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습작 67

가을, 밤부터 새벽

가을, 밤부터 새벽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새벽은 이제 선선해졌나 봅니다 제 마음도 곧 선선해지려나 봅니다 서늘해지려면 아직은 좀 멀었고요 뒹구는 낙엽 몇 장을 무심코 밟으면 철 지난 노래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음악은 아직 떠오르지 않고 가을의 침묵이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낙엽이 떨어진 자리를 보았습니다 밤의 정지 버튼은 보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고즈넉하게 흐르고 있는 밤 #

글/습작 2024.10.14

유보적인 단어들

유보적인 단어들 이상하지 않니 저 아름다움을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움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어 문을 열면 어둠이 이동한다 눈밭 위에서 우리는 덜 검은 것이라 불리기에 적당했다 입고 온 하얀 스웨터를 부를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 김리윤, '비결정적인 선'에서 ("투명도 혼합 공간", 문지 2022) 한참을 서성였다 마지못해 한 마디 말이 식사 인사라면 우린 헤어졌을까 끝끝내 답을 찾지 못하였고 함께 한 시절들이 있어서 좋았다 어느 차가운 겨울밤 네가 건네준 따뜻한 위로처럼 어느 선선한 새벽에 말갛게 웃던 네 대화창처럼 때때로 신선한 기운은 연초록 잎으로 무성하고 함께 그리워한 시절들도 있었다 어느 봄비가 창문을 두드리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고 어느 장면에서는 눈자위가 흐려지기도 했었다 남들 몰래 키워..

글/습작 2024.09.23

추석

추석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적당하게 이어진 끈 야무지게 매듭을 짓고 하늘에 연을 띄우면 그만큼 넉넉해지고 아직은 차가운 물밑 그래도 따스한 돌 하나 무심히 줍고 또 쌓으면 물가에 세운 5층 석탑 그만큼 그리워지고 # 추석이라 졸필의 인사부터 드립니다. 넉넉함과 그리움이 깃든 명절 한가위답게 모쪼록 보고팠던 분들과 행복한 시간 한가득 보내시고 (혹 그렇지 못하면 그러려고 노력하는 시간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연휴 되시기 바랍니다. ## "시를 쓰는 일 못지않게 시를 소개하는 일을 계속 해왔다. 시는 과일의 향처럼 향이 은은하게 좋다. 흐릿한 듯해도 빛이 가만하게 나온다. 무너진 가슴인 줄 알았는데 가슴에 다시 파릇한 싹이 조그많게 움튼다. 시는 언덕과 같이 보다 높은 곳으로 데려간다. 어디에서..

글/습작 2024.09.16

원태연을 닮았나

원태연을 닮았나 때때로 어쩔 수 없음은 명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원태연을 닮았단 소리를 들으며 시를 쓴다는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풀잎에 이는 거품 같은 방울들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가을밤 무지개를 대신한 구름들을 닮아 바람이 한줄기 속삭이고 나면 원태연이 쓰지 못한 시는 무얼까를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저 속절없음이기에 때때로 풀잎에 인 방울들이 무지개를 대체하고 찰나의 순간을 목격한 그림자들만 웅성대도록 구름들을 닮은 시를 써보기도 하였습니다 새벽을 머리에 인 채 유유히 흐르는 구름 달빛, 몇 자리의 별들이 함께 흐르면서 오가는 계절의 달력 몇 장을 재촉하게 되면 원태연을 닮은 정서가 불쑥 일어서기도 해 가끔은 도로 눈을 감았습니다 때 늦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구월..

글/습작 2024.09.11

감지하지 못한 우연은 트로이의 필연일 뿐

감지하지 못한 우연은 트로이의 필연일 뿐 허연의 시를 읽는다 참담하다는 말을 배워가는 중이며 참담한 현실에 괴로워하는 중이다 시인의 마음은 오죽했을까를 비루한 감정들은 결코 쓸모없음을 그 쓸모없음을 꼭 노래해야 할까를 미처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어쩔 수 없음이란 말 앞에 붙여둔 갖은 핑계와 섣부른 설렘의 진자가 내 시간들을 온통 갉아먹었다 얼마나 더 쓰라려야만 하는지 얼마나 더 몹쓸 경우를 겪어야 할지 그걸 미리 넘겨짚지 못한 어리석음 결국 낙엽처럼 쌓일 마음의 상흔이 실은 말 못 해온 진실의 불편함인지 끝끝내 숨겨둔 가슴의 치부였는지 아프다고만 말해다오 이미 나는 아프므로* * 감정이란 그저 물가에 주저앉는 속수무책일 뿐... #

