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진은영, '청혼'

단테, 연분홍/연초록, 정독, 그리고 종로학파 2024. 4. 16. 04:22

   

 

   

   모처럼 '오래된 거리처럼' 오래된 시 한 편을 꺼내듭니다. 

   10년 전의 크디큰 트라우마를 겪던 대한민국은 계간 <창작과비평>을 통해 진은영의 시 한 편을 접하게 됩니다. 마치 1980년 5월을 겪은 대한민국 전체가 숨죽여 맞던 이듬해 신춘문예에서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다수는 그 어떤 감정의 '정화'를 떠올렸을 법합니다. 그토록 오래된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저항은 하나이고 사랑과 치유도 하나"라고 시집 전체가 작게 말할 뿐이라던, 또 "예술은 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며,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적은 시집 발문에서도 아마 동일한 느낌을 얻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발표된 후 또 다시 8년만에야 오랜 병마 끝에 복귀해 상재하게 된 시집은 2022년 백석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심사평은 "가장 아름다운 시집"이었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작품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시대적'이었습니다. 

   모처럼 오늘은 모든 문학 커뮤니티에 공통된 내용의 글을 올려놓습니다.  

   세월호 10주기입니다. 경건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진은영,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