 역시 조금씩 손을 다시 보았다 이제 문제는 앞으로의 '퇴고'다 그것에 따라 실질적인 '초판 2쇄'가 아닌, '2판'의 발행을 남겨놓게 되는 셈이다 (언제쯤에?) # 시집, https://dante21.tistory.com/4504 단테, 종로학파,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퍼플, 2023)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단테, 종로학파 시집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개인노트 2024.04.05

벚꽃

벚꽃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 진은영, '청혼' 중에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여름을 재촉하는 봄볕 눈밑에 혓바늘이 돋는데 분홍빛 구름을 닮았구나 봄의 천사들이 내려앉았나 연신 사진 속 모델이 되고 순식간에 찾아온 꿈처럼 느닷없는 안부에 놀라고 반갑고 또 아리기만 해서 그해 겨울 함께 먹다 남긴 솜사탕처럼 편지를 주고받던 마음처럼 온기와 함께 녹아 흐르고 꽃잎이 녹아 흐른 냇물에 다시 봄비가 찾아올 테고 봄비가 두드리는 화음을 텅 빈 듯 고즈넉한 지혜를 네게 향하는 법을 배울게 #

글/습작 2024.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