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앨범 44

정호승, '서울의 예수' (만약에 나한테 '종교' 같은 게 있다면)

[하루한편] 만약에 나한테 '종교' 같은 게 있다면 : 서울의 예수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문학앨범/필사 2024.09.22

허연, '불간섭' (불온한 검은 피, 민음 2014)

불간섭 단풍을 강요하지 말게나 혹은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늘을 주장하지 말게나. 마른 손가락 허물이 벗겨지는 걸로. 밤공기가 부담스러운 걸로 마음은 또 기다림 뒤의 겨울이나 봄에 있고 은행 썩는 냄새가 싫으면 그뿐 북간도 같은 데나 있을 짧은 가을을 마음속에 밀어 넣지 말게나. 굴다리 포장마차에서 생선 타는 연기가 나면 그뿐 담장 너머 진홍빛 감을 애써 꺾으려고 하지는 말게나. 가을이 가면 그뿐. *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 2014) :: 메모 ::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일... #

문학앨범/필사 2024.09.05

허연, '휴면기' ("밤에 생긴 상처", 민음 2024)

휴면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염소 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며 시 앞에 섰다. * 허연, "밤에 생긴 상처" (민음, 2024) - :: 메모 :: 칠월 한 달 동안 고작 열 편 남짓 가량의 시편만을 썼다. 가장 부진했던 이..

문학앨범/필사 2024.07.31

한백양, '미리보기 없음' ("2024 신춘문예 당선시집", 문학마을 2024)

미리보기 없음 그릇이 깨지고 순두부찌개 집은 순식간에 결말로 치닫는다 그랬습니까, 그랬습니다, 따위는 없는 허리 구부림과 주인의 앞주머니가 훔치고 간 바닥의 김치 얼룩 누구도 피 흘리지 않았지만 누구나 피 흘리는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정적의 용도가 달라진다 주인도 그릇을 내던진 사람도 좀처럼 말이 없고, 둘 사이를 오가야 마땅한 대화들을 티브이 소리가 뒤덮는다 올해의 경제에는 하한선이 없습니다, 종이로 급하게 숫자를 덧붙인 순두부찌개 백반의 가격부터 그릇을 내던진 사람의 맞은편 사람까지 붉고 창백한 화살표가 이어진다 정말로 최선이었습니까, 힐끗대는 가게 안의 공기가 요동치고 갑자기 재채기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팡파르도 없이 정적이 입구까지 내달린 순간 그래서 죽겠니, 웃어버리는 웃으면 안 되는 사람이..

문학앨범/필사 2024.07.30

허연, '칠월' (“밤에 생긴 상처”, 민음 2024)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허연, “밤에 생..

문학앨범/필사 2024.07.25

황농문, "몰입" (랜덤하우스, 2007)

Prologue    몰입, 최고의 나를 만나는 기회      아프리카의 초원을 거닐다가 사자와 마주쳤다고 하자. 이때는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이 상태가 바로 몰입이다.    몰입 상태에서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 능력을 발휘하는 비상사태가 발동한다. 자신을 초긴장 상태로 만들어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때문에 잠재된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한 몰입적 사고는 과학, 비즈니스, 학습 등 여러 분야에서 그 위력을 발휘해왔다. (중략)    놀아도 몰입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몰입하지 않으면 행복을 경험하기 어렵다.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주..

문학앨범/필사 2024.07.24

장석남, '생일'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2017)

생일 달이 마당 밖 잣나무숲을 지날 즈음 흰 돌멩이 하나 들어다가 툇마루 위에 올려두면 어느새 노래가 되어 꽃밭 속으로 어른어른 밀려나갔다 그믐밤이 되어서는 캄캄한 꽃밭 속에서 반딧불이 두엇씩 살아 나왔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닥 그만두었다 흰 돌멩이 하나 들어다가 갓 풀린 개울물에 넣어둔다 귀도 하나는 그 곁에 벗어둔다 * 장석남,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2017) - :: 메모 :: 생일선물이었다 행갈이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그냥 인터넷에서 긁어온 시편 하나 그래도 내겐 아주 소중한 선물이었지... 그걸로도 족했다 더 바란 것도 없었다 이제 그 일도 그저 하나의 추억이 되었을 뿐이다 사랑도 그저 죽음으로써만 스스로를 입증할 뿐, 침묵만이 남는다 그저 침묵 뿐... -

