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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부터 새벽

가을, 밤부터 새벽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새벽은 이제 선선해졌나 봅니다 제 마음도 곧 선선해지려나 봅니다 서늘해지려면 아직은 좀 멀었고요 뒹구는 낙엽 몇 장을 무심코 밟으면 철 지난 노래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음악은 아직 떠오르지 않고 가을의 침묵이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낙엽이 떨어진 자리를 보았습니다 밤의 정지 버튼은 보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고즈넉하게 흐르고 있는 밤 #

글/습작 2024.10.14

유보적인 단어들

유보적인 단어들 이상하지 않니 저 아름다움을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움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어 문을 열면 어둠이 이동한다 눈밭 위에서 우리는 덜 검은 것이라 불리기에 적당했다 입고 온 하얀 스웨터를 부를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 김리윤, '비결정적인 선'에서 ("투명도 혼합 공간", 문지 2022) 한참을 서성였다 마지못해 한 마디 말이 식사 인사라면 우린 헤어졌을까 끝끝내 답을 찾지 못하였고 함께 한 시절들이 있어서 좋았다 어느 차가운 겨울밤 네가 건네준 따뜻한 위로처럼 어느 선선한 새벽에 말갛게 웃던 네 대화창처럼 때때로 신선한 기운은 연초록 잎으로 무성하고 함께 그리워한 시절들도 있었다 어느 봄비가 창문을 두드리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고 어느 장면에서는 눈자위가 흐려지기도 했었다 남들 몰래 키워..

글/습작 2024.09.23

정호승, '서울의 예수' (만약에 나한테 '종교' 같은 게 있다면)

[하루한편] 만약에 나한테 '종교' 같은 게 있다면 : 서울의 예수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문학앨범/필사 2024.09.22

추석

추석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적당하게 이어진 끈 야무지게 매듭을 짓고 하늘에 연을 띄우면 그만큼 넉넉해지고 아직은 차가운 물밑 그래도 따스한 돌 하나 무심히 줍고 또 쌓으면 물가에 세운 5층 석탑 그만큼 그리워지고 # 추석이라 졸필의 인사부터 드립니다. 넉넉함과 그리움이 깃든 명절 한가위답게 모쪼록 보고팠던 분들과 행복한 시간 한가득 보내시고 (혹 그렇지 못하면 그러려고 노력하는 시간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연휴 되시기 바랍니다. ## "시를 쓰는 일 못지않게 시를 소개하는 일을 계속 해왔다. 시는 과일의 향처럼 향이 은은하게 좋다. 흐릿한 듯해도 빛이 가만하게 나온다. 무너진 가슴인 줄 알았는데 가슴에 다시 파릇한 싹이 조그많게 움튼다. 시는 언덕과 같이 보다 높은 곳으로 데려간다. 어디에서..

글/습작 2024.09.16

원태연을 닮았나

원태연을 닮았나 때때로 어쩔 수 없음은 명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원태연을 닮았단 소리를 들으며 시를 쓴다는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풀잎에 이는 거품 같은 방울들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가을밤 무지개를 대신한 구름들을 닮아 바람이 한줄기 속삭이고 나면 원태연이 쓰지 못한 시는 무얼까를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저 속절없음이기에 때때로 풀잎에 인 방울들이 무지개를 대체하고 찰나의 순간을 목격한 그림자들만 웅성대도록 구름들을 닮은 시를 써보기도 하였습니다 새벽을 머리에 인 채 유유히 흐르는 구름 달빛, 몇 자리의 별들이 함께 흐르면서 오가는 계절의 달력 몇 장을 재촉하게 되면 원태연을 닮은 정서가 불쑥 일어서기도 해 가끔은 도로 눈을 감았습니다 때 늦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구월..

