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연분홍, 연초록 단편집
차례
작가의 말
-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 졸업
- 오이도
- 북극곰과 두더지의 상관관계
- ( 빈 칸을 채우시오* )
*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헤이리의 가을, ......
※ 에필로그 (벚꽃, 종로학파)
작가의 말
처음 습작을 하던 때가 기억난다.
하룻밤에 쓴 소설들이 태반이며, 하나같이 치기 어린 잡글이기 일쑤였다.
그 흔적들을 묶어보는 까닭은? 일종의 출사표 같다는 생각일 뿐.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
2024년 봄
호수를 품은 정발산 기슭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옆집에서 들리는 소리. 체크. 무겁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 아마도 저 집은 포커판을 벌인 모양이다. 많은 이들이 교외로 빠져나간 탓에 승용차들로 빼곡하던 골목은 두어 대 남짓만을 둔 채 텅 비어 있다. 그만큼 싸늘한 정적이 감도는 밤이다.
도박. 인생을 거들먹거리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도박을 잊진 않고 있다. 이성적 사유가 힘에 부쳐 헐떡일 때, 미궁 속의 탈출구로 떠올리게 되는 도박. 우연의 판타지. 난 지금 도박 이야기를 하자고 펜을 든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도박'이라는 단어. 지금의 내게도 그 단어는 해당된다. 가능성 없는 미래에 대한 투자. 그곳은 늘 불투명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저울눈금처럼 불안하게 뛰고 있는 자리였으니까.
라면이 끓고 있다. 불기 전에 먹어치워야 한다. 라면을 자주 먹다 보면 사람들에게 금방 들키곤 했지. 너 왜 이렇게 빨리 먹냐. 환경에 재빠르게 적응할 순 없다. 관성이 다하기 전까지는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의 모태적 근성이자 불행인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늘 틀어놓는 CNN 채널 역시 예전 같지는 않다. 다만 예전 필름의 녹화라 그런지, 비교적 평온해 보이는 분위기. 영화가 방영되고 있다. 지금 이 나라 사정과는 딴판이다. 난 외국어 실력이 전무한 편이어서, 소음을 제외한 저 드라마틱한 장면들 역시 전적으로 소통단절을 뜻할 뿐이다. 허기사 소통단절,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경험은 이미 충분했다. 억지로 쥐어짜는 논리는 도식에 가깝다. 흐지부지한 문맥은 도대체 무얼 말하려고 쓴 건지도 모르게 만들곤 한다. 그런 단절감을 느낄 때마다 난 말이나 글의 '폭력성'을 실감하곤 했다. 어제 읽은 한 문예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후배 녀석과 같이 구경했던 영화 '아이다호'보다도 더 이해하기 힘든 문장과 장면들 속에서 난 모국어를 강요당하고 있다.
TV에선 20대 같아 보이는 여자가 원피스를 디자인하고 있다. 몇 달 전 동생이 다니던 디자인학원은 컴퓨터로 저걸 가르친다고도 했는데, 온통 세일 딱지가 붙은 상품들이 화면을 스치고 꺼져간다. 언젠가 생산력 수준이 결국 그 나라 국력을 좌우한다던 한 경제학자의 주장을 들었었는데, 그건 아마도 평범한 주부의 장바구니나 계산하는 발상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소리였다고 본다. 게다가 장바구니가 무겁다는 불평을 듣노라면, 그 주부의 불만스러운 말투보다는 화사한 여성 정장이 오히려 더 거슬릴 법도 했다. 대개가 그저 그런 물건들을 그나마 사고 입고 또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건, 다소 안정된 경제력을 자랑할 뿐이고 어차피 이 나라에선 그런 부류들의 위치야말로 자신들이 생산력을 부르짖으며 치열한 경쟁 끝에 남을 누르고 올라선 월계관의 자리였을 뿐이니까.
입안이 텁텁하다. 국물까지 아낌없이 마신 라면 두개 덕분이다. 쓰레기통 언저리에 나뒹굴고 있는 라면 봉지들, 고등학교 때 저것으로 마스터베이션을 하던 안성기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도 TV다. 조심스레 봉지를 집어든다. 입안을 텁텁하게 만든 주범, 어렸을 땐 주로 딱지로 도시락 반찬으로 친구들의 시선이 꽂힐 김치통 포장으로도 또 때로는 곤충 몇 마리도 잡아낼 수 있었던 물건이다.
주인집 여자아이는 메리야스만 입고서 마당을 서성인다. 고등학교 1학년 치고는 가슴이 제법 크다. 방금 한 남자가 반항을 무릅쓰고 그 여자의 가슴을 찔렀다. 비명 소리에 놀란 아이들을 무시한 채, 남자는 연거푸 그 여자의 가슴을 찔러댄다.
목사가 그 여자 사진을 들고 서 있다. 뭐라고 한참 말하는데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건 일종의 송사임을 안다. 다큐멘터리 같다. 자막이 천천히 그 위로 오버랩되고, 맨 마지막 문장에 2016년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2016년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찔러 죽인다?
잡다한 물건들과 글씨가 화면 위로 점멸된다. 때때로 가슴 덜컥 내려앉는 소식으로, 어떤 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화면이기도 했는데 그 순간순간의 화면들을 적절히 편집해 내는 방송국이 용하다. 그들도 어차피 하나의 독재자이자 연극배우였음이 밝혀졌다.
아무튼, 쟤네들은 헤드라인 뉴스가 너무 잦다. 그만큼 자기들 나라 대통령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늘 웃음을 머금지만, 국익에 관한 중대한 발언에서는 항상 진지한 표정으로 국익 대신에 정의라는 단어를 강조해 쓰는 버릇이 있다. 그 또한 거짓말을 잘하는 건 분명하다.
화면이 금세 바뀌었다. 라면 그릇들을 밖에 치우고 들어왔다. 사람들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자막 위로 쓰러져가는 오두막이 보이고 그 앞에 서 있는 한 미국 노인이 막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화면 하단에 꽂힌 NL이라는 글씨. 토론토가 시애틀을 9:6으로 이기고 있다. 내셔널 리그를 뜻하는 말. 각 팀의 현재 스코어는 시시각각으로 점멸한다. 타 구장 소식이다.
문득 어제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그가 말하던 게 생각났다. 심각한 일도 때론 사람에 따라서 즐거울 수 있는 건가? 쟤네들 같았으면 주인집 여자아이는 아마도 한 녀석이랑 벌써 가출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곧 저렇게 되겠지, 아니 벌써 그렇게 됐다.
샤시 문으로 옆집 1층 거실이 보였다.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둘러앉아 소주와 찌개를 먹고 있다. 조금 전까지 포커를 치던 남자들 같았다. 하나도 안 어울리는 일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얽혀 있다.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진작 이 나라를 떠났다. TV에서 이민 가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떠난 이들도 이미 많이들 저 나라로 향해 갔다. 굶어 죽지는 않는 나라라서. 우리나라에서도 굶어 죽는 사람은 없다. 핑계다.
똑같은 경제적 보장과 똑같은 자유와 양심이 존재하는 두 나라에서 사람들이 살기에 좋고 싫은 모양은 뚜렷한 이유를 대기 어렵다. 오히려, 설령 경제적 보장이 덜 되었다거나 자유와 평등에 불만을 가진 몇 안 되는 불만세력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이 사회가 거부해 온 한,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특수한 현상에 불과했을 뿐이다.
이제 불과 세시간이 남았다. 그들이 선전포고를 한지는 꼬박 다섯 시간째다. 많은 이들이 서둘러 자가용을 타고 고속도로로 향했다. 아마 지금쯤 경부고속도로는 이미 꽉 차버렸겠지. 예전 대통령 선거 때 고속도로를 이중으로 짓겠다던 한 재벌 총수도 있었는데, 그의 자식들도 지금쯤 헬기 조종사 옆좌석에서 이 장면을 보며 끌끌 혀를 차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미처 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있다. 대개는 돈이 없거나 차가 없어서, 학교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기다리거나 회사로 붙잡혀간 남편을 애타게 찾으며 서둘러 짐을 챙기고 있는 아내이거나, 혹은 모든 것을 이미 운명 탓으로 돌려놓고 자포자기한 심경에 지난 기억들이나 되짚어보는 이들일 것이다. 그들이 그렇다고 결코 여유롭지만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촉박하다. 더러는 술집에 가 있을 것이고, 더러는 옆집처럼 이런저런 막후 회담이 열을 올릴 것이며, 또 더러는 지금 나처럼 아마 말없이 제 방에 콕 틀어박혀 비아냥대는 잡념이나 떠올리거나 어김없이 찾아온 운명을 스스럼없이 마중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직 환갑이 채 지나지 않은 뉴스 앵커는 전쟁의 가장 큰 이유가 경제난이라고 말했다. 길거리에서 김정은 개새끼 개새끼를 연발하던 한 노인의 목소리가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어차피 예상하던 바였다. 경제폐쇄조치 후로도 그들은 꽤 오랜 기간을 버텼다. 오히려 경악해하는 이들을 보며 아무 힘도 없이 뻔한 일 아니었냐며 씩 웃어버리는 족속들도 그걸 여유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였다.
아니, 핵개발 이전부터 원래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우리나라 국가원수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정부가 국방태세를 더 강화하지만 않았어도, 또 경재폐쇄조치의 국제협정에 함께 거수를 하지만 않았어도, 화면 위로 점멸하고 있는 저 나라의 경제사정이 노후화되지만 않았어도, 또 군산복합체의 막강한 폭력을 휘두를 싸움 상대로 굳이 이 한반도를 지목하지만 않았어도 전쟁은 없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문득 한 여자를 찔러 죽이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 많은 국민들이 이 정부를 지지했다. 책의 한 구절처럼 이 '여론적 편견'의 힘이란 실로 막강했다. 많은 학자들이 붙잡혀갈 때에도, 인터넷 게시판마다 돌팔매질을 당한다 해도 그것들은 전적으로 잘한 일들이었을 뿐이다.
도박의 위험성, 흔히들 막판에 자기가 궁지에 몰리게 되면 대개 나머지 돈을 몽땅 털어 마지막 판을 기대하곤 한다. 하지만, 도박에는 엄연한 룰이 있다. 돈 없는 놈은 초반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몽땅 다 털리게 마련이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도박에서의 룰이다.
우리나라 국가원수는 아직 유럽에 체류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당분간 귀국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인터뷰에서 말한 '충격'과 '조만간 귀국'이란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는 이미 이 모든 사태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를 만큼 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으니까.
오늘밤엔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한 시간 뒤면 더 이상 라면이나 끓여 먹고 있을 일도, 문맥이 맞지도 않는 문장의 '폭력'에 억눌릴 필요도 없다. 컨츄리 송을 부르는 저 TV도 곧 자동으로 꺼질 테니. 그렇다면, 한 여자를 찔러 죽인 그 남자는 완벽히 잊게 될까? 이는 또 얼마나 완벽한 순환구조인가...
과연, 이 글을 읽게 될 당신은 그 기막힘에 앞서서, 혹 지금 펼쳐진 이 논리구조를 반박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을까? 모든 가능성이 검토되고, 어쩔 수, 어쩔 수 없네요 라는 문장이 존재하지 않는 곳인가? 나는 그 절망감을 대체해온 '인내심'이란 단어를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혹 당신도 이 단어를 저녁 책상 위에 올려놓고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지는 않은지. 당신은 과연 안녕한가? 아니, 안녕해질 수는 있는가?
이만 끝맺도록 하자. 약속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졸업
뜻밖의 전화였다.
유진은 잠시 저쪽의 목소리를 듣는 자신의 귀를 혼동하게 된다.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다시 말문을 연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는다. 그가 틀림없다. 무언가 어려운 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평소의 그 답지 않게 그는 조금 더듬거리는 듯하다. 잘 들리지는 않는다. 유진은 입을 열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뜻을 억지로 비추었다. 그가 힘없이 웃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튼, 졸업 축하한다.」
「...... 고마워요.」
대답을 별 성의 없이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언제 한번...... 」
「...... 한번 보지, 뭐」
「......」
「...... 끊을게.」
「예.」
저쪽에서 수화기를 아직 안 내려놓는 모양이다.
먼저 수화기를 놓는다.
그는 평소에도 이쪽에서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를 듣곤 했었지.
유진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도로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가 전화를 했다...... 여섯 달만이다.