문학앨범/필사 2024.07.22

아놀드 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황지우 옮김, 돌베개 1983)

서론 예술작품은 하나의 도전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순응할 뿐이다. 그것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적과 노력에 의존하며,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기원을 두고 있는 어떤 의미를 작품 속에 불어넣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에게 실제로 감동을 주는 예술은 그런 한에서 현대예술이 된다. (중략) 요컨대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을 때 왜 그것이 일어났는가 하는 이유는 양식만을 고려해서는 해명되지 않는다. 발전의 최정점은 내적인 기준에 의해 확정될 수 없다. 어떤 양식적 형식이 심리학적, 사회학적 법칙에 따라 형성된 시대정신을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때 급격한 선회가 일어나는 법이다. (중략) 사회학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개념은 사고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에 ..

문학앨범/필사 2024.07.10

이병률, '이 넉넉한 쓸쓸함'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지 2017)

이 넉넉한 쓸쓸함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 이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지, 2017) - :: 메모 :: 새벽녘에 나를 불러 세운 까..

문학앨범/필사 2024.07.09

최백규, '이상기후'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2022)

이상기후      우리가 안고 있으면 낙서를 채색하는 것 가다 무릎 상처에 시퍼렇게 그늘이 자란다     캄캄한 욕실에서 더운물을 얹으면 붉은 꽃잎들이 흩어진다 등허리에 성호를 그으며 이것이 나의 해안이 될 거라 확신한다 그곳에서 너와 마주친다면 세상을 사랑해볼 수도 있겠다 싶다     무덥도록 조용한 실내에 머무르면 죽은 이후가 기억나서     수의를 벗듯이 잔기침을 식힌다     모기를 쫓거나 흐트러진 베개를 고쳐주던 휴일이 침대맡으로 쌓여드는데     숨소리로 구분할 줄 알면서도 자는지 속삭여보는 습관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만 든다     너를 지옥에서 온 안부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물을 마시려다 냉장고 문을 연 채    가만히 서 있다      * 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문학앨범/필사 2024.07.09

한강, '서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지 2013)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갰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

문학앨범/필사 2024.07.09

한강, '회복기의 노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지 2013)

회복기의 노래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지, 2013)      -      :: 메모 ::     "시간만이 약"인 때가 있었다    지금도 또 그렇다

문학앨범/필사 2024.07.09

정지용, '노인과 꽃'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1946)

노인과 꽃 노인이 꽃나무를 심으심은 무슨 보람을 위하심이오니까. 등이 곱으시고 숨이 차신데도 그래도 꽃을 가꾸시는 양을 뵈오니, 손수 공들이신 가지에 붉고 빛나는 꽃이 맺으리라고 생각하오니, 희고 희신 나룻이나 주름살이 도리어 꽃답도소이다. 나이 이순을 넘어 오히려 여색을 기르는 이도 있거니 실로 누하기* 그지없는 일이옵니다. 빛깔에 취할 수 있음은 빛이 어느 빛일는지 청춘에 맡길 것일는지도 모르겠으나 쇠년*에 오로지 꽃을 사랑하심을 뵈오니 거룩하시게도 정정하시옵니다. 봄비를 맞으시며 심으신 것이 언제 바람과 햇빛이 더워 오면 고운 꽃봉오리가 촉불 켜듯 할 것을 보실 것이매 그만치 노래*의 한 계절이 헛되이 지나지 않은 것이옵니다. 노인의 고담*한 그늘에 어린 자손이 희희하며* 꽃이 피고 나무와 벌이 날..