글/습작 2024.09.11

감지하지 못한 우연은 트로이의 필연일 뿐

감지하지 못한 우연은 트로이의 필연일 뿐 허연의 시를 읽는다 참담하다는 말을 배워가는 중이며 참담한 현실에 괴로워하는 중이다 시인의 마음은 오죽했을까를 비루한 감정들은 결코 쓸모없음을 그 쓸모없음을 꼭 노래해야 할까를 미처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어쩔 수 없음이란 말 앞에 붙여둔 갖은 핑계와 섣부른 설렘의 진자가 내 시간들을 온통 갉아먹었다 얼마나 더 쓰라려야만 하는지 얼마나 더 몹쓸 경우를 겪어야 할지 그걸 미리 넘겨짚지 못한 어리석음 결국 낙엽처럼 쌓일 마음의 상흔이 실은 말 못 해온 진실의 불편함인지 끝끝내 숨겨둔 가슴의 치부였는지 아프다고만 말해다오 이미 나는 아프므로* * 감정이란 그저 물가에 주저앉는 속수무책일 뿐... #

글/습작 2024.09.06

허연, '불간섭' (불온한 검은 피, 민음 2014)

불간섭 단풍을 강요하지 말게나 혹은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늘을 주장하지 말게나. 마른 손가락 허물이 벗겨지는 걸로. 밤공기가 부담스러운 걸로 마음은 또 기다림 뒤의 겨울이나 봄에 있고 은행 썩는 냄새가 싫으면 그뿐 북간도 같은 데나 있을 짧은 가을을 마음속에 밀어 넣지 말게나. 굴다리 포장마차에서 생선 타는 연기가 나면 그뿐 담장 너머 진홍빛 감을 애써 꺾으려고 하지는 말게나. 가을이 가면 그뿐. *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 2014) :: 메모 ::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일... #

문학앨범/필사 2024.09.05

배신

배신       누군 하고 싶어 하겠냐며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다고    내 맘도 내 맘 같지가 않다고    고래고래 악을 써보지만    결론은 달라지지가 않는다     슬프다    폐허가 된 믿음의 가시가 박혀    심장에서 마구 피가 흐르지만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일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일     누군 그러고 싶었겠냐며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떠올려    하지만 내 맘 같지 않고서야    그저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그래서 쓸쓸하기만 한 일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그래서 늘 마음이 아프다    가장 사랑한다던 사람한테    가장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       그걸 늘 나만 몰랐었구나    그저 어리석은 내 탓이거늘        #

글/습작 2024.09.05

Simon & Garfunkel - Bridge Over Troubled Water

:: 오늘의 신청곡 :: Simon & Garfunkel - Bridge Over Troubled Water 1970년에 빌보드 정상에 오른 이 노래를 무려 40년 넘게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좋아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그 질문을 한 번 던져보는 밤입니다. 전주만 들어도 가슴이 시리고 먹먹하던 이 노래, TV에서의 마지막 대선토론에서 한 노년의 입이 언급한 가사처럼 누군가한테만큼은 진정 '다리'가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끔 들었습니다... 헌신이 사라진 시대, 오로지 이기와 이해만이 가치의 기준이 된 시대엔 더더욱 어울리지 않을 법한 노랫말처럼 때때금 그 시절 그 사람들을 못내 그리워하는 건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말해보는 청곡 하나) Bridge Over Troubl..

음악노트 2024.08.31

Simon & Garfunkel - Scarborough Fair

:: 오늘의 신청곡 :: Simon & Garfunkel - Scarborough Fair 1995년이었나요? LG전자에서 큰 맘을 먹고 두번째로 출시한 MP3 전용 플레이어인 "아하"의 첫 TV 광고에 실린 이 노래는 빌보드 1위곡인 에 가려 사실 덜 주목받은 편인데, 개인적으로는 많은 추억이 함께 한 명곡이었죠.. 팝송을 처음 듣기 시작할 무렵의 어느해 8월, 황인용 앵커가 진행하던 KBS의 한 프로그램에서 처음 듣던 아르페지오 기타연주의 첫인상은 청소년기의 감수성울 무던히도 자극했었나 봅니다. (아직도 그 시절의 선율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요.) 그해의 8월처럼 올해의 8월의 저무는 저녁, 모처럼 오래된 팝송을 한 곡 꺼낼게요.. 시원하고 즐거운 저녁시간들 되시기 바랍니다. # Scarboroug..