그토록 길게 느껴졌던 시간인데. 무슨 일일까. 갑자기 전화를 하는 걸 보면 무슨 일이 혹 생긴 건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잠시 생각을 해본다. 아직도 무언가 남아있는 건 혹 아닐지.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지만, 여전히 켕기는 대목이었다.
유진은 집을 나선다. 겨울이라선지 코끝이 맵게 느껴진다.
다시 전화 생각이 났다. 무슨 일일까. 혹 내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아마 그렇겠지. 그저 안부전화라도 걸어본 것일 게지. 너무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문득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언제고 건강하지 못했던 그의 얼굴. 지난번 커피숍에서의 만남 이후 여태껏 그의 얼굴을 보진 못했다. 물론 그전에 있었던 그의 졸업식 때에도 그녀는 가지 않았었다.
그는 코스모스 졸업을 했다. 나중에야 졸업식 때 모였다는 친구들에게서 그의 소식을 얼핏 들었을 따름이다.
아마도 일부러 나오지 않은 것 같애.
유진의 눈치를 살피는 친구들 앞에서 그녀는 애써 태연해 보이려 했지만, 답답한 마음이 얼굴에서 행여 새어 나올까 그 자리가 견디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한 번은 그가 졸업한 후에도 아직 인천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아마도, 취직을 하진 않은 듯했다. 후배인 정욱이의 얘기대로라면, 전셋집이 올해 4월에야 빠진다고 해서 아직 인천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게 여태껏 그에 대해 들어온 이야기의 전부였다. 그와 헤어진 지도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한 차례도 연락 없이 지내오던 그가 오늘 전화를 한 것이다. 유진은 잠시 머리가 혼란해짐을 느낀다.
그가 왜 전화를 했을까.
그녀는 지금 학교에 나가는 길이다. 오늘 졸업생 환송회가 있다.
과에서 벌써부터 준비를 마친 후, 그녀에겐 날짜만을 통보해 왔다.
「누나, 꼭 잊지 말고 나와야 해요.」
정욱이와 한참 농담을 주고받은 후, 전화를 끊고는 다시금 픽 웃었다.
정욱이는 벌써 몇 년을 누나, 누나 하며 쫓아다니던 후배이다. 생일 때면 늘 더블 재킷으로 판매하는 앨범만을 골라서 선물했었지. 그리고는 돌아오는 자기 생일 때엔 꼭 월미도에 같이 가자고 조르던 녀석.
그렇지만 유진은 단 한 번도 후배의 부탁을 들어주진 못했다. 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시험과 날짜가 맞물렸기 때문이었다. 여차 여차 설명을 하면서도 못내 아쉬워하던 정욱이의 표정에 내심 미안하기도 했었다. 언제 한 번은 꼭 가야 할 것을 거듭 다짐하는 정욱이의 다짐이 때론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면장에서 세수를 막 하고 난 후, 방으로 향하던 중 전화가 날아든 것이다.
잠시 얼굴이 굳었었던 자신이 생각난다. 아직도 마지막 헤어질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상처로 남아있는 유진이다.
커피숍에서 그를 남겨두고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쏟았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울어보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리 창피한 일은 아니다. 아니, 그렇긴커녕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이렇게 속이 쓰리게 아파오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곤 한참을 잊기 위해 애를 쓰던 자신이었다. 이젠 어느 정도 잊었다고 생각하고 지내왔었는데. 이까짓 전화 한 통에 그 모든 게 갑자기 혼란해짐이 그녀로서는 몹시도 두렵고 힘든 일이었다.
상처일 뿐이야.
유진은 혼자 낮게 중얼거려 본다. 그리곤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차창 밖으로 가볍게 날리는 눈발을 쳐다본다.
졸업 때문일 거야.
눈발이 흩어지는 도로를 따라 그녀는 과학생회가 있는 문과대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 현관을 지나면서 건물 기둥에 「국어국문학과 졸업생 환송회 - 2월 20일 오후 다섯 시」라고 써진 작은 안내물이 눈에 띄었다. 복도를 따라 맨 끝까지 가서 좌측으로 꺾어지면 몇 개의 동아리방과 학생회룸이 같이 붙어 있다. 학생회룸 밖에도 벌써 많은 애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유진을 발견한 정욱이가 먼저 환하게 웃으며 달려 나온다.
「누나, 인제 오면 어떡해요.」
「뭐 벌써 온 거지.」
씩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넘긴다.
「졸업생들은 좀 일찍 나오기로 했잖아요.」
「난 몰랐지.」
「어휴.」
정욱이는 얼굴을 찌푸려 보이며, 그녀를 데리고 학생회룸으로 들어간다.
그의 말과는 달리 졸업생들의 모습이 그리 많이 띄진 않는다.
「이게 다야?」
「아니, 좀 있으면 더 오겠죠.」
정욱이 헤, 웃어 보이는 얼굴을 돌린다.
「왔어?」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함께 졸업하는 인호 선배다.
「안녕하세요.」
「그래.」
그가 잠시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을 피해 학생회룸을 둘러본다.
집행부가 새로 바뀌면서 방을 좀 정리한 모양이다. 게시판에 꽂힌 각 부서의 표지판이 달라진 게 눈에 띈다. 그리고, 또다시 이름들이 바뀐 각 부원들의 명함이 그 옆에 나란히 적혀 있다.
「저번에 집에 전화하니까 없다고 하더라.」
인호가 다시 말을 걸어온다.
「식구들과 친척집엘 갔었어요.」
「왜?」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길래......」
「내게도 좀 연락하지.」
「급하게 출발하게 됐거든요.」
「그래?」
그는 자기 동기들과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다 만 듯, 조금은 명랑한 표정이다. 허기사 그는 늘 저렇게 명랑했다. 다만 얼마 전 집 앞에서 그녀에게 이야기할 때의 그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었다. 아니, 무언가를 꼭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그 강렬한 눈빛. 그때의 아득한 기억이란......
결국 그녀는 그때의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한 셈이었다. 하지만, 일시에 그녀가 그리도 쉽게 그의 감정을 허락했던 건 아니다. 그동안 수없이 되풀이되어 왔던 그의 전화. 그리고, 몇 번을 만나주면서 계속 누적되어 온 그의 강력한 의지에 대한 받아들임이었다. 그들은 이제 과에서도 한쌍의 커플로 통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그와 헤어진 이후.
「무슨 일 있었니?」
「아니요. 왜요?」
「얼굴 안색이 좋지 못해서.」
「아니, 별것 아니에요.」
시간이 좀 흐르면서 몇 사람이 더 왔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인원이 참석하진 않았다.
방학이 너무 지난 탓에 더욱 그런 듯했다. 처음엔 계속 잘 나오던 애들도 지금은 기나긴 방학에 지쳐 아르바이트나 새 학기 준비로 바쁠 때이다. 정욱이와 같은 학번인 애들끼리 1학년 애들에게 전화연락을 취하느라 밖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룸을 나왔다.
「누나, 어디 가요?」
「커피 마시러.」
「내 것도 한잔.」
정욱이의 농담을 뒤로 들으면서 그녀는 계단을 따라 현관 쪽에 설치된 자판기 쪽으로 향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스위치를 누른다. 컵으로 커피가 담기는 동안, 자판기의 윙윙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아까 걸려온 전화 생각을 한다. 그가 전화를 했다. 오랜만이다. 그의 이름이 잠시 떠올랐다.
전필재.
커피잔을 들고서 그녀는 창문 밖으로 계속 흩날리는 눈을 쳐다본다. 창문 너머로 문득 그가 웃던 표정이 보인다.
옛 애인.
어쩔 수 없음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유진은 혼자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그와 헤어지고 난 후,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는 버릇이 그녀에게 생겨 있었다.
과에서 M.T. 를 갔었을 때, 사람들 앞에서 이런저런 재담으로 웃음바다를 만들곤 하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를 처음 만난 때 역시 그 M.T. 에서였다. 그때 그녀는 갓 3학년에 오른, 하지만 여전히 진로에 대해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중이었다.
후배들에게 그가 조심스레 꺼내던 말을 들었다.
나...... 등단.
그의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시를 쓸지, 소설을 쓸지는 결정하지 못했지만, 그는 아무튼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국문과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학교에서 여태껏 등단한 선배가 고작 열 손가락에도 못 꼽힌다는 게 솔직히 그녀도 조금 못마땅했었다. 하지만, 등단이란 게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니라는 사실도 그녀로서는 이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이미 교직 쪽으로 진로를 선택해 놓은 입장이었지만, 막상 임용고시라는 제도에 도전할 만큼 대단한 열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문사나 출판사에 입사하기엔 엄청난 경쟁률이 그녀를 지레 겁먹게 했다. 대학에 들어와서 영어공부를 차근차근 준비해두지도 못했었다. 영어 시험을 전형으로 택하고 있는 회사 공문을 볼 때마다, 유진은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사회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필재는 그녀보다 세 학번 위인 선배였다. 방위병으로 군대를 나와 학 학년이 위였고, 몇몇 교양과목과 전공수업들은 그녀랑 같은 클래스에서 듣기도 했다. 그는 강의실에서 거의 말이 없는 편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자신의 동기들이 복도 끝에서 군대생활 에피소드 등으로 잡담을 하는 동안에도, 늘 한쪽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며 창문만을 응시하던 그를 발견할 때가 더 많았다. 처음 몇 번은 인사라도 나눌 때가 있었지만 이후로는 내내 가벼운 인사도 없이 서먹서먹하게만 지나치던 사이였었다.
언젠가 한 번은 쉬는 시간이었는데, 그가 앉아 있던 책상을 지나치다가 펼쳐진 연습장에 적힌 글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어떤 시구절이었다.
그러므로, 길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悪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藥과 마음을 얻었다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도서관에서 우연히 황지우의 시집을 읽게 되었고 그의 연습장에 적혀있던 시구가 황지우의 그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그녀도 필재와 제법 친숙히 인사를 나눌 정도로는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황지우라는 시인을 꽤 좋아한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한 번은 강의실에 혼자 앉아 있던 그에게 껌을 건넨 적이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날 강의 도중에 그녀는 문득 그를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는 황급히 고개를 떨구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후로 몇 번인가 또 그런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호기심이 생긴 줄로 알았다. 그리고, 그 짐작은 맞았다.
그러다가 한 번은 늦은 봄의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과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였다. 유진은 정욱이와 한참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끔 필재 쪽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곧 그의 동기이자 학생회장인 인호가 들어왔다. 술상이 긴 탁자를 두 개 붙인 자리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잘 듣진 못했다. 어렴풋이 들은 바로는 아마도 과학생회의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눈치였다. 인호는 무언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자주 짓곤 했고, 그는 가끔 술잔을 통째로 비우곤 했다. 자리가 어느 정도 취해있을 때, 정욱이가 사회를 자청했다. 먼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간드러진 목소리로 부른 후, 곧이어 인호 선배가 학생회장으로 소개받으며 현재 과학생회의 사업상황과 각 부서의 조정계획을 이야기하고는 「노동의 새벽」을 불렀다. 모두들 따라 불렀다. 이윽고 수저가 꽂힌 빈 병이 필재에게 도착했다. 정욱이가 노래를 하지 않으려면, 이걸 다 비우라며 반쯤 남은 소주병을 그에게 건넨다. 그는 잠시 있다가 노래 대신에 그걸 마시겠다고 했다. 정말로 그는 소주병을 완전히 다 비웠다. 몇 번 노래의 순번이 더 돌아갔고, 분위기가 좋았던 탓에 술자리는 계속 흥을 더해갔다. 이윽고 술자리가 파한 후,
「필재 형, 괜찮아요?」
정욱이가 조금은 걱정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까 마신 술 때문에 조금 취해 보였다. 친구들이 그를 부축했다. 그는 괜찮다고 했다. 사람들은 술집을 나와 길가에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그녀도 그들과 함께 그렇게 서있는데, 두어 발자국쯤 떨어져 있던 그가 몇 걸음 걷더니 이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기댄다.
「아니 필재 형, 드디어 유진이 누나한테.」
정욱이의 농담보다는 갑작스러운 일에 조금 놀란 눈빛으로 유진은 그를 바라본다. 고개를 숙인 채 기댄 그의 머리에서 바람에 날린 머리칼이 흩날린다. 몇 올이 그녀의 볼에 가끔 닿는다. 곧 그가 다시 일어섰고, 다시 사람들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녀도 그의 뒤를 따라 걷는다.