글/습작 2024.09.06

배신

배신       누군 하고 싶어 하겠냐며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다고    내 맘도 내 맘 같지가 않다고    고래고래 악을 써보지만    결론은 달라지지가 않는다     슬프다    폐허가 된 믿음의 가시가 박혀    심장에서 마구 피가 흐르지만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일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일     누군 그러고 싶었겠냐며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떠올려    하지만 내 맘 같지 않고서야    그저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그래서 쓸쓸하기만 한 일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그래서 늘 마음이 아프다    가장 사랑한다던 사람한테    가장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       그걸 늘 나만 몰랐었구나    그저 어리석은 내 탓이거늘        #

글/습작 2024.09.05

글쎄

글쎄 조금 덜 악마화된 사회를 꿈꾸어도 악마 같은 세상이 도통 잦을 줄 몰라 부스러기로 쓰러진 생을 간수하느라 내 청춘에도 이미 녹이 슬어서 누군가는 카톡창의 오해를 빌미로 또 누구는 절망스런 인면수심 앞에 가파른 일상을 애쓰면서 감수하고... 분노할 열정이 사그라듬도 깨닫고... 늙기도 서러운데 청춘은 웬말이니... 그저 쓸쓸하기만 한 남루한 초상 앞 굴욕과 함께 지불한 양심의 무게로 저마다의 생을 굳이 앓아온 것 어느 자리에서 풀꽃이 일지 않으며 이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방식이며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한 필살기 그 자리와 앉는 태도를 배우며 글쎄 무엇을 얻고자 무얼 잃고 있는지를 무엇을 그리워하며 기다려왔는지를 내내 까먹으며 지내온 건지도 몰라 자리를 옮기며 태도를 고치는 중 녹이 슨 청춘의 날개는..

글/습작 2024.08.26

지나가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 마주 한 적 없는 오래된 골목 누군가를 기다렸었지 때론 너였다가 너로 인하였다가 나였다가 그게 비로소 나였음을 뒤늦게 알아채곤 했는데 맡아본 적 없던 배역 뒤숭숭하기만 한 대본 부족한 시간들 틈에서 때론 모멸감도 느꼈지 엑스트라의 모진 운명이거늘 받아들일 줄도 모른 나는 울고 또 한 번 더 울기만 했었는데 뜻하지도 않던 한 통 편지에 이토록 뛰는 심장이 있을까 설렘이었을까 두려움일까 온통 낯선 대사들 뿐인 장면 기어코 한마디 내뱉는 말 잘 지내세요, 행복하세요 두서도 없는 덕담을 내놓고 온통 바쁘기만 했던 발걸음 비로소 잦아들던 가슴 어떤 사람 #

글/습작 2024.08.22

절골계곡에서

절골계곡에서     - 망각에 관하여          보세요,      발가락에 잡힌 물집을 계곡에 담그면 이내 쓰리고 얇은 살갗에 느껴지는 세찬 물살을 기억할 적 많았습니다 세상살이를 겪다 생긴 상처는 그만한 무게의 슬픔과 그만한 속도의 망각을 동시에 경험하는 모양입니다     투명한 석영의 빛이 햇빛에 산란될 만큼 더디게 진행하는 오후는 제 아무리 애를 써도 지우기 힘든 무늬를 갖습니다 무늬의 모양에 따라 그것들이 체제와 희망과 이별과 그리움을 차곡히 챙기는 시간인가도 모르겠습니다     마른장마 탓에 빛을 잃고 먼지가 희뿌연 돌들 틈에선 이따금 휘파람 소리가 들릴 적 있는데요 누군가의 노래를 듣다 보면 저마다 꿈꾸게 되는 사연들이 하나둘 등장하게 되고 함께 춤추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보..

글/습작 2024.08.19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지, 1980) 사랑은 누군가를 아끼고 보듬고 보호한다는 일 보채지도 않고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고 그저 상처를 주지 않고 지켜본다는 일 그저 살아 있음에 기뻐할 줄 알면서도 모두한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만한 일 한 떨기 능소화 꽃이 지는 풍경을 보면서 그 고혹함에 속절없이 안타까워 하는 일..