문학앨범/필사 2024.07.08

정지용, '백록담'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1946)

백록담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착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 옆에서 백화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승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

문학앨범/필사 2024.07.08

정지용, '향수'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1946)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취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

문학앨범/필사 2024.07.08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창비 1996)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

문학앨범/필사 2024.07.08

김석영, '정물처럼 앉아'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 민음 2022)

정물처럼 앉아       은은하게 빛나던 색을 우리는 알았다     발음해 보면서 궁글어지는 맛    호박 몇 조각을 뒤집어 보면서     "눈은 방향이 없구나"     둥근 유리 주전자 속에서    오래도록 우러나는 호박    물속에서 다른 형상으로 보인다    서로를 밀어내면서     기억이 났다 실처럼 오래 풀리느라    컴컴해진 실내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서로 같아진 손의 온기     누군가는 밖으로 나갔다     눈은 이곳에 없어도    누군가는 만족스럽다     "내가 정물처럼 앉아 있으면    당신이 나를 그려 주기를,     사람으로"     눈이 그쳤고    실내가 다시 밝아 오고 있었다      * 김석영,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 (민음, 2022)      -      :..

문학앨범/필사 2024.07.07

박완서, 산문 "세 가지 소원" (마음산책, 2009)

- 작가가 아끼는 이야기 모음 :       큰 네모와 작은 네모          미술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제출한 그림을 한 장 한 장 들춰 보시던 선생님은 슬기의 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손길을 멈추셨습니다.    슬기는 미술학원에 다닌 적도 없다는데 그림을 아주 잘 그립니다. 학기 초에는 아이들이 선생님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별의별 선생님 얼굴이 다 나왔는데, 선생님은 그중에서 슬기가 그린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슬기야, 이 그림 선생님한테 선물하지 않을래? 그랬더니 슬기는 기분 좋게 으스대며 그러겠다고 했고, 지금 그 그림은 선생님 방 벽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그림은 좀 이상합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 첫 미술시간이라 될 수 있으면 방학 동안..

문학앨범/필사 2024.07.07

김규항, 아포리즘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알마, 2017)

김규항     글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도구가 아니라, 불편함을 수반하더라도 좀더 사유함으로써 세계의 본질에 함께 다가가는 도구다. 모든 아름다움이 그러하듯 문장은 군더거기가 적을수록 아름답다.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 문제를 벗어나 저마다의 쓸모없는 것들에 골몰하는 세계를 소망한다. 지은 책으로 등이 있고, 어린이 교양지 발행인을 맡고 있다.      -      -      감촉에 익숙해지면 향기를 잊기 쉽다.      -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우리,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대개 내적 음성과의 대화다.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

문학앨범/필사 2024.07.07

조용우, '지나가는 마음' ("세컨드핸드", 민음 2023)

지나가는 마음*      지나가는 마음은 등이 높아 한번 뒤집어지면 제 힘으로는 다시 뒤집을 수 없고    그런 마음 그만두고 쇠족제비가 6차선을 건너    펜스 아래로 길게    없어진다    그래도 이런 도심에서?    고라니, 멧돼지가 때때로 무덤 너머로 머리를 내밀었다 황급히 돌아가고    쑥은 다시 무덤가에    도로변에 무리지어 퍼져 간다    지나가던 노인들이    저마다 비닐봉투를 들고      무릎을 꿇은 채로 쑥을 뜯으며    띄엄띄엄 닳아 사라지는    새삼스레 따사로운 가을 햇빛 아래    덜 시든 초록과    심한 초록 사이로 마음은    사나흘 더 바르게 말라 가며    화요일 밤에 누가 망치로 독을 깨고    쓸어 담는    소리    낮에는 물까치 소리    서로의 새끼에게 ..