사람들과 헤어진 후 곧장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 그녀는 조금씩 뛰기 시작하는 심장 소리를 깨달았다. 그가 나를 생각하고 있구나. 그녀는 여태껏 연애해 본 경험이 없었다. 자기 친구들이 가끔씩 화장한 얼굴로 강의실을 돌아다닐 적에도 그녀는 그저 언짢은 기색만을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고, 자신도 언젠가는 저렇게 누군가를 사귀겠지 하는 생각에 젖어보기도 했었다.
전필재.
그녀는 다시금 그의 이름을 되뇌어보았다.
한 달쯤 지나서였다. 그는 그날 이후로 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너무 쓸 만큼 한가하진 않았다. 수업 내용이 점차 어려워졌고, 여태껏 장학금을 계속 타오던 그녀는 혹여나 이번에 장학금을 놓치게 될까 전전긍긍하던 처지에 중간고사를 맞게 된 것이다.
「저...... 유진아.」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가 몹시 궁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내일 너 학교에 나오지.」
「예. 동기 모임이 있는데요.」
「나도 내일 나올 텐데, 내가 밥 사줄게.」
「웬일이에요? 밥을 다 사준다고 하고.」
장난스레 받아넘긴다. 하긴 그가 다른 애들한테 밥을 사준다는 얘길 들어본 적도 별로 없었다.
「...... 저번에 네가 나 밥 사준 적 있잖아.」
「......」
얼마 전에 정욱이랑 그가 저녁까지 함께 자료집을 만들고 나서는, 우연히 학생회룸에 들른 그녀에게 밥을 사달라고 조른 적이 있어서 못 이긴 척하며 만둣국을 사준 기억이 났다.
「그래요. 언제 사줄 거예요?」
「정오쯤에 보자.
「어디서 볼까요...... 학교요?」
「...... 싫으면 바깥에서 만나고.」
「바깥이 좋겠네요. 동인천에서 만나죠.」
「그래.」
다음날, 유진은 유달리 옷차림에 신경 쓰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도 저 사람한테 무슨 생각이 있는 건가. 혼자 고개를 갸웃거려 보기도 하고, 웃어도 본다. 아무튼, 모임을 늦게야 끝내고 나서 시간을 맞추느라 정신없이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그는 이미 30분 전에 와 있었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날 그들은 영화를 한편 보았고, 유진이 조른 탓에 함께 만둣국을 먹었다. 신포시장이란 데서 두어 시간을 맴돌다가 커피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는 웃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나...... 여자랑 커피숍에 와본 거 처음이라 그래.」
같은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그는 학교 앞에서 먼저 내렸다. 인사를 하고 버스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어깨가 조금은 처져 보였다.
무슨 일일까.
유진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윽고 집 근처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렸다. 집까지 걸으면서도 궁금증은 계속되었다.
왜 아무 말도 없었을까.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다시금 그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아무래도 너무 순진해 보인다. 자기 앞에 앉은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믿을 여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는 사실인 것 같았다. 사실이라면, 복학할 때까지 여자 한번 안 사귀어봤다는 얘기인가.
유진은 잠시 턱을 괸 채 책상에 앉아 있었다.
다음날 그녀에게 편지가 왔다. 수업이 파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온 그녀의 손에 「장유진 받음」이라고 또렷하게 적힌 편지가 전달되었다.
보내는 이는 전필재.
그의 편지다. 봉투를 뜯는다. 그의 글씨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열 다섯 장짜리의 긴 편지라니.
다시금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누나, 오랜만이에요.」
후배 성수다. 지금 학교에 나오는 모양이다.
「응.」
「졸업 축하해요.」
「그래.」
웃어 보인다. 그가 다시 물었다.
「누구 기다려요?」
「아아니?」
「그럼 여기서 뭐해요?」
「커피 마시려고.」
「나도 한잔 빼줘요.」
「그래.」
자판기에 다시 동전을 넣고 커피를 빼고는, 정욱이 것도 하나 더 빼서 성수의 손에 건네준다.
「빨리 들어와요.」
「그래. 들어갈게.」
방학이라선지 학교는 이렇게 조용하다.
학생회룸에서 떠드는 소리가 이곳 현관에까지 들려온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학생회에서 소설창작반을 맡았었다.
그녀와 따로 영화를 보거나, 가까운 유원지를 찾은 일도 주말에나 가능했다. 허기사 그녀로서도 도서관에 계속 다니고 있는 참이라 평일에는 학생회룸에서 그를 만나곤 했다. 하지만, 서로 싫은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는 형편이었다.
자판기에서 뽑아마시는 커피도 소박한 즐거움이었고, 가끔 동아리방에서 둘만이 나누는 대화도 정겨웠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던 게 벌써 한 해를 넘겼다. 그새 그들은 여러 번 서로의 신뢰를 확인했었고, 때로는 힘든 일을 털어놓을 수 있는 포근함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벌써 여러 번째 낙방을 거듭하곤 했다.
신춘문예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웬만한 문예지에도 여러 번 그는 자신의 소설을 응모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자기 소설을 그녀에게 보여주진 않았다. 소설은 사문(私文)이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그는 소설가로서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흔적이 역력했다. 그건 일종의 직업윤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만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가끔은 소설의 줄거리나 주제를 얘기해주곤 했다.
실제로 몇 번은 심사평에 그의 이름이 실리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대개가 그의 지나친 현실의식을 문제삼곤 했다.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선작이 발표되고 심사평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적마다 그는 허탈해하는 눈치였다. 그때마다 유진은 그에게 다음번을 기대한다며 위로를 건넸다. 때론 정말 그에게 소설가로서의 기질이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그런 것과는 아랑곳없이 오직 소설만을 썼다. 그런 그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들의 미래에 관한 모든 선택을 유진에게 일임했다.
자신이 이 길을 가는 동안, 그녀가 양보할 것들을 꽤 염려하며 미안하다는 눈치였다. 유진도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서 임용고시에 합격한다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가끔은 코피까지 쏟아가며 공부를 했다지만 자신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는 농담처럼 묻곤 했다.
누가 먹여 살려주냐.
가장 서운한 질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소설가 외의 다른 길은 아예 생각도 않는 모양이다. 그는 학과성적도 그다지 좋지 못했고, 따로 취업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을 들락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가끔 책을 찾기 위해 자료실을 이용할 뿐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시간은 거의 소설창작반 사업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는 자기 자신을 챙길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것만 같았다. 오로지 소설뿐이었다. 가끔은 이 일로 서로 마찰이 빚어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그때마다 현실을 설득하는 그녀에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달라지기 이전의 시대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한 노소설가의 말처럼, 그리고 그 소설가의 말을 인용한 한 젊은 여소설가가 괴로워했다는 그 말처럼, 그 시대는 살육과 절망뿐인 시대라고 한다. 그는 그 시대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쩜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가 다른 모든 직장을 내팽개치고 소설이라는 대상에 매달리게 된 연유도 그러했다. 그가 내린 가장 궁극적인, 하지만 더 나은 선택이 없는 상황에서 최후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진로가 그것이었다.
이미 다른 모든 이들이 현장과 단체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의 전술은 틀렸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진보적 혹은 애국적 사회진출을 이야기했다. 쉽게 말해서 사회로의 편입을 뜻했다. 심지어 저번 총학생회장을 맡았던 인물은 모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어떤 이는 집에서 차려준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도 들렸다.
돈이 있어야 운동도 한다.
사람들은 쉽게 농담을 꺼내곤 했다. 어차피 사회로의 편입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타협이란 단어를 거의 수치로 받아들였다. 한 번은 그것이 단순히 자존심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던 그녀의 핀잔에, 그는 몹시 괴로워했었다. 이후로 그녀는 다시 또 같은 핀잔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런 길을 걷는다고 해서 그녀까지 그 길을 함께 걷게 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예정된 생활고를 같이 걸머지게 한다는 사실이 몹시도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그를 설득하기엔 그녀는 벅차기만 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진 않는다.
유진은 필재와의 관계를 회의하는 때가 잦아졌다. 게다가, 그런 눈치를 아는 듯한 그가 아무 반응이 없는 탓에 더더욱 유진은 회의가 커지기만 했다. 그는 나보다도 소설을 택한 것이다. 이 사실을 그녀로선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보다는 여전히 소설 쪽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에 대한 각별함이 덜해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회의감은 날로 깊어만 갔다.
여섯 번째 낙방이 있고서 일주일쯤 지난 후였다.
그가 다시 유진을 찾았었다. 그는 학점이 모자라 그 얼마 전에야 코스모스 졸업을 한 직후였다. 그녀 역시 이제는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막 가을학기 개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둘은 커피숍에서 마주 앉았다. 말없이 창문만을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이제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유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빠. 또 떨어졌다매요.」
「......」
「이제 그만 좀 하지 그래요.」
「......」
「저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요.」
「......」
「......」
그가 무겁게 대답했다.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찾아야겠어.」
「......」
유진은 둘의 사이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깨달았다. 날이 갈수록 그는 점점 초라하게만 느껴졌고, 마치 보란 듯이 다른 사람들이 점점 쾌활해지는 학생회룸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하루하루였다. 유진은 문득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 역시 지쳐 보였다. 서로에게 힘든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날도 둘은 별로 말을 나누지 않은 채, 창 밖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엔 필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나...... 요새 영어 공부한다.」
「......」
「넌 공부 잘 되니?」
「...... 그럭저럭.」
유진은 모질게 마음먹고는, 이제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도 어느 정도는 짐작했는지, 그다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조금은 피로해 보이던 그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해주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그녀는 끝내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내게 겨우 할 수 있는 말이 그거예요. 이제 겨우 그런 말밖에 못 하는 거예요. 오빤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군요.
그녀는 끝내 이 말만은 하지 못했다.
다시 견디기 힘든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다른 약속이 있다고 말하고선, 빠져나오다시피 커피숍을 나왔다.
문을 여는 순간 복받쳐있던 눈물이 주루루 흘러나왔다.
그렇게 필재와 헤어진 후, 유진은 줄곧 도서관을 다녔다. 물론 한 사람을 잊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면 그의 얼굴이 밟히곤 했다. 그때마다 억지로 그 얼굴을 떨쳐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야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인호와 가끔 술자리를 갖게 된 지도 벌써 두 달이지 났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전화도 꽤 잦아졌다. 그때마다 유진은 인호라는 인물을 한번 머릿속에 떠올렸다가는, 곧잘 필재의 얼굴이 생각나면서 고개를 내젓곤 했다. 인호는 꽤 자상하게 대해주곤 했기에, 그녀로서도 별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필재의 생각이 나게끔 그가 행동할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멍하게 창을 쳐다보던 그녀를 보고는 곧 그가 장난을 멈추곤 했다.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을 사귀는 게 아니야.
옆에서 친구들이 말하곤 했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선배 오빠를 만나는 것뿐이다. 혼자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인호는 꽤 전화를 자주 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주말이면 꼬박 그녀를 불러냈었고, 월미도나 자유공원 같은 데서 함께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그녀도 흔쾌히 사진 찍기를 즐겼다. 무언가 달아나버릴 것만 같았던 것들이 다시금 그녀에게 돌아온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착각은 곧 그녀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유진은 집 앞 대문에 웅크리고 앉은 인호의 모습을 발견했다. 오늘은 공부도 꽤 잘되던 참에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열한 시가 넘었다. 인호는 술을 많이 마신 듯했다. 그는 그녀를 보자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웬일... 이세요?」
「응... 할 얘기가 있어서.」
「뭔데요.」
「오늘은 꼭 결론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
「...... 널 사랑해.」
그 말과 동시에 갑자기 그는 그녀의 어깨를 휘감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면서 그를 뿌리치려 했지만, 완강한 그의 어깨는 이미 그녀를 품 안에 안고 있었다. 계속 뿌리치지만 점점 힘을 빠져옴을 느끼는 그녀의 얼굴을 인호의 입술이 덮쳐왔다. 그는 다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는 힘껏 그녀의 입술을 빨아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려 하자, 그가 완강한 목소리로 위압해 왔다.
「넌 내 거야.」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녀는 잠시 멍한 채 그에게 입술을 내맡겼다. 정신이 아득했다. 아무 생각도 더 들지 않았다. 잠시 후, 가슴을 한 번 더듬던 그의 손길이 느껴졌었고, 그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며 다시금 황급히 골목을 빠져 돌아갔다. 그녀는 대문 앞에 기대어선 채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제 넌 내 거야.