글/습작 2024.08.01

꿈을 묻는다는 일

꿈을 묻는다는 일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읽으면 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가 함께 온다며 이를 맞는 심경은 필시 환대일 것이라고 말한 시인의 마음을 오롯이 느껴보기도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서 쉽사리 꺼내기 힘든 질문들이 몇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가장 하기 힘든 말 중 하나는 아마도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일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곧 그 사람의 전부에 관한 질문이자 그 사람이 갖는 일종의 '가치'에 관한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별 생각도 없이 던져지는 아주 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한 사람에게서 그러한 질문을 받게 된다면? 필시 이는 매우 진지한 '관계'를 뜻하는 것이므로, 가장 진지하..

글/습작 2024.07.29

사랑의 찬가

사랑의 찬가    - 셀린 디온의 공연에 부쳐           사랑이 없는 도시를 슬퍼하며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이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사랑을 정말로 해본 사람은 알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셀린 디온이    왜 파리 올림픽 마지막 무대였나를    왜 역대급 퍼포먼스를 펼쳤는가를    어째서 사랑은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사랑은    왜 죽음도 두렵지 않아야 하는가를       새벽녘에 짤막한 편지를 쓰면서도    왜 개켜둔 감정을 다시 꺼냈는가를    또 다시 접어두기만 하였는가를         사랑은 감정도 욕망도 환희도 아닌    철저히 이성적이기만 한 행동인 것     부모요, 형제요, 가족이요,    연인, 이웃, 사회, 세계 등..

글/습작 2024.07.29

자유는 사다리 끝 자전거처럼

자유는 사다리 끝 자전거처럼 - 파리 올림픽 개막공연 기억나니? 동춘동 서커스단 맨 꼭대기 높다란 사다리 끝 자전거 한 대 미소녀가 웃으며 나를 봤는데 큰 입 함박웃음으로 쳐다보았지 사다리 끝이 무너질까봐 무서워 튼튼히 만들었나 조마조마하고 자전거는 자칫 구르고 넘어져서 더더욱 조마조마하고 그걸 함께 쌓았으니 얼마나 그래 밤새 쳐다본 구름 끝 파리의 하늘 장대 끝에 매달린 미인들이 흔들려 섬세한 몸짓을 연주하는 찰나에도 아찔한 현깃증이 먼저 일었는데 자유는 늘 사다리처럼 미련하고... 서툰 자전거 페달만큼 미숙하고... 끝내 모를 자유는 위태롭기만 해 한참을 바라보던 무지개 같았어 그렇게 자유를 꿈꾸곤 해, 그토록 아름다웠던 새벽 어느 날 #

글/습작 2024.07.27

칠월

칠월* 무참한 심경으로 문을 나섰습니다 간밤의 어여쁜 화가는 돌아올 기미가 없고 노래를 부르던 이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김민기라는 이름을 가진 아침이슬이었습니다 까닭 모를 눈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들이 흐르고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만 밤새 들었습니다 떠나는 날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채 미처 못다 한 말들을 적어 편지를 부쳤습니다 장마는 절실함인 줄 알았지만 처절함이 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무참한 심경으로 다시 들어온 방 안 고즈넉한 풍경 몇 장의 사진을 놓고 비로소 다시 시 앞에 서 있습니다 벽과 문 사이 희미한 빛 한 줄기 틈새의 먼지들 투명해진 상처로 흐르는 노래들 칠월의 노래입니다 * 허연, 칠월 (밤에 생긴 상처, 2024)

글/습작 2024.07.25

그리운 그 사람, 김민기

그리운 그 사람, 김민기     - 김민기 선생님을 추모하며       오전에 부음을 접했습니다           황망한 마음을 애써 닫아야 할 일과 도중에 마음이 계속 아리더니 결국 식당에서 눈물을 쏟고야 말았습니다    콩나물국이 나왔는데요 그만 국 위로 가슴에서 쏟은 눈물 탓에 국이 너무 짜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식판을 반납했고 선생님께 편지 한 통을 마저 써야겠어서 이렇게 펜을 들었어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에서 해마다 국민들이 사랑하는 대중가요 100곡을 선정하는 계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의 늦가을에 울려 퍼지던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이 나라 민주화의 결실이었다면 아무런 설명도 예고도 소개도 없이 맨 마지막에 다시 그 노래를 부르던 한 낮은 독백조의 음성을 가진 사내..