문학앨범/필사 2024.07.05

허주영, '거리의 경전'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 민음 2023)

거리의 경전 저편에서 여자는 소리를 지르고 내 쪽으로 애가 걸어온다. 이리 와 이리 좀, 제 부르는 소리를 곁눈질로 도망가는 모양이다. 지나가는 또래 여자애를, 토종 아저씨를, 바람을 아우르는 검고 투명한 비닐을, 쏟아진 은행 열매오 그걸 주워 담는 도시의 작은 동물들을 보며 애는 웃고, 애 엄마는 거의 울고, 나는 애를 버리고 애 엄마 쪽으로 간다. 길은 골목만큼 좁고 광장만큼 시끄럽다. 애가 신발을 질질 끌고, 사람들은 어깨를 통과한다. 둘은 골목에서 싸우고 셋 이상 모이면 광장으로 간다. 둘은 말없이 싸우고 셋 이상은...... 아무래도 좀 위험하겠지요. 집엘 가지 않고? 환한 벽에는 외발로 선 이웃들이 살겠지요. 우리가 이사를 가면 누군가는 결국 집을 잃어요? 엄마는 대답이 없고 거리에 서 있다...

문학앨범/필사 2024.07.04

인정, '빛의 재해석' (전지적 작가 시점, 2024)

빛의 재해석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씩 내몰면서 깊고 넓은 내 감정의 바다를   위로해 주는 네가 내게 오는 모든 것들의 축복이라는 것을 아는가.   어둠이 없으면 별의 반짝임도 없는데,   너는 내게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가.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서 나를 보며    서 있는 네 그 유일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는 아는가.    * 인정, 전지적 작가 시점 (2024)      -    :: 메모 ::    아름다운 글입니다.    빛나는 문장에 잠시 눈길이 멈추었습니다.     늘 건필하십시오...

문학앨범/필사 2024.07.03

박참새, '건축' ("정신머리", 민음 2023)

건축 "파이드로스, 글에는 그림처럼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네.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보이지. 하지만 자네가 어떠한 질문을 해도 그들은 무겁게 침묵만 지킨다네. 글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글이 지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자네가 그 내용을 알고 싶어 물어보면, 글은 매번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들려줄 뿐이지." - 플라톤, '파이드로스' 너는 생각한다. 너는 집을 짓고 싶다. 너는 집을 짓는다는 일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너는 아주 기본적인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곧 결여된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너에게는 자본이 없다. 너에게는 땅이 없다. 너에게는 실리적인 재료도..

문학앨범/필사 2024.07.01

김언희, '요즘 우울하십니까?' ("요즘 우울하십니까?", 문학동네 2011)

요즘 우울하십니까? 요즘 우울하십니까? 돈 때문에 힘드십니까? 문제의 동영상을 보셨습니까? 그림의 떡이십니까? 원수가 부모로 보이십니까? 방화범이 될까봐 두려우십니까? 더 많은 죄의식에 시달리고 싶으십니까? 어디서 죽은 사람의 발등을 밟게 될지 불안하십니까?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십니까? 개나 소나 당신을 우습게 봅니까? 눈 밑이 실룩거리고 잇몸에서 고름이 흘러내리십니까? 밑구멍이나 귓구멍에서 연기가 흘러나오십니까? 양손에 떡이십니까, 건망증에 섬망증? 막막하고 갑갑하십니까? 답답하고 캄캄하십니까? 곧 미칠 것 같은데, 같기만 하십니까? 여기를 클릭 하십시오 * 김언희, '요즘 우울하십니까?' ("요즘 우울하십니까?", 문학동네 2011) - :: 메모 :: 그녀는 나한테 이 시집을 읽어낼 수 ..

문학앨범/필사 2024.06.29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창비, 2023)

시인의 말      언젠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내 앞에는 두가지 시의 길이 주어져 있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켜보는 길과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잠재워보는 길. 나는 이 두 길을 모두 가보기로 한다." 첫 시집 이후 대략 육칠년 동안 두 작업은 완전히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전자의 결과물이 "초자연적 3D 프린팅"이고 후자의 결과물이 "하얀 사슴 연못"이다. (중략)    이제 앞서 말한 두 길을 모두 가본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시의 길을 두가지로 한정한 것도 좀 우습군. 길 아닌 곳도 걸어가다보면 길이 되어 있겠지.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갈 것이다. 계속.      2023년 입동    황유원       -      -        ..