그녀는 그때도 가끔 필재의 생각을 했다. 학생회룸에 앉아있다가도 생각이 들 때면, 다시금 쓴웃음으로 얼른 지우려 하곤 했다. 인호는 얼마 전에 자랑스레 대기업 입사원서를 그녀 앞에 내밀었고, 몇 주일이 지나서 흥분된 목소리로 그 회사에 합격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녀는 이제 거의 매일 저녁을 인호와 함께 하곤 했다. 식당에서 둘을 보게 된 같은 과 사람들이 자연스레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인호는 매우 자신감 넘쳐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어느 곳에서건 그녀에게 팔짱을 끼었다.
「왜 여기 있어? 누구 기다려?」
인호가 물었다. 안에서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다섯 시 반이 조금 넘었다. 이십여분을 서 있었던 모양이다.
「들어가자.」
인호의 뒤를 따라 학생회룸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이제 옹기종기 모여 환송회를 시작할 태세이다. 그녀도 인호의 옆자리에 앉는다. 정욱이가 사회를 보게 되었다. 특유의 몸짓과 억양으로 우스갯소리를 시작한다. 곧이어 다시금 노래 부르기가 시작된다. 역시 순번제다. 먼저 인호가 노래를 부른다. 「일과 이분의 일」. 사람들이 모두 쫓아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도 조용히 따라 부른다. 학번순으로 그렇게 몇 사람이 노래를 불렀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함께 따라 했다. 「만주출정가」를 부른 한 선배에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곧이어 「멀어져간 사람아」, 「날 떠나지 마」, 「울고 넘는 박달재」가 이어진다. 흥을 점점 돋울 때였다.
전화벨 소리가 한참이나 울렸고, 그제야 정욱이가 수화기를 들었다.
「어, 형! 오랜만이에요!...... 예...... 아니요. 좀 있다가 다른 데로 옮길 거예요...... 그래요...... 있다가 여덟 시쯤에요...... 「산촌곱창」 가기로 했어요...... 예...... 예. 이따가 봐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정욱이가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는 지금 환송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버스 차창 밖으로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인호를 선택한 것이다. 적어도 그에겐 그녀를 책임지겠다는 의향이 뚜렷했고, 그녀 역시 그의 태도를 누그러뜨릴 명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사랑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진 않는다.
그녀는 몇 번이고 이 말을 곱씹었다. 그녀에겐 단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만이 바로 그녀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건 자신으로서도 당연한 권리였고, 또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어렵게 타협했던 매듭이었다. 얼마 전 인호가 만취한 상태로 그녀의 몸을 원했었을 때에도 그녀는 결국 응했다. 그가 그동안 여러 번 원했었던 까닭도 있었지만, 몇 달을 사귀어온 그녀 역시 그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불안한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한 남자를 얻는 것이었고, 그것으로 하나의 선택이 끝날 수 있었다. 들떠있는 그의 몸이 그녀를 파고들 때에도, 그녀는 처음 경험하는 고통보다는 일종의 안도를 얻고 있었다.
차후에야 인호는 자신이 필재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걔도 이제 우리 둘 사이를 알고 있어.
나도 걔한텐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하지만 이제 너도 걔와는 헤어진 거잖아.
내겐 너밖에 없어. 널 완전히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이제 잊어.
그녀는 그런 인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참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었다. 언젠가 강의실 복도를 지나다가 문득 그의 동기들이 먼발치서 키득거리며 쑥덕이는 말도 들었었다.
저거, 괜찮지...... 먹었대.
누군 좋겠다. 흐흐.
개의치 않는다. 아무튼 이제 그녀에겐 한 남자가 있다. 그녀가 선택한 남자이다. 무엇보다도, 인호는 날 사랑한다. 그래서, 믿을 수 있다. 나도 그를 사랑할 수 있다. 단지 친구들이 하도 물어보길래 어쩔 수 없이 한 대답이었을 게다. 적어도, 내 앞에선 그렇게 자상하지 않던가.
필재가 환송회에 왔었다. 곱창집에서 술잔이 몇 번을 돌았을 때 여전히 힘없는 표정으로, 곧은 걸음으로 그는 우리들이 앉아있던 자리에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여전히 가끔씩 희미한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술자리에서 그는 정욱이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마지막에 다시 순번으로 노래 부르기가 왔을 때는 노래도 하나 불렀다. 「친구 2」.
유진은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젖어오는 눈시울을 느낀다. 눈물이 조금씩 나오면서 코끝이 찡해져 온다. 왜 갑자기 또. 눈물을 닦진 않는다. 무엇이 슬프다는 것인가. 그에 대한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는 것도 아닌데 왜 또 이러나.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다. 인호가 사준 손수건이다. 와르르 울고만 싶다. 하필이면 그때 그 말이 생각났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그가 버스에 오르던 그녀에게 수줍은 표정으로 하던 말.
「나...... 등단했어.」
오이도
- 타협은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그 어떤 효과와 영향이 있는가?
***
외곽순환도로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온 차는 어느덧 정왕 IC에 도착했다.
시흥이라는 도시, 월곶이라는 지명으로도 그리 낯설지 않은 곳임에도 공사가 한창인 모습은 "정왕"이라고 써붙인 새 간판의 크기만큼이나 생경하게만 느껴진다. 앞서던 다른 차들이 연신 쌔앵 하며 톨게이트를 지나치는 모습을 보곤 얼른 뒤를 따라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일찌감치 사무실을 출발해 얼추한 한시간이 넘게 지난 시각, 이제부턴 포구까지 불과 오분 남짓 거리다.
현덕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차창 밖으로 휘익 던지고는 양손으로 다시 핸들을 돌려 큰길로 접어든다. 길 양옆으로 빽빽한 고층 아파트들 사이에 접어드니 저만치쯤 주차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신호등을 따라 큼지막히 원을 그리며 현덕은 주차장이 있는 골목으로 향했다. 주차장은 유료임에도 제법 많은 차들로 북적댄다.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한참 애를 먹다가 가까스로 주차를 마친 현덕은 곧장 주차장을 빠져나와 약속장소인 횟집을 찾기 시작했다.
"로시난테에서 두 시에 만나요." 그녀가 남긴 메시지 하나.
오뉴월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의 아스팔트.
근래의 몇 해는 내내 이랬던 것도 같고. 현덕은 한낮의 열기로 등뒤에 솟아나는 땀의 습기를 느끼며 발길을 서두른다. 다시 담배 한 개비. 가게들로 빼곡한 포구의 허름한 시장골목에서 신식건물인 횟집 간판을 찾아내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초입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두 번째 골목 중간께 위치한 3층짜리 건물. 세로로 "로시난테"라고 쓰인 간판 불빛이 보인다.
현덕은 잠시 길 건너편에 서서 마저 담배를 피우며 2층 유리창께에 앉은 손님들 몇몇을 쳐다본다. 아직 그녀는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모두들 쌍쌍이 또는 집단으로 둘러앉은 풍경. 길바닥에 꽁초를 비벼 끄고 계단을 올라섰다. 건물 2층에 위치한 횟집 자동문이 열리자 종업원의 "어서오십시오." 하는 인사가 들렸고 뚜벅뚜벅 걷는 발걸음으로 유리창께 빈자리부터 쭈욱 둘러보고 난 뒤, 현덕은 한 모퉁이에 있는 빈자리를 향해 가 앉는다.
곧이어 다가오는 종업원한테 "일행이 있어서요." 하며 잠시 기다리게 하고선 슬쩍 핸드폰을 열어 그동안 도착한 전화나 문자가 없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1통. 그녀다. 아마도 조금 늦겠다는 전갈이겠지. 전화를 건다. 몇번의 발신음. 그녀의 목소리.
"여보세요."
"저예요."
"예... 제가 한 이십 분쯤 늦을 것 같아요."
"예..."
"조금만 기다리세요."
"예, 괜찮아요."
짧게 전화를 끝낸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통화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현덕은 종업원이 먼저 가져다준 물컵에 물을 따라 한모금 마신다. 약간의 설렘도 냉수 한잔만큼 담아둔 채.
횟집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넘실댄다. 부부가 아이를 손잡고 생선을 구경하는 모습, 한 노인이 낡은 자전거를 몰아 길모퉁이로 사라지는 풍경, 짧은 반바지 차림에 허연 다리를 내놓은 아가씨들끼리 수다떠는 모습, 또 팔짱을 낀 채 뒷모습으로 포옹하는 두 남녀의 모습이 눈에 띈다. 며칠전에 비가 내려서인지 포장이 군데군데 뜯긴 포구 시장골목은 곳곳에 작은 물웅덩이들이 햇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짧은 기다림의 시간들은 언제나 긴 이미지와 함께 한다. 이 짧은 순간들도 이 풍경들로 기억에 남게 되겠지.
***
그동안 문이 열리고 두어 쌍의 커플이 더 들어왔다. 잠시 후, 그녀가 열린 문을 통해 들어왔다.
현덕은 그녀를 계속 쳐다본다. 그녀는 두리번대며 현덕을 찾는 눈치다. 먼저 손을 들어 자신이 앉은 위치를 알릴까 하다 현덕은 그녀가 먼저 찾길 기다린다. 하얀 블라우스와 검정색 스커트. 가장 고전적이자 가장 고혹적인 자태의 패션. 맘에 든다. 그녀의 다리가 유난히 눈에 띌만큼 희고 매끈하게 느껴진다. 사진 속 모습보다도 훨씬 앳되고 싱그러운 모습. 현덕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 어딘가에서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그녀도 곧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현덕을 알아보고는 어설픈 미소로 살짝 웃음을 머금은 채 이쪽을 향한다. 자리에 앉는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웃으며 건네는 한마디.
"아녜요. 저도 온지 얼마 안 됐어요."
"버스를 타고 오느라 좀 늦었어요." 다시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예" 현덕도 함께 따라 웃는다.
"배고프시죠?"
"아니요. 괜찮아요."
"뭐 드실래요?"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냥 편한 걸로 시키세요."
"예." 그녀가 곧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광어 2킬로요."
"예" 종업원이 주문을 전달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고, 그녀는 다시 웃으며 말을 건넨다.
"전 여기 자주 와봤어요."
"예..."
"안산에서 삼십분 정도면 오거든요."
"예... 저도 한두 번 왔던 것 같아요."
"아, 그러세요?" 반가워하는 반응. 다시 짧은 침묵. 그녀가 화제를 바꾼다.
"오늘 날씨가 많이 덥죠?"
"예... 꽤 덥네요." 현덕은 미간을 찌푸려 후텁지근한 날씨를 표현하며 말을 잇는다.
"이게 다 지구온난화 때문이죠." 웃는다. 그녀도 까르르 웃는다. 썰렁한 유머는 현덕의 전매특허다.
"많이... 놀라셨죠?"
"...... 아니요."
"그럼... 예상하셨어요?"
"음... 아마도 그랬던 모양예요."
그녀가 다시 미소를 띄운다. 제법 고운 얼굴이다. 자세히 보니 사진보다 훨씬 더 예쁜 것 같다.
"실제로 보니... 굉장히 미인이세요." 현덕은 수줍어하는 채 최대의 찬사를 보낸다.
"고맙습니다." 다시 웃으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여름에 그런데 회... 좋아하세요?"
"여긴 깨끗한 데라... 괜찮을 것 같은데요?"
"예..."
"......" 여전히 어색한 짧은 침묵이 종종 흐른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고쳐 입은 채 연신 신경을 쓰며 몸을 살짝 움직여댔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며 현덕 역시 이 어색함에 익숙해지려 애를 쓴다.
***
회가 나오기 전 여러 가지 해산물로 전메뉴들이 먼저 도착했다. 조심스레 하나씩 그것들을 주워 먹으며 현덕은 연신 그녀의 외모를 훔쳐보게 된다. 그래도 자세히 보니 제법 나잇살을 먹었을 표정임에도, 그래도 어렸을 적 꽤나 예뻤을 법한 그녀의 매력적인 마스크와 얇은 블라우스 속으로 살짝살짝 내비칠 법한 무늬를 가진 듯한 브래지어의 실루엣조차 눈에 띌듯말듯 그의 맘을 설레게 만든다. 제법 둥그런 봉우리를 가진 가슴의 실루엣도 못 본 체 슬쩍 봐두었다. 맨처음 느꼈던 하얀 피부와 다리 역시 얼굴을 닮아 그렇게 하얬던 모양이다. 사진 속 인상처럼 그녀의 실제 첫인상은 과연 입체적인 분위기다. 윤곽이 뚜렷한 코며 제법 큰 두 눈과 가볍게 터치를 한 듯한 입술 그리고 알맞게 살짝 갸름하기도 한 얼굴형 같은 게 아무래도 제일 먼저 눈에 밟힌다. 그리고, 그녀의 속살일 법한 가슴... 유난히 제법 싱싱한 편이다. 금세라도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요즘도 많이 바쁘세요?" 그녀가 묻는다.