음악노트 2024.08.30

글쎄

글쎄 조금 덜 악마화된 사회를 꿈꾸어도 악마 같은 세상이 도통 잦을 줄 몰라 부스러기로 쓰러진 생을 간수하느라 내 청춘에도 이미 녹이 슬어서 누군가는 카톡창의 오해를 빌미로 또 누구는 절망스런 인면수심 앞에 가파른 일상을 애쓰면서 감수하고... 분노할 열정이 사그라듬도 깨닫고... 늙기도 서러운데 청춘은 웬말이니... 그저 쓸쓸하기만 한 남루한 초상 앞 굴욕과 함께 지불한 양심의 무게로 저마다의 생을 굳이 앓아온 것 어느 자리에서 풀꽃이 일지 않으며 이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방식이며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한 필살기 그 자리와 앉는 태도를 배우며 글쎄 무엇을 얻고자 무얼 잃고 있는지를 무엇을 그리워하며 기다려왔는지를 내내 까먹으며 지내온 건지도 몰라 자리를 옮기며 태도를 고치는 중 녹이 슨 청춘의 날개는..

글/습작 2024.08.26

지나가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 마주 한 적 없는 오래된 골목 누군가를 기다렸었지 때론 너였다가 너로 인하였다가 나였다가 그게 비로소 나였음을 뒤늦게 알아채곤 했는데 맡아본 적 없던 배역 뒤숭숭하기만 한 대본 부족한 시간들 틈에서 때론 모멸감도 느꼈지 엑스트라의 모진 운명이거늘 받아들일 줄도 모른 나는 울고 또 한 번 더 울기만 했었는데 뜻하지도 않던 한 통 편지에 이토록 뛰는 심장이 있을까 설렘이었을까 두려움일까 온통 낯선 대사들 뿐인 장면 기어코 한마디 내뱉는 말 잘 지내세요, 행복하세요 두서도 없는 덕담을 내놓고 온통 바쁘기만 했던 발걸음 비로소 잦아들던 가슴 어떤 사람 #

글/습작 2024.08.22

절골계곡에서

절골계곡에서     - 망각에 관하여          보세요,      발가락에 잡힌 물집을 계곡에 담그면 이내 쓰리고 얇은 살갗에 느껴지는 세찬 물살을 기억할 적 많았습니다 세상살이를 겪다 생긴 상처는 그만한 무게의 슬픔과 그만한 속도의 망각을 동시에 경험하는 모양입니다     투명한 석영의 빛이 햇빛에 산란될 만큼 더디게 진행하는 오후는 제 아무리 애를 써도 지우기 힘든 무늬를 갖습니다 무늬의 모양에 따라 그것들이 체제와 희망과 이별과 그리움을 차곡히 챙기는 시간인가도 모르겠습니다     마른장마 탓에 빛을 잃고 먼지가 희뿌연 돌들 틈에선 이따금 휘파람 소리가 들릴 적 있는데요 누군가의 노래를 듣다 보면 저마다 꿈꾸게 되는 사연들이 하나둘 등장하게 되고 함께 춤추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보..

글/습작 2024.08.19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지, 1980) 사랑은 누군가를 아끼고 보듬고 보호한다는 일 보채지도 않고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고 그저 상처를 주지 않고 지켜본다는 일 그저 살아 있음에 기뻐할 줄 알면서도 모두한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만한 일 한 떨기 능소화 꽃이 지는 풍경을 보면서 그 고혹함에 속절없이 안타까워 하는 일..