글/습작 2024.07.22

슬픈 열대야

슬픈 열대야 제 몸을 물어뜯어서로도 사랑하고 싶을 때가 있어, 사막을 통과하는 바람처럼 뜨거운 목울대로 울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가끔은, 인간이 창문 너머로 보이기도 한다 - 박정대, '슬픈 열대야' 중에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 2001) 사랑에 대한 정의를 '헌신'이라 해놓으면 세상 그 누구도 사랑할 이 없는 게 현실 적당히 거리를 두고도 적당히 타협을 해 간신히 사랑이란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어줍잖은 사랑에 기댄 다른 뜻의 칼날들 사랑을 죄다 들쑤시고 후비고 찢어낸다 사시미만큼 난도질을 당하면 맛이 좋나 숙성을 해봐도 맛이 나쁘면 실력의 문제 실력없는 감정들이 마구 파놓은 자국들 사랑이란 이름으로 남은 잔해들을 본다 #

글/습작 2024.07.15

'플랫폼'에 관한 짤막한 아이디어

'플랫폼'에 관한 짤막한 아이디어          이른바 "카톡" 기반의 커뮤니티들이 겪는 가장 큰 애로사항은 다름 아닌 '아카이빙' 즉, 오가고 나눈 대화 및 정보를 어떻게 저장하고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카카오톡이 인스턴트 메신저인만큼 별도로 이를 배려한 장치를 갖고 있지 않았고, 또 일종의 '보드' 역할을 맡는 공지 기능 역시 3개월이라는 시한부 기능인 탓에 여러 커뮤니티들이 각개약진하는 방식으로 이 '플랫폼'을 고민하게 됩니다.    가장 대중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수단으로는 네이버 카페가 있겠고, 어떤 커뮤니티들은 카카오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다음 카페를 이용하거나 또는 티스토리의 '팀블로그' 기능을 통해 이 문제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다소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

글/습작 2024.07.09

쓸쓸함에 대하여

쓸쓸함에 대하여                 장마철이 달력 한가운데를 관통할 즈음에 물기 어린 거리를 걷다 보면 가끔씩 떠오른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름은 빙그레 미소를 짓게 만들고 또 어떤 이름은 이른 새벽의 머뭇거리던 발걸음처럼 가볍지가 않습니다    때때금 그리운 이름들보다도 이른 새벽의 이름을 더 먼저 떠올리고 그렇게 무게를 갖는 감정에 대해 생각합니다    문득 불어온 바람, 구름 속에 갇힌 햇빛, 물기를 머금은 공기, 답답한 가슴 속 멍울진 말 몇 마디 등을 떠올리다...     이내 눈을 감았습니다       쓸쓸하다는 말을 미처 정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어쩌면 이 감정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에 대한 애석함    이해는커녕 오해할 수밖에 없게 된 사..

글/습작 2024.07.09

'상'이라는 착각, 동기부여

'상'이라는 착각, 동기부여 '상'이라는 좋은 제도는 받는 이한테 "내가 이만큼 잘한다"는 착각을 선사하곤 합니다. 좋은 격려와 지지의 뜻이 자칫하면 자만과 허영을 불러일으켜 뜻밖의 곤란함이 돼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등학교 때 처음 받았던 상은 어느 신문사가 주관하였던 전국단위 미술대회에서의 입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제 꿈은 '화가'였고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그만두게 되었지만 미술을 엄청 잘하는 줄 혼자 착각했었습니다.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주관한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바람에 '이공계'가 적성에 맞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또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주관한 과학경시대회에서 독후감으로 2등을 차지해 '과학자'의 꿈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교육감상을 받았을 때는 스스로 공부도 썩 ..