"네... 그런 편이죠." 현덕이 대답했다.
그녀와 처음 알게 된 건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서다. 한동안 수해에 걸쳐 인터넷 음악방송에서 이런저런 시간들을 소일하던 그에게 저작권법 시행 이후부턴 제대로 된 방송을 할 형편이 못됐다. 그때 방향을 바꿔 새롭게 개설한 게 바로 개인 블로그다. 지금은 이 역시 저작권법 저촉문제로 더 이상 음원 게시물 같은 게 허용되지 않는 마당이지만,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현덕은 하루에 서너 개씩 음원을 담아 블로그 포스팅을 해오던 터였다. 재작년부터인가... 그녀한테도 이런 사정을 따로 설명해가며 닫기는 했어도, 여전히 그 비공개 게시물들은 가끔씩 그가 들추어보는 일상사가 되곤 했다.
"제 메시지 받고... 좀 놀라셨죠?" 그녀가 재차 묻는다.
"음..." 현덕은 고개를 가벼이 숙인 채 그닥 더 말할 게 없어 얼버무리게 된다.
그녀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된 건 전적으로 인터넷 메신저 역할이 컸다. 혹시나 싶어 예전 블로그 이웃들을 연락처로 등록하자마자 대뜸 친구추천에 그녀의 이름이 올랐고 주저 없이 그는 그녀를 친구로 등록했다. 지현희.
친구로 등록을 해두고도 며칠씩 쳐다보면서 제대로 선뜻 말은 못 걸다가 어느 날 밤 회식을 끝내고 귀가하던 버스 안에서 술김에 처음 인사를 나눴던 게 고작이다. 그 이후로 일과시간을 마다한 채 하루에도 몇 번씩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다가 이제 첫만남을 실제로 갖게 된 오늘이다. 남자들 사이의 얘기로 이른바 "끝"을 보기 위해.
현덕이 대답했다.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죠. 서로 이름도 잘 몰랐고 주소도 모르고 학교도, 친구들도 잘 모르는데... 서로 아직 잘 알지도 친하지도 않은 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급격한 다가옴이 어쩌면 두려울 법도 했죠... 시간이 좀 지나서야...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가까운 사이도 됐잖아요."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가깝다기보단... 음, 서로 아끼고 보듬게 된 사이랄까요?" 물었다.
그녀가 빠르게 "네."라고 답하며, "아무래도 그쪽은 많이 조심스러운 눈치였거든요. 하지만 전... 이렇게 말하면 좀 쉬운 게 되나요? 하하 (웃으며) 전 그래요. 보고 싶을 땐 봐야 하는 성미라서요. 또 그만큼 많이 보고 싶었어요."
"제가요?" 못 미덥다는 듯이 그가 물어본다.
"네." 눈을 반짝이면서 그녀도 답했다.
다시 짧은 침묵.
이윽고 이것저것을 주워 먹다 보니 메인메뉴가 나왔고 둘은 또다시 연신 눈치껏 서로를 살피면서 최근 들었던 음악들과 곧 있게 될 누우런 정치판의 선거와 이미 작고한 전직 대통령에 얽힌 소회들을 맘껏 풀어냈다. 놀랍게도 그녀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장르도, 좋아하는 정당도 없다고도 했다. 그저 젊을 땐 소위 고고장 같은 데서 들었던 때를 추억 삼아 유로댄스를 좋아한다고도 했다가 현덕이 가장 기억에 남는 포스트였다고 꺼낸 진주의 '가지 말라고'는 지난 옛사랑에 얽힌 이별의 미사 같은 것이라면서도 내내 쓸쓸한 미소가 번져 얼른 화제를 닫았다.
현덕이 아는 그녀의 취향은 아마도 재즈풍으로 편곡된 '아더의 테마' 정도였을 텐데 그녀는 그 노래를 몹시 좋아한다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감성의 동질감. 그녀의 허기진 욕망은 그저 그런 것들 뿐이었다. 지극히 투명하고 맑게 순수하기까지 한 그녀의 무한한 욕망 앞에서 그도 그만 수줍음을 느끼는 청년이 된 채 앉아 있었다.
며칠 전에 그녀가 메신저에 남겨놓은 메시지, 긴 글을 얼마나 고쳐 썼을까 모른다. 사랑... 그 속절없는 그리움과 먼발치에서의 안타까움을 한번 직접 만남에 의해 완벽히 이루어본다면 어떻겠느냐던 제안. 일종의 유혹인가? 현덕은 잠시 아찔함을 느꼈었다.
***
광어회를 곁들여 간단히 맥주 두병을 나눠 마시고서 둘은 횟집을 나왔다.
"어디로 갈까요?"
그녀가 먼저 물었다. 현덕은 잠시 머뭇대며 말했다.
"글쎄요..."
그녀가
"제가 아는 카페가 있어요. 같이 가보실래요?"
"네."
순순히 대답한다.
그녀가 두어 발자국쯤을 앞장서며 걷는다. 그도 뒤처지지 않게 서둘러 따라 걷는다.
앞서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찬찬히 훑어본다. 다시 봐도 꽤나 매혹적인 몸매. 예쁜 종아리와 샌들을 신은 발걸음, 그리고 날씬하게 쭉 뻗은 허벅지의 뒷모습 위로 검정 스커트의 타이트한 단정함이 내비치는 제법 알맞게 크기를 지닌 둔부가 눈에 띈다. 다시 위로 잘록해진 허리의 실루엣마저 느껴지니 현덕은 어느새 불끈 솟아나는 욕망을 느끼게 된다. 잠시 고개를 숙여 욕망을 추스르며 연신 오늘밤만을 기대하는 설렘을 갖게 된다. 오늘밤 그녀는 내 것이 된다. 이 명제 하나만으로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그다.
그녀가 이끈 곳은 횟집 근처에서 큰 도로를 하나 건너 서 있는 작은 빌딩 안에 위치한 커피숖이었다.
"Renaissance"라는 간판. 제법 익숙하다. 아! 기억이 났다. 예전에 동인천 어딘가에서 학교 후배를 만났던 그 장소 이름도 "르네상스"였다. 벌써 십수 년 전의 얘기지만 그래도 그의 머릿속엔 두어 시간 남짓을 팔짱 낀 후배 앞에서 별반 제대로 대화조차 시도해보지 못했던 숙맥 같았던 자신의 모습이 낡은 필름처럼 스쳐갔다.
커피숖은 빌딩 2층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낮이라서 그런지 넓은 홀에 비해 손님이 그리 많진 않았다. 유리창을 낀 구석의 자리들만 하나둘 커플들이 자리 잡은 채 가운데 자리들은 텅 비었고, 현덕은 짐짓 가벼운 손짓으로 그녀한테 아직 남아 있는 창가 쪽 자리를 향하게 만든다. 자리에 앉았다. 먼발치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아니지만 포구 안의 상가와 골목들이 드문드문 보일만큼 전망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녀도 순순히 그 자리에 함께 앉는다.
다시 그녀 얼굴을 쳐다본다. 예쁜 이목구비와 가끔 눈웃음과 함께 부드럽게 번지는 미소다. 연신 설렘에 취해 그는 제법 흥이 생기고 있음을 느낀다. "뭐 드실래요?" 현덕이 먼저 물었다.
"저는 커피요." 그녀가 답했다.
현덕은 서빙을 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불러 커피 두 잔을 주문했고, 다시 자리를 고쳐 앉는다.
"분위기... 괜찮은데요?" 그랬다. 커피숖은 제법 넓었으며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또 이런저런 소품들로 많이 가꾼 모습이다. 야트막한 책꽂이에 몇 권의 책과 잡지들도 눈에 띄었고, 음악도 제법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분위기다. 시끄럽지가 않아 일단 그는 맘에 들었다. 흘러나오고 있는 노래는 Barry Manilow의 "Ships"다. 어덜트 컨템퍼러리 장르에선 일가견이 있는 할아버지의 노래. 반갑게 느껴진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예요." 슬쩍 웃었다.
"네." 그녀도 짧게 호응한다.
"원래 저는 록을 좋아해요." 그가 짧게 말했다. 툭 던진 한마디였다.
"예전엔 게리 무어 노래를 좋아했었는데요... 최근엔 또 너바나 노래들도 좀 들었었죠."
"......"
"요즘은... 저도 잘 듣진 않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요즘 노래들을 더 자주 듣는 편예요."
그녀가 연신 웃는다. 그저 아무 말없이 둘은 또 한동안을 서로 흘깃거리며 창밖을 쳐다보곤 했다.
커피숍을 빠져나와 그는 대뜸 그녀한테 제안을 했다. 오이도에 가보자고. 몇 번 가본 적 있다고. 그녀도 좋다고 답했다. 바다가 보고 싶다고. 아직 뜨거운 여름 오후였지만 선선한 바람이 불어 걷기엔 썩 나쁘지 않을 것도 같았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향해 둘은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따가운 햇살이 후텁지근한 날씨 덕에 제법 익는 듯한 기운인 채로. 시동을 켠 후 처음으로 그녀를 조수석에 앉힌 채 현덕은 주차장 요원한테 요금을 건네고 곧 차에 오른다. 에어컨이 어느 정도 찬바람을 낼 때까지 일단은 라디오를 틀었다. 두 시의 데이트가 끝났다. 요란하게 엔딩 직전의 광고가 끝날 무렵, 레전드 특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델리 스파이스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차우차우. 이윽고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온다.
***
도착하자마자 입구부터 물씬 바다의 냄새가 느껴졌다. 오이도.
연신 손사래를 치며 호객을 하는 상인 인파를 서둘러 지나치며 현덕은 마땅히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애를 먹다 간신히 빈자리를 찾아 천천히 차를 몰아서 일단 세웠다. 차에서 내린 두 남녀는 소리치며 다시 그들을 호명하고 있는 아저씨 아줌마를 피해 곧장 방조제로 오르는 낡은 철제계단을 향했다.
계단을 오르자 드넓게 펼쳐진 갯벌 그리고 먼발치서 물밀듯 밀려오는 서해가 보인다.
그리움이었다. 연신 바닷바람이 불었다. 현덕은 무심코 앞장을 서서 걸었다. 그녀도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탓에 그녀는 연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전히 하얀 얼굴과 검은 눈빛에 눈이 끌린다. 현덕은 그녀한테 물었다.
“제법 바람이 세네요?”
“예…” 그녀가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부도까지 가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쪽은 바람이 더 세거든요.”
“아, 그래요?”
“예, 제부도에선 모자 쓰고 다니기도 쉽지가 않아요. 저도 전번에 한번 모자를 잃어버린 적이 있거든요.”
“예.” 그도 슬쩍 웃었다.
그녀도 웃는다.
둘은 천천히 바람의 쏘이며 방조제 위로 낸 산책길을 따라 먼발치로 보이는 빨간 등대가 서 있는 선착장 쪽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이는 인천대교가 희미하다. 안산과 인천이 맞닿은 이쪽 날씨는 늘 따가운 햇살에도 청명하게 맑은 풍경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한참을 걸으며 둘은 블로그와 메신저를 통해 남겼던 서로의 안부와 요즘 며칠 동안의 일상사들을 화제로 말을 바꾸어가며 친구처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지만, 정작 둘 사이의 마음 한편은 이미 이 데이트의 유한성과 절실한 목적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구하는 과정임도 저절로 깨닫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유명하다 싶을 이 빨간 오이도의 등대 앞에 도착했다.
늦은 오후라서인지 제법 사람들로 조금은 북적대는 풍경이다. 배라도 닿을 참이면 훨씬 더 많은 이들로 붐빌 법한. 선착장 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엔 언제나처럼 쭈욱 길게 좌판들이 늘어서 있다. 그녀는 그중 한 좌판 앞에 잠시 쪼그려 앉아 제법 날씨에 데운 듯한 소라고동 따위를 구경하곤 했다. 이곳에 오면 다들 관광지마다 즐비한 기념품 가게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몸짓처럼 사들이게 되는 그런 것들, 그게 바로 이 좌판에서 파는 해산물들인지 모르겠다. 현덕은 그저 말없이 한 편에 비껴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곧이어 그녀도 다시 일어나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그한테 도로 걸어온다.