글/습작 2024.08.01

허연, '휴면기' ("밤에 생긴 상처", 민음 2024)

휴면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염소 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며 시 앞에 섰다. * 허연, "밤에 생긴 상처" (민음, 2024) - :: 메모 :: 칠월 한 달 동안 고작 열 편 남짓 가량의 시편만을 썼다. 가장 부진했던 이..

문학앨범/필사 2024.07.31

한백양, '미리보기 없음' ("2024 신춘문예 당선시집", 문학마을 2024)

미리보기 없음 그릇이 깨지고 순두부찌개 집은 순식간에 결말로 치닫는다 그랬습니까, 그랬습니다, 따위는 없는 허리 구부림과 주인의 앞주머니가 훔치고 간 바닥의 김치 얼룩 누구도 피 흘리지 않았지만 누구나 피 흘리는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정적의 용도가 달라진다 주인도 그릇을 내던진 사람도 좀처럼 말이 없고, 둘 사이를 오가야 마땅한 대화들을 티브이 소리가 뒤덮는다 올해의 경제에는 하한선이 없습니다, 종이로 급하게 숫자를 덧붙인 순두부찌개 백반의 가격부터 그릇을 내던진 사람의 맞은편 사람까지 붉고 창백한 화살표가 이어진다 정말로 최선이었습니까, 힐끗대는 가게 안의 공기가 요동치고 갑자기 재채기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팡파르도 없이 정적이 입구까지 내달린 순간 그래서 죽겠니, 웃어버리는 웃으면 안 되는 사람이..

문학앨범/필사 2024.07.30

꿈을 묻는다는 일

꿈을 묻는다는 일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읽으면 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가 함께 온다며 이를 맞는 심경은 필시 환대일 것이라고 말한 시인의 마음을 오롯이 느껴보기도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서 쉽사리 꺼내기 힘든 질문들이 몇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가장 하기 힘든 말 중 하나는 아마도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일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곧 그 사람의 전부에 관한 질문이자 그 사람이 갖는 일종의 '가치'에 관한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별 생각도 없이 던져지는 아주 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한 사람에게서 그러한 질문을 받게 된다면? 필시 이는 매우 진지한 '관계'를 뜻하는 것이므로, 가장 진지하..

글/습작 2024.07.29

사랑의 찬가

사랑의 찬가    - 셀린 디온의 공연에 부쳐           사랑이 없는 도시를 슬퍼하며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이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사랑을 정말로 해본 사람은 알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셀린 디온이    왜 파리 올림픽 마지막 무대였나를    왜 역대급 퍼포먼스를 펼쳤는가를    어째서 사랑은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사랑은    왜 죽음도 두렵지 않아야 하는가를       새벽녘에 짤막한 편지를 쓰면서도    왜 개켜둔 감정을 다시 꺼냈는가를    또 다시 접어두기만 하였는가를         사랑은 감정도 욕망도 환희도 아닌    철저히 이성적이기만 한 행동인 것     부모요, 형제요, 가족이요,    연인, 이웃, 사회, 세계 등..

글/습작 2024.07.29

자유는 사다리 끝 자전거처럼

자유는 사다리 끝 자전거처럼 - 파리 올림픽 개막공연 기억나니? 동춘동 서커스단 맨 꼭대기 높다란 사다리 끝 자전거 한 대 미소녀가 웃으며 나를 봤는데 큰 입 함박웃음으로 쳐다보았지 사다리 끝이 무너질까봐 무서워 튼튼히 만들었나 조마조마하고 자전거는 자칫 구르고 넘어져서 더더욱 조마조마하고 그걸 함께 쌓았으니 얼마나 그래 밤새 쳐다본 구름 끝 파리의 하늘 장대 끝에 매달린 미인들이 흔들려 섬세한 몸짓을 연주하는 찰나에도 아찔한 현깃증이 먼저 일었는데 자유는 늘 사다리처럼 미련하고... 서툰 자전거 페달만큼 미숙하고... 끝내 모를 자유는 위태롭기만 해 한참을 바라보던 무지개 같았어 그렇게 자유를 꿈꾸곤 해, 그토록 아름다웠던 새벽 어느 날 #