문학앨범/필사 2024.06.29

박연준,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문학동네, 2024)

시인의 말      어느 여름 저녁    파초 잎 아래에서 당신이 울고 있다면     어느 여름 저녁    내 얼굴이 못생겼다면     그건 슬픔이 얼굴을 깔고 앉았기 때문.      2024년 4월    박연준      -      -          이월 아침      진눈깨비는 모른다     자신이 얼마나 나를 꽉 쥐고 흩날리는지     눈이 뽑히도록 보고 싶은 것    눈이 뽑히도록 보고 싶은 것     그리워 죽죽 우는 것     진눈깨비여    진눈깨비여      나를 부수어 가지세요    나를 부수어 흩뿌리세요     나는 왜 언제나 나쁜 것만 예언할까요?       진눈깨비는 바보다       -        뜨거운 말           뜨거운 것을 쓰다 쏟았습니다 미안해요 부치진 못할 것..

문학앨범/필사 2024.06.29

안현미,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

시인의 말 어떤 슬픔은 새벽에 출항하고 어떤 아픔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오늘 우리는 겨우 살아 있다. 어쩌면 저주가 가장 쉬운 용서인지도 모르겠다. 2014년 장미가 피는 계절 연희에서 안현미 - - 카이로 1 일몰 후 아홉번째 달이 떴고 그는 동쪽 식탁 위에 왜가리처럼 놓인 촛대에 불을 붙였다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차원으로 그는 침묵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가 사용하는 침묵은 골동품처럼 지혜로웠다 2 그때 폭설 속에 묻어둔 술병을 꺼내러 갔던 여자가 돌아왔고 그 여자가 데리고 온 낯선 공기는 순식간에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갔다 3 인생이란 원래 뭘 좀 몰라야 살맛 나는 법 4 아홉번째 핫산이 돌아왔다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차원으로 그는 인생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가 사용하는..

문학앨범/필사 2024.06.29

곽효환,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문지, 2023)

오감을 열어놓은 시인의 발걸음은 넓고 깊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걷다가 때때로 '시대의 정거장'이나 '시대의 강가'에 머물며 서성거리고 귀 기울인다. 그렇게 귀 기울이다 보면 그 찻길과 물길의 내력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중략)      -      시인의 말      고되고 길었던 여정의 끝이    마침내 저 너머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여정의 끝에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마도 역려에 들어    잠시 몸을 누이겠지만      오래지 않아 주섬주섬    다시 여장을 꾸릴 것임을.    그래왔듯이 그 길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묻고 사유하고 걸을 것이다.      2023년 가을 삼성동에서    곽효환    ..

문학앨범/필사 2024.06.29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지, 2008)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은 낯선 언어들이 펼쳐놓는 불꽃놀이로 환하다. 우울과 낙관은 터지고 부서진다. 그리하여 어떤 익숙한 자력에 의해 하나의 문장을 이루는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응집은 흐트러지고 깨진다. 이처럼 시 속에 새로운 성좌를 이루어 반짝이는 언어들은 방향도 목적도 없는 야상의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더 깊은 곳에는 이러한 언어들의 기상천외한 혼례가 이루어지는 백지와 펜, 태어나려는 언어로 가득 찬 시인의 손가락이 있다.      -      시인의 말      대학 시절, 성수동에서 이대 입구까지    다시 이대 입구에서 성수동까지    매일 전철을 타고 가며 그녀를 상상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 만약 당신이 앉아 있다면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들의 시인, 최승..

문학앨범/필사 2024.06.29

변혜지,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지, 2023)

시인 변혜지는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시인의 말      "문을 열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너를 기다릴 거야."    목소리를 따라 나는 안내되었다.     아름다운 찻잔을 건넬 준비를 한 채    문 너머의 내가 기다릴 텐데.     결심하는 동안 평생이 지나갔다.        2023년 11월    변혜지      -      내가 태어나는 꿈      가족들은 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박두한 세계를 맞닥뜨리고 내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기를. 떨리는 손으로 나를 받아든 부모의 손길에 울음이 천천히 잦아들기를.     갓 태어난 나는 모두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감격한 부모가 만들어내는 눈물과     포대..

문학앨범/필사 2024.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