“그렇게 싱싱하지가 않네요.”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런 것 같아요.”
“예…”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손을 잡은 채 말없이 등대 안에 있는 계단을 올랐다.
전망대를 겸한 2층 난간에 서서 둘은 핸드폰으로 서로의 사진을 한 장씩 찍어주고는 도로 함께 한쪽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혀 서 있다.
짝을 잃은 기러기처럼 저무는 석양은 여전히 처연하기만 하다.
그렇게 보내온 세월들도 무심하거니와 줄지어 팔짱을 낀 연인들조차 붉은 낙조만을 연신 감탄하지만 정작 석양의 우울한 몰입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 그녀가 대답을 않은 채, 웃으며 바다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 침묵의 긍정.
그도 말없이 바다를 응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않다가,
“저는 늘요.” 짧게 대답한다. 가슴이 살짝 뛰기 시작한다. 현덕은 기뻤다. 예상하고 있었던 기쁨조차 지금 이 순간은 여전히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대를 내포하게 마련인 법.
“우리, 이래도 되는 걸까 해서요.” 그녀의 짧은 독백.
“……” 대답을 안 했다. 그녀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순순히 그녀는 혼잣말을 이었다.
“제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저도요.” 그 역시 짧게 대답했다.
둘은 한참만에야 서로를 바라보다가 잠시 웃었다. 그도, 그녀도 처음으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고 있다.
***
"이제... 어디 갈까요." 나직이 그가 묻는다.
"......"
"......"
잠시 말없던 그녀가 어색함을 피할까 싶어 그는 곧장 포구를 빠져나오고만 싶었다.
"저, 잠깐만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눈치를 채어서인지 그녀는 보도옆에 서있던 한 편의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편의점에 들어선 그녀는 점원한테 몇 가지를 묻더니 몇몇을 집어 들고 한참을 있다 캔커피 두 개를 함께 들고 도로 나왔다.
차 안에 앉은 그녀의 미니스커트로 자꾸만 눈길이 쏠린다. 매력적인 다리, 그리고 그 다리 사이를 연신 훔쳐본다. 그녀도 의식을 했는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 번은 현덕과 눈도 마주쳤다. 아랑곳없이 현덕은 다시금 그녀의 다리 사이를 한번 더 응시하다가 불쑥
"보고... 싶었어요." 무덤덤히 한마디를 건넸다.
다시금 가만히 앉아 엷게 번지는 그녀의 미소.
"저도요."
현덕의 가슴 한편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길을 못내 의식 않는 체하면서 현덕의 차는 그렇게 무덤덤히 모텔촌 입구를 향해 스르르 미끄러지며 들어섰다. 이윽고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그의 다리 사이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왔다.
"사랑해요."
***
다시 차에 시동을 켠다. 이제는 귀가해야 할 시간이다. 현덕은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정오가 넘었다.
'다음에 또'라는 말. 이 한마디를 유일한 위안이자 짐으로 안은 채 그도 이제 서둘러야 할 시각. 헤어질 때 나눴던 그녀와의 마지막 키스가 생각난다. 그 뜨거운 숨결,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듯하던 그녀의 탄력적인 가슴과 봉긋하게 솟았던 유두를 연신 매만지면서 둘은 또다시 한참을 차 안에서 그렇게 서로 사랑했다.
더 이상 숨을 공간도, 숨 쉴 공간도 찾지 못한 채 각자의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시간을 아쉬워하면서. 현덕은 어젯밤 세 번의 사랑을 나누며 매번 그녀가 내뱉던 그 가녀린 긴 탄성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던 모텔에서의 시간을 또다시 떠올렸다.
서른여섯 나이가 무색할 만큼 그녀는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심지어 완벽했다. 지나치게 능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서툴지 않게 그녀는 어쩌면 남자를 만족시킬 줄 아는 능력을 갖췄다. 처음 몸을 섞기 위해 껴안았을 때도 현덕의 몸 위에서 시작된 그녀의 체위는 마치 처녀와도 같았을 설렘 내지는 낯섦과 떨림이 있던 긴장과 심지어는 일탈과 불륜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마저 그 느낌을 공유한 몸짓이라면, 두 번째의 잠자리에서 현덕이 좀 더 의도적으로 훨씬 더 깊은 곳까지 삽입을 시도하며 돌진하는 태세로 순간순간의 여운을 섞어 격정적인 사랑을 전달했을 때에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응원의 메시지로 수차례나 그의 상반신을 와락 껴안던 그녀의 소유욕과 훨씬 더 익숙하고 솔직해진 그녀만의 음성으로 희열과 애욕을 한껏 드러냈으며, 또 마지막 사랑을 나눌 때에는 비로소 그녀의 애교스러운 말투와 몸짓마저 내놓고 그의 품을 파고들며 엉겨 붙었다. 세 번째 사정을 이루기까지의 중간에는 현덕을 부드럽게 쓰러뜨려놓고 십여분 가량을 그녀의 입으로만 가능하였던 체위로 정신이 혼미할만큼 황홀한 절정과 희열을 느끼게도 해주었다.
차는 서서히 오이도역 주차장을 빠져나온다. 정왕 IC까지 가는 길은 이제 익숙하다.
다시 외곽순환도로를 찾아 고속도로에 진입할 테고, 아마도 약 한 시간 후면 현덕은 도로 원래의 일상이자 주말인 일산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토요일 오후.
서서히 도로가 붐비기 시작할 무렵, 아내한테는 회사 워크숍으로 강원도를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아마 곧 언제쯤 도착할 거냐며 전화가 올 것이다. 차창을 열고 다시 담배를 꺼내문다.
아침에 그녀가 무덤덤한 채 말했다.
“다음 주말에 뭐 하세요?”
말없이 그녀의 다음 한마디를 기다린다.
“우리... 또 오이도에 와요. 제부도는 멀고 대부도는 또 많이 붐비니 오히려 여기가 더 좋을 것 같아요.”
“네... 그래요.” 그가 대답했다.
먼 이별도 가까운 결합 역시도 그들한텐 그저 두려움일 뿐, 적당히 절절한 사랑만을 만끽하며 오히려 그들은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둘은 말없이 다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애타는 욕정도 처연한 자기애도 애틋한 상대에 대한 연민도 모두 잊은 채 그렇게 다시 서로의 몸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벌거벗은 채 유린을 당하던 그녀의 입에서 다시 탄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파요... 사랑해요.” 현덕은 쉴 새 없이 마지막 몸부림을 계속하기만 했다.
***
그녀와 현덕은 앞으로도 종종 만나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모텔이나 호텔 따위를 전전하게 될 테고 연신 몇 번씩의 사랑을 나누게 될 테다. 다만 분명한 건, 그녀는 결코 현덕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건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기에.
다시금 그녀와 걷던 어제저녁의 오이도 풍경이 눈에 밟히기만 했다.
북극곰과 두더지의 상관관계
1. 북극곰은 아직 살아 있다
텅 빈 화면.
아무 것도 있지 않음을 제일 먼저 꺼내는 여백. 고전적인 레토릭이다.
애니메이션 효과로 넘실대는 코발트빛 물결만 가득한 바다 배경 아랫쪽에 덩그러니 떠 있는 하얀 유빙 조각.
고고한 북극의 햇빛 아래 마치 그것과 한 몸인 양 둥그스레한 몸집의 네 발을 유빙에 착 붙여놓고 선 하얀 북극곰 한 마리.
형식은 우두커니 앉아 책상 밑 두 다리를 꼬며 한 평생의 시련을 담은 눈빛을 쏘아대던 누군가의 초상화를 바라보던 기분으로 화면 속 북극곰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본다.
몸집과는 달리 앙증맞기만 한 두 귀, 작고 까만 두 눈동자랑 뭉툭한 코. 그리고 반쯤 벌린 입에선 무언가를 향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듯한 표정. 이미 부모도 없고 새끼들도 없이 홀로 유빙 위를 서성대다 어느 한 사진작가의 카메라에 우연히 포착되었을 뿐. 한편으로는 귀엽기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끔찍하기만 한 장면. 저렇게 바다 위를 정처없이 헤매다 결국 유빙이 다 녹아 사라지면 무언가를 더 해볼 겨를도 없이 이내 바다에 빠져 속절없게 생을 마감해야만 할 북극곰의 가혹한 운명.
텅 빈 화면 속, 아주 작은 일부로써만 강조된 저 적막한 위기의 신호. 구도의 힘일까. 더욱 도드라진다.
디자인 면에서는 괜찮다. 온통 짙은 바다의 획일적인 면면, 거기에 자그맣고 하얀 유빙이 던져놓는 작은 분란이 낳을 상징적 효과는 첫 화면의 인트로 장면으로 어쩌면 꽤나 진부할만한 동시에 또 제법 익숙하게 흥미를 유발시키는 모종의 구석이 있을 법. 모든 매력적인 남녀가 함께 찍은 사진에서 풍기는 그 알듯 모를 듯한 부조화는 결국 어느 한 매력이 다른 한 매력에 의해 철저히 잠식을 당하게 되는 경우들인데, 미래를 예감하는 눈빛과 그렇지 못한 눈빛의 차이를 얼마나들 알고 있을까. 저 짙푸른 망망대해가 곧 북극곰의 하얀 몸을 일말의 자비도 없이 서서히 집어삼키겠지. 아직은 그걸 모르는 북극곰의 태연하고도 평화로운 눈빛. 모든 종말의 직전은 어쩌면 가장 화려한 법임을 이렇듯 일깨우는가. 인상적이기까지 하다.
눈길을 끄는 네 글자의 메시지. 기후위기.
이렇게까지만 하면 마치 복극곰 멸종위기에 관한 홍보 페이지처럼 보일 수도 있겠는데. 혼자 중얼거린다.
형식은 너무 단순하지 않나 하는 걱정부터 좀 들기 시작했다. 비즈니스용 홈페이지의 첫 화면에 달랑 바다 위에 떠 있는 유빙 한 조각, 거기에 한 마리의 북극곰 뿐이라니. 그것도 절대다수의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기업 홍보 사이트에서. 에라, 모르겠다. 살짝 염려는 되지만, 어차피 혹독한 팀장의 재가가 떨어져야 앞으로 더 진행할 수 있는 작업인 탓에 굳이 더 쓸데없는 고민들을 하진 않기로 하자.
인트로 화면은 총 세 개로 구성되었다. 맨 첫 화면이 하얀 북극곰, 그 다음 화면에서는 벌겋게 달아올라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지구의 참혹한 풍경을 담은 컴퓨터 그래픽과 기후변화를 축약해 수치화한 각종 도표들, 마지막으로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사진과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을 기업 홍보용 슬로건 문구 등이 배치됐다. 한참 유행하는 중인 ‘ESG’라는 용어도 당연히 포함시켰다. 천문학적 수치들로 표현된 기후 관련 비용들, 그 블루오션 시장에서 선점의 기회를 엿보는 무수한 거대자본들. 이런 크디큰 욕망들의 시대를 일컫는 말이자 그 총칭이 된 용어가 곧 'ESG', 즉 환경/사회/지배구조다.
자동으로 전환되는 인트로 페이지를 잠시 더 쳐다보다가 형식은 노트북에서 각종 케이블들을 도로 뺀 후 슬립모드 상태가 된 노트북을 집어들고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회의실로 이동했다. 오후 1시 50분. 2시부터 곧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다.
회의실에 조금 먼저 도착한 형식은 노트북을 다시 켜고 개발업체에서 보내준 디자인 시안을 하나둘씩 미리 꺼내놓는다. 출근하자마자 도착한 메일에 첨부된 그림파일 세개로 아까부터 혼자 미리 검토하고 있었던 것들이다. 재택근무 등으로 외부에서 접속하려는 팀원들을 위해서 화상회의 앱을 함께 켜두고 또 블루투스 스피커도 미리 연결시켜놓고선 볼륨의 크기를 적당히 맞춰놓는다. 이들을 재빠르게 준비하는 동안 팀원들도 하나둘씩 차례차례 회의실로 입장한다.