글/습작 2024.07.05

밤, 비

밤, 비      밤새 비는 제 방 창문 앞 서성거리며 창을 어루만집니다    비들이 보듬고 어루만진 제 창의 상처들은 이내 씻기고   치유된 흔적처럼 멀겋고 뿌연 안개들이 번져갑니다     그리운 걸까를 몰라 밤새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끔씩 마음이 뭉근해져 옴을 느낍니다 잠을 설칩니다    밤새 비는 제 방 창문 앞 서성이며 제 마음을 두드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들은 너도 나도 모를 일이라서     두드린 이와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이 모두 함께    밤잠을 설치곤 하는 일일 뿐입니다     어제의 나도 그제의 너도    한 해 전의 나도 십 년 전의 너도

글/습작 2024.07.03

비 오는 날 새벽, 불쑥 찾아든 전화 한 통

비 오는 날 새벽, 불쑥 찾아든 전화 한 통       사랑해요    (미쳤나 보다)      불쑥 생각나서 전화흘 한대도      그런 말 할 줄 누가 알았겠니       왜 그런대...        (정말 이해를 못하겠구나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착각도 유분수지)     이런 말들을 곱씹다 결국    한 마디,     알았어...      (알았으면 그만이지     뭐가 더 필요한데)      속 편히 살기로 했다     (가끔 사랑은 연민은    고단하기조차 하다      그 절실함이    그 서글픔이)                       #

글/습작 2024.07.02

칠월의 아침

칠월의 아침    장마전선이 북상을 한 종로는 아직 무사한가 봅니다    주말 내내 안녕치 못한 제 안부도 함께 무사할 것 같습니다    며칠전에 사건이 된 사랑을 놓고 더는 그러지 말라며 달래주던    가벼운 마음들이 하늘에 두둥실 떠 있습니다    어떤 마음은 크게 하얗고 몽글몽글해    바로 옆에 핀 적운의 진회색 그림자를 더 어둡게만 비추고    뭉근한 검은 그림의 무게가 비를 내리게 만드는지도 몰라서       일주일 내내 비와 함께 운다면    소용없는 일들도 소용이 생길까도 잘 모르겠어서      그렇게 울고도 싶어지는 장마,    장마를 기다려온 여름이 함께 흐르고 있었습니다

글/습작 2024.07.01

회복기의 노래

회복기의 노래 누님, 한때는 마음이 식어가던 계절이 있었습니다 한낮의 불볕더위가 제 아무리 창창해도, 저물녘의 바람은 선선히 강아지 꼬리를 흔들기만 했습니다 길게 누운 그림자를 닮은 시간들이 자꾸만 등을 떠밀고, 지는 해처럼 또 하나의 연緣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돌려보내야 함을 알기에, 묵묵히 바라보는 노을이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치열한 자기부정과 깊은 반성을 끌어안은 채 오늘도 스스로 저무는 까닭입니다 내일을 기약함이란 일종의 믿음과 같은 것이어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향해 베풀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일 것 같습니다 오늘의 사랑이 식어가는 동안 내일의 희망을 기약하는 동안 제게도 어느덧 불면증이 사라졌었나 봅니다 #

글/습작 2024.06.27

경멸

경멸 한사코 아니라고 해도 한사코 그렇다고 해도 늘 진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 믿기 힘들 때가 많지 한사코 좋아한다는 말도 가끔씩 토라질 적의 눈빛도 봤어 느끼지 못한 거리에 선 그 경멸을 읽어냈어 경멸하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으며 경멸조차 없는 관심은 또 있겠냐만 그 무한대의 거리를 느껴야만 했던 가도 가도 도착할 수 없는 그곳 경멸 기어코 떠나보내려는 마음을 먹고 두 눈 부릅뜨고 속울음을 참아내도 가슴 속 검붉은 멍울 피가 터져도 끝끝내 가지 않겠다 다짐했던 그곳 경멸 그곳을 떠나보내고 있었어 제멋대로만 사랑했던 그곳 경멸 그래, ......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거야 누가

글/습작 2024.06.24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이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이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모르는 걸 다 모른다고 하는 일보다 쉬운 게지     얼마나 미처 몰랐을까를 모르는    알고 있는만큼만을 아는 걸 모른다는 게지     미련은 얼마나 깊고 오래되었나를    사랑은 얼마나 치열했고 상처가 깊었던가를    집착은 얼마나 두렵고 집요했을까를    그리움은 얼마나 길고도 긴 상흔이었는가를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체를 하는 게지     설익은 경전 몇 구절 따위로 감히 능멸하려드니    그 먹먹함을 답답함을 애써 표현할 길 없고    그저 침묵하기만을 바랄 뿐     그것도 모른다는 게지       #

글/습작 202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