글/습작 2024.07.27

칠월

칠월* 무참한 심경으로 문을 나섰습니다 간밤의 어여쁜 화가는 돌아올 기미가 없고 노래를 부르던 이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김민기라는 이름을 가진 아침이슬이었습니다 까닭 모를 눈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들이 흐르고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만 밤새 들었습니다 떠나는 날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채 미처 못다 한 말들을 적어 편지를 부쳤습니다 장마는 절실함인 줄 알았지만 처절함이 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무참한 심경으로 다시 들어온 방 안 고즈넉한 풍경 몇 장의 사진을 놓고 비로소 다시 시 앞에 서 있습니다 벽과 문 사이 희미한 빛 한 줄기 틈새의 먼지들 투명해진 상처로 흐르는 노래들 칠월의 노래입니다 * 허연, 칠월 (밤에 생긴 상처, 2024)

글/습작 2024.07.25

허연, '칠월' (“밤에 생긴 상처”, 민음 2024)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허연, “밤에 생..

문학앨범/필사 2024.07.25

황농문, "몰입" (랜덤하우스, 2007)

Prologue    몰입, 최고의 나를 만나는 기회      아프리카의 초원을 거닐다가 사자와 마주쳤다고 하자. 이때는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이 상태가 바로 몰입이다.    몰입 상태에서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 능력을 발휘하는 비상사태가 발동한다. 자신을 초긴장 상태로 만들어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때문에 잠재된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한 몰입적 사고는 과학, 비즈니스, 학습 등 여러 분야에서 그 위력을 발휘해왔다. (중략)    놀아도 몰입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몰입하지 않으면 행복을 경험하기 어렵다.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주..

문학앨범/필사 2024.07.24

장석남, '생일'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2017)

생일 달이 마당 밖 잣나무숲을 지날 즈음 흰 돌멩이 하나 들어다가 툇마루 위에 올려두면 어느새 노래가 되어 꽃밭 속으로 어른어른 밀려나갔다 그믐밤이 되어서는 캄캄한 꽃밭 속에서 반딧불이 두엇씩 살아 나왔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닥 그만두었다 흰 돌멩이 하나 들어다가 갓 풀린 개울물에 넣어둔다 귀도 하나는 그 곁에 벗어둔다 * 장석남,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2017) - :: 메모 :: 생일선물이었다 행갈이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그냥 인터넷에서 긁어온 시편 하나 그래도 내겐 아주 소중한 선물이었지... 그걸로도 족했다 더 바란 것도 없었다 이제 그 일도 그저 하나의 추억이 되었을 뿐이다 사랑도 그저 죽음으로써만 스스로를 입증할 뿐, 침묵만이 남는다 그저 침묵 뿐... -

문학앨범/필사 2024.07.22

그리운 그 사람, 김민기

그리운 그 사람, 김민기     - 김민기 선생님을 추모하며       오전에 부음을 접했습니다           황망한 마음을 애써 닫아야 할 일과 도중에 마음이 계속 아리더니 결국 식당에서 눈물을 쏟고야 말았습니다    콩나물국이 나왔는데요 그만 국 위로 가슴에서 쏟은 눈물 탓에 국이 너무 짜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식판을 반납했고 선생님께 편지 한 통을 마저 써야겠어서 이렇게 펜을 들었어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에서 해마다 국민들이 사랑하는 대중가요 100곡을 선정하는 계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의 늦가을에 울려 퍼지던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이 나라 민주화의 결실이었다면 아무런 설명도 예고도 소개도 없이 맨 마지막에 다시 그 노래를 부르던 한 낮은 독백조의 음성을 가진 사내..

글/습작 202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