회의를 시작할 차례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비교적 짧게 진행할 텐데요. 개발업체에서 제출한 디자인 시안을 검토하는 건입니다. 우선 오늘 제공된 시안은 시작 페이지에 관한 건으로, 총 3개의 화면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번째 화면은 북극곰인데요, (화면을 켜고) 기후위기라는 키워드 하나만에 집중해 구성된 화면입니다. 두번째는 (화면은 전환하면서) 지구 온난화에 관한 이미지 컷이고, 현재의 지구가 처한 기후변화에 관한 상징적 이미지들과 탄소중립 노력에 따른 기대효과 등을 계량화해 수치들로 표현된 형태입니다. 마지막 화면은 (화면을 다시 전환하며) 당사의 슬로건 문구를 삽입해 기업홍보 차원으로만 간략히 구성된 페이지입니다. 각자 해당 페이지별로 검토해보시고 의견을 주시면 함께 정리해 업체 쪽으로 피드백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팀장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지금이 벌써 21세기인데… 아직도 '북극곰 타령'밖에 대표할만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요?
일순간 회의실 전체가 잠시 침묵에 놓인다. 이 공기, 익숙하다. 지금은 그저 다들 입 다물고 조용히 듣기만 할 차례인 분위기라는 신호다. 팀장은 항상 먼저 말을 꺼내기를, 누군가의 제지도 없이 한참 떠도는 편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아마 이번에도 역시 스스로 먼저 답을 구해놓을 게 뻔한 풍경이다.
이게… 딱히 대체할만한 또 다른 이미지들이 마땅치 않다는 게 업체 측 의견이거든요.
팀장은 잠시 듣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음… 일단 한번 다시 보시죠. (화면을 맨 앞으로 다시 전환한 후에 또 잠시 쳐다보다가) 북극곰은 전체적으로 무난해 보여요. (웬일로?) 그런데, 두번째 페이지는 기후변화를 표현한 모양새가 어째서인지 살짝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예전에 우리가 제시한 이미지랑도 좀 다르지 않나요?
우리쪽에서 제시한 이미지가 저작권법 때문에 업체 쪽에서는 아마 새로 이를 그린 모양예요.
저렇게밖에 못 그린다는 건가요?
네. 비교적 짧은 답변.
음… 알겠습니다. 넘어가시죠. (또 웬일?) 참,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는 (전환된 화면에서 맨 마지막 시안을 쳐다보면서) 음… 이건 적절한 것 같네요. 이걸로 가시죠. (다행이다!)
그러면 업체 쪽에도 그렇게 통보하면 될까요?
네. 대신에 두번째 그림은 다시 좀 더 적절한 쪽으로 재작업을 요청하시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의견 없으신가요? (계속 침묵)
그러면 이렇게 정하는 것으로 하죠.
네. 그게 좋겠습니다. (한 팀원이 팀장의 말에 대뜸 동조한다.)
그러면 이걸로 회의를 마치도록 할까요?
네. 그렇게 하시죠.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마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다들 쏜살같이 우르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형식은 주섬주섬 노트북과 케이블 등을 챙기며 회의실을 정리한 후 맨 마지막으로 퇴실하면서 불을 껐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형식은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 업체 쪽으로 통화를 시도한다. 업체 측 개발 PM은 여러 사이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관계로 항상 전화가 연결되기 힘든 편이다. 이번에도 또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마도 다른 클라이언트와 무슨 회의를 하고 있는 모양.
문자 대신에 메일을 써서 보내기로 한다.
업무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금번에 보내주신 디자인 시안들은 대해 몇가지 피드백을 전달해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전체적인 평가는 우호적인 편이며, 첫 페이지는 해당 시안 그대로 작업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두번째 화면에서의 기후변화 관련 내용을 담은 이미지는 원래 저희쪽에서 제시했던 분위기나 뉘앙스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어 혹시 가능하시다면 아예 다른 이미지 파일로 교체해주셨으면 하고요. 세번째 페이지는 OK입니다. 혹시 추가로 질문이나 요청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다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짤막히 메일을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른다.
아마도 이르면 오늘 중에 늦어도 내일까진 새로운 시안을 다시 또 받아볼 수 있겠지, 하며 형식은 이제 화면 맨 아랫쪽에 배치하게 될 간단한 문장 몇줄을 더 적어내기로 한다. 이미 초안대로 디자인 시안은 나왔음에도 문구 하나 갖고 또 별의별 재작업을 소모적이게 되풀이하곤 하기가 일쑤였던 이번 일의 특성상 미리미리 신경을 써서 조금씩 더 해놓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갑자기 또 일이 귀찮아졌다. 그새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이것도 어차피 이르면 오늘까지 아니면 내일까지만 해도 나머지 작업들은 이어서 마무리하면 또 그만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형식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입구쪽을 향했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작년까지 한 팀이었던 고혜리 과장이 복도에 서서 인사를 건넨다. 불쑥 찾아온 인사.
안녕하세요? 인사를 되받는다. 오, 오랜만예요. 친근감의 표시.
어딜 가세요?
아, 잠깐 밖에 좀 나가려고…
네, 다음에 뵈어요.
그래요.
형식은 얼른 로비로 향했다. 삼 년만에 보는 것 같다. 그동안 고 과장은 타 계열사로 파견을 다녀와 작년 말에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올해 초부턴 기업문화팀을 맡아 과장 직급임에도 팀장 타이틀을 거머쥔 사실상 엘리트 중 한 명. 아마도 임원 인터뷰 때문에 우리 층에도 잠깐 들렀던 모양이지. 출입문을 열자 사무실 바깥에 있는 로비는 온통 대리석이 깔린 이 빌딩의 시그니처 디자인이 눈앞에 펼쳐졌다. 최고급 비즈니스 빌딩에서만 누릴 수 있는 대리석의 사치.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형식은 다른 팀 소속 인원들 몇과 함께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너, 고과장님 얘기 들었어?
순간 귀가 솔깃해진다. 방금 함께 인사를 나눈 그 고혜리 과장 얘기일까.
어, 알아. 그만해.
왜? 이미 다들 알던데.
나중에.
어. 관심 없어.
후훗.
무슨 일인가 모르겠다. 다만 20대 직원들끼리 주고받는 스스럼없는 대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면 결코 우호적인 것만은 아닐 텐데, 하는 불길한 예감. 오히려 늘상 그 반대편이었으니까. 아마도 직장인 앱에서 또 누군가가 희한한 소문을 퍼뜨렸을 테지. 대개는 맞고 또 사실이었으니까 다들 수군대며 그런 가십거리들을 공유하고 즐기곤 했다. 하필이면 고과장이 엮였을까.
형식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고혜리 과장이 경력사원으로 입사를 했을 적에 팀내 멘토 역할을 맡기도 했던 형식이었어서, 나름대로는 꽤 돈독한 사이로도 지낸 편이다. 아는 지인의 이름이 직장인 앱에 그리 밝지 못한 소문으로 오르내린다는 건 여러모로 신경에 거슬릴만한 일이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맞 형식은 그들과 한두발자국쯤 슬쩍 떨어진 채로 빌딩 현관 문을 나섰다.
2023년 여름, 이미 사십 도를 예고한 서울의 폭염은 연일 계속되는 중이다.
형식이 회전문을 통과하자 순식간에 화악 몰아닥치는 서울의 낮기운이 느껴졌다. 형식은 그것을 얼굴로 힘겹게 받아내며 걸어나갔다. 피할 길이 없던 비좁은 골목길에서의 어쩔 수 없게 맞닥뜨리던 에어컨 실외기들이 내뿜는 그 습기 가득한 열풍의 불쾌함은 잔뜩 수분을 머금은 설렁탕집의 연기, 인도 출장 때처럼 지독하기만 했던 뉴델리의 밤공기와도 꽤 닮았다. 인도가 따로 없군. 몇해 전의 그 출장 이후로 형식은 이런 날씨를 맞닥뜨릴 때면 항상 비슷한 생각이 들곤 했다. 함께 다녀왔던 중동 지역의 건조하기만 했던 땡볕과는 달리 그 어떤 그늘도 도통 피할 길이 없을 찜통 같은 더위가 바로 이것이다.
형식은 스마트폰 화면을 다시 켠다. 아까 그 직원들이 나눴던 대화. 결국 출처는 직장인 앱? 그래서 형식은 느려터진 직장인 앱을 켜고 구동될 때까지의 화면만을 계속 응시했다.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연신 화면을 밀어올리며 혹시 그럴만한 게시글이 있나를 살핀다. 여럿의 게시글이 “신고에 의해 숨김 처리되었습니다.”는 안내 문구만 덜렁 남긴 채 글 제목조차 분간할 수가 없다.
누군가가 형식의 등을 슬쩍 내리친다. 뒤를 돌아보니 해외 현장에서 귀국한 한 지인이었다.
뭐하고 있었어?
어휴, 잘 귀국하셨습니까? 언제 들어오신 거예요.
지난주. 일주일 쉬고 오늘이 첫 출근이지.
고생 많으셨네요.
고생은 뭘. 들어와보니 본사가 더 힘들겠던데.
하하. 그렇긴 해요.
삼 년 전에 해외 현장에 부임을 했던 옛 기획실 선배 마동효 부장이다. 동유럽 현장의 한 프로젝트에서 현장소장을 맡았다는 건 인사발령 공지를 보고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귀국할 줄은 정말 몰랐었다. 출국 직전의 무렵에 잠시 그와 짤막한 통화를 나눴던 게 비로소 기억났다.
현장은 어떠셨나요, 삼 년 동안 계셨죠?
현장이야 뭐, 다 똑같지. 돌아와 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아무튼 귀국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잘 돌아오셨어요.
그런 걸까? 하하. 이제 노년이 문제가 되겠군.
다들 그렇죠 뭐. 똑같아요.
다음에 보자구.
네.
형식은 구설수에 올랐다는 그 얘기가 실은 마동효 부장의 조기 복귀 결정에 관한 것이었음을, 고혜리 과장이 현장 실사를 통해 현장 리더십 문제를 직접 CEO한테 따로 보고했었다는 후문을 나중에야 따로 들었다. 같은 기획실 출신들끼리, 그것도 한참 까마득한 후배였던 고 과장이 마 부장을 향해 겨누었다던 그 칼끝이 뭇 직원들한테도 꽤나 조롱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사내정치는 항상 그랬었고 앞으로도 또 계속 그럴 것 같다. 가장 가까운 지인이 내 먹잇감이 되고 어느 순간에 내 동료가 날 잡아먹는 야만의 사회. 직장질서를 이 말보다 더 생생히 표현한 적이 있을까. 정글의 법칙.
퇴근이 다가올 무렵, 초여름의 저녁 시간.
업체 측으로부터 수정된 시안이 도착하진 않았다. 아마도 내일 아침에야 새로 받아보게 될 것 같다. 형식은 다시 노트북 PC 화면에 떠 있는 북극곰 한 마리를 또 꺼내서 한번을 더 바라보기 시작한다. 첫 페이지다.
무섭다며 품에 안길 법한 부모조차 없는 채, 또 그렇게 맞서서 싸워낼만큼 용기를 내서 품을 법한 새끼들도 하나 없는 채 그저 홀로 우두커니 저 망망대해를 무섭도록 떠돌기만 할 외로운 존재. 그리고 곧 다가올, 어찌 할 도리도 없을 죽음의 운명조차 잠식해버릴만큼 철저하기만 한 고독의 무게감마저 저절로 함께 느껴지는, 새로운 풍경 앞에서 형식은 잠시 멍해진 채 별의별 생각들을 다 해본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장면인데.
워낙 자주 겪었던 경험일까. 그래서였을까. 다시 되묻는다.
코카콜라에서였을까, 아니면 설국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였을까.
애써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코카콜라는 조금 덜 슬프고 설국영화는 조금 더 슬펐지만, 적어도 대문에 걸릴만한 이미지로는 둘 다 아니지 않은가. 조금 덜 행복하다 해도 결국에는 죽음의 결말을 맞이할 차례이며, 또 조금은 더 행복하다손쳐도 어차피 결론은 바뀌지가 않는다.
북극곰은 그저 지난 시대의 공룡들처럼 멸종을 당한 개체로만 기억에 남게 될 존재일 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목적도 없이 보람도 없는 긴 구도의 여정만을 겪고 있는, 어느날 밤의 삼류 여인숙 방 안에서 옆 방의 남녀가 쏟아내는 격정을 묵묵히 인내해야만 했던 한 풋내기 승려의 적적한 모습이 저랬을까.
그건 마치 에어컨 하나 없는 꿉꿉한 독방 안에서 홀로 선풍기를 풍속 최대치로 놓고 쐬며 온종일을 라면 몇 봉지로 해결한 채 그저 헛된 필사와 습작만 거듭할 뿐이던, 그렇게 홀로 절망과 고독 속에 스스로를 파묻던 어느 여름날의 한 등단 지망생과도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지망생이 곧 자신이었음을 깨닫던 형식은 그래, 그래서 익숙했던 거구나.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아차, 하면서 이내 도로 노트북 화면을 닫는다. 노트북 전원을 서둘러 끄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짐들까지도 함께 개인 사물함에 고스란히 이동시켜야 할 자율좌석제의 퇴근시간이 갖는, 아주 익숙해진 습관이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서서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내내 형식의 머릿속엔 또 다른 문장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걸 중얼거리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막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서서히 열린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형식은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스스로한테 방금 생각했던 그 문장을 잊지 않으려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소설가는 저 북극곰과도 닮았어.
그 잔혹한 운명을 얘기해볼까.
북극곰은, 아직, 살아 있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2. 드러난 위기, 다가올 위협
이튿날 아침.
형식은 평소와 똑같게 오전 9시 20분 경에 사무실에 도착을 했고, 좌석예약 앱으로 미리 지정해놓은 사무실 맨 가장자리의 창가쪽 자리를 향해 걷는다. 자율근무제 실시에 따라 형식의 하루 일과는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해 저녁 6시 30분까지의 총 9시간으로 표준근무제보다는 삼십 분 늦게 시작해서 삼십 분 늦게 끝난다. 대개의 경우는 이름만 자율좌석제이지 실제로는 대부분 거의 매일 똑같게 앉는 자리들이 더 많은 터라 종전의 방식과 엇비슷해지곤 한다. 습관이 갖는 무서운 힘이자 특징이다.
사람들마다 제각기 선호하는 좌석의 위치나 방향, 또 좌석의 크기나 형태 그리고 보조 디스플레이의 갯수 등은 이제 어느 정도 여론을 수렴한 부분들도 많아 딱히 우열이 크진 않았다. 각자 좀 더 익숙하게 느껴질만한 자리를 선택하곤 하는데, 그건 주로 시설물보다는 좌석의 위치에 더 쏠리곤 한다. 오늘도 옆자리를 예약해둔 직원은 어제랑 똑같은 한 프로젝트 소속의 엔지니어다. 건축설계를 전공한 그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후에 형식은 이미 부산한 침묵이 한창인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도록 슬그머니 좌석에 크로스백을 내려놓고 복도 끝에 있는 개인 사물함 구역으로 이동을 해 자신의 사물함에 보관 중인 노트북과 자잘한 집기들을 함께 꺼내 좌석으로 다시 향했다. 이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좌석에 배치한 후, 비로소 노트북의 케이블을 연결하고선 전원 스위치를 켜 바로 부팅을 시작했다.
노트북의 부팅을 끝날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십여 분. 각종 소프트웨어들이 한참 실행되더니 웹 브라우저의 첫 화면인 그룹웨어 로그인 창이 뜬다. 그룹웨어에 먼저 접속하기 위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나니 비로소 첫 화면이 로딩되기 시작했다.
그룹웨어에 접속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사내 게시판을 켜서 주요 공지사항을 확인하는 일과 아웃룩에서 간밤에 도착한 메일들을 빠르게 확인하는 일이다. 지난 밤에도 각종 뉴스레터들이 도착해있고 또 오전시간에 일찍 누군가가 보낸 업무메일들도 여럿 눈에 띈다. 형식은 이들을 하나씩 재빨리 확인하면서 화면을 스크롤한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하루 일과의 시작은 이렇게 대략 30분 정도의 루틴 업무들로 마무리된다. 형식은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출입구쪽으로 향했다. 출근은 했으니 이제 모닝커피라도 한잔 하려는 참이다. 몇해 전부터 전자담배로 바꾼 뒤부터 한달 담뱃값이 거의 곱절 가량 뛰었으니 어떻게든 줄여볼 요량인데 이게 썩 쉽지만은 않다.
그런 일과보다도 사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지난 주말에 터져 나온 그룹 내 재무상태에 관한 뉴스들이었다. 그룹 내 주력 계열사들의 실적이 부진해졌고 또 각종 투자들의 성과 역시 기대에 못미친 까닭에 그룹 전체의 시가총액이 지난 한달 동안 무려 14%나 빠졌다는 증권가의 소식들이 제일 꺼림직한 내용이다. 또 한차례의 구조조정이라도 예고할 듯한 이 불길함은 수차례 동안 이 회사에 재직하면서 겪어왔던 일종의 기시감이기도 했어서다.
더구나 가장 예민할만한 소식은 다름 아닌 형식의 팀과도 관련이 있을 법한 내용인데, 자세한 내용인즉슨 그 주력 계열사 중 한곳인 프로젝트의 발주처 회사도 올해에 불어닥친 자금경색과 공급과잉 국면에 따라 당분간 모든 투자계획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는 곧 형식의 팀에서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순식간에 유보될 가능성을 더 한층 높였기 때문이다.
물론 예고된 부분들도 많았다. 이미 전통산업에 해당될 석유화학 업종의 경기 사이클이 좋지 못하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더구나 이들은 곧 ‘화석연료’이기 때문에 정부의 규제들도 잦았다. 더 중요한 건 향후 이 사업들이 아예 문을 닫을 가능성도 꽤 여러 차례 제기된 바가 있었다. 물론 당장 급격히 변화할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기업인 탓에 각종 스탭부서들이 여러 차례 조사한 결과를 보고하였고, 그 대안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는 소식도 전해들은 바가 있다.
산업의 생태계가 한꺼번에 크게 요동칠 거다.
더 이상 과거의 승자가 미래의 승자가 되리란 보장이 없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자주 들었던 담화들인데, 이토록 빠르게 피부에 와닿는 얘기들이 될 줄은 몰랐다.
형식은 전자담배 스틱을 또 하나 꺼내 다시 스위치를 켜고 피워 문다.
형식은 도로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웹브라우저의 구글 뉴스검색을 통해 수소에너지, 분산에너지 같은 키워드로 가장 최근에 올라온 뉴스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지난 한주 동안 또 얼마나 소식들이 나왔을까. 검색결과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한주 동안 제법 많은 분량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곤 한다. 중앙 일간지들부터 업계 전문 저널들까지 대략 십여 군데를 들추어 보면 개략적인 소식들은 대부분 갈무리가 가능해진다. 정기적으로 이들을 긁어 모아 사이트에 배치된 게시판에 옮겨 담는 일도 형식의 몫이기 일쑤였다.
지난 한주 동안 해당 키워드로 검색된 뉴스들은 십여개 정도가 눈에 띄었다. 대부분 얼마 전에 국회를 통과했다는 분산에너지 특별법 관련 소식들과 그에 따른 산업계 전망 등을 간단히 내비친 분석기사들이 대부분이다. 명분은 마땅하고 어차피 가야 할 방향임에도, 아직까지 매력적인 사업성을 전혀 구현할 수 없다는 게 현재 이 비즈니스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딜레마요 한계임을 이미 다들 잘 알고 있다.
다시 형식은 이번에 개발된 베타 페이지로 사이트에 접속을 했다. 관리자 전용 페이지에서 로그인을 했다. 게시판에 올릴 글과 프로젝트 소식들 또 각종 계정정보 등을 한꺼번에 관리할 수 있도록 별도로 개발해놓은 페이지다.
무엇보다 큰 관심사는 방문자 통계.
상용 솔루션을 임베드한 형태로 개발되었는데, 지난 기간 동안 사이트를 방문한 유형과 접속한 내용 및 이력을 일일이 집계하고 분석해볼 수 있는 기능들을 갖추고 있다. 형식은 지난 기간들을 각각 주 단위, 월 단위 등으로 바꿔가면서 이에 따른 방문자 통계들을 여러 차트들을 하나씩 쳐다보기 시작했다. 주 단위로는 약 백여 명 남짓한 숫자들이 주로 눈에 띈다. 일주일에 닷새 정도를 근무일로 치면 대략 하루에 스무 명 정도가 방문한 셈이다. 월 단위로도 수치는 엇비슷해 가장 최근의 숫자들과 지난 몇달 동안의 숫자들이 크게 다르지 않음도 알 수 있었다. 지난 달에 보고한 수치에서도 그리 큰 변화는 눈에 띄질 않았다.
큰일이네. 형식은 혼자서 또 중얼거린다.
사이트의 방문자 수가 이토록 저조하다면 무언가 다른 곡절이 있는 게 분명해진다. 단지 마케팅을 노골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또 오프라인 방문과 미팅들을 드라마틱하게 줄여본 적도 없었기에 이 저조한 수치들이 갖는 ‘대표성’을 아예 도외시하긴 어려웠다.
가장 큰 문제는 뭘까? 아무래도 세그먼트가 갖는 한계다.
국내의 모든 시장규모에 비해 고작 3% 남짓한 사정이 제일 큰 연유로 읽힌다. 전 지구적으로는 몇백 배 이상, 국내만으로도 이미 거의 수십 배에 이르는 크기의 시장과는 달리 분산형 에너지원이라는 특징, 50MW 발전용량 미만인 소형 기준만으로 기대될만한 시장의 크기는 크게 잡아도 전체 규모 중 20분의 1도 채 안될 조그만 규모에 불과하다.
더구나 B2B 사이트인만큼 각 회사별 담당자 숫자 역시 지극히 한정적일 뿐더러 웬만큼 흥미있을 소재를 지속적으로 유입시키지 않는 이상 한두 번 구경 삼아 방문하는 게 고작인 게 어쩌면 더 당연한 현상 같기도 하다.
그래, 세그먼트가 문제야. 어떻게 이걸 키워놓지?
상품의 유형을 더 늘려잡는 일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렵진 않다. 이미 일부 상품들은 다른 사업조직에서 한창 개발 중인 관계로 그대로 갖다 끼워도 무방할 성싶었다. 다만 고만고만한 사이즈의 세그먼트들을 굳이 한꺼번에 엮는다고 그 파이가 과연 얼마나 더 커질 수 있을까는 여전한 의문으로 남는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형식은 팀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모처럼 갖는 술자리다. 코로나 시국이 끝난 직후에야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 시내 상점들의 경기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지만, 그나마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듯 오가는 술집들마다 반가운 사람들끼리 북적대로 연신 시끄러운 풍경들이다. 형식은 소주잔에 술을 따라 혼자 원샷을 했다.
그런데 말야, 챗GPT라는 게 그리 대단해? 이건 마치 인공지능이 바로 눈앞에 와 있다는 것처럼들 말해서.
네, 당연하죠. MS가 윈도우에도 심기로 했으니 조만간 우리들 모두 각각의 개인 비서를 컴퓨터 옆에 두고 일하게 되는 셈이 될 겁니다.
그 정도야? 아직 많이 똑똑하진 않다고들 하던데.
언어모델인만큼 가르쳐준만큼만 똑똑해지니까요. 몇년 안 걸릴 것 같아요.
그래? 이거 참, 반가울 일인지 내 자리를 뺏길 불행스런 일인지도 잘 모르겠어.
둘 다일 겁니다.
그래, 하하.
얼추 술자리가 제법 몇 순번을 돌고나니 조금씩 취기가 오른다. 요즘의 회식들은 하도 일찍 끝나는 경향이 있어 오늘 술자리도 이 1차만 끝내고 각자 집으로 향히기로 정한다. 마지막 술잔.
문과장님, 저번에 그린 장표 정말 잘 만드셨더군요. 많이 배웁니다.
뭘, 그런 걸 갖고. 많이 그리면 누구나 잘 그릴 수 있어.
그런가요?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
화이팅.
그나저나 마케팅 플랫폼은 요즘 어떻습니까?
망했어
하하. 왜죠?
글쎄. 요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세그먼트가 너무 작지 않나 싶어. 국내 산업단지들의 총 갯수도 1천개가 채 안되는데 그중에서도 보일러 연한 30년을 넘은 곳들의 숫자는 훨씬 더 적을 테지.
음... 그렇겠군요.
뭘 더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세그먼트를 어떻게든 확장시킬 필요가 있어.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대형 수요처들 중 데이터센터도 있던데요? 그런 세그먼트의 시장규모도 함께 잠재적 시장으로 포함시키면 어떨까 싶습니다.
네, 맞아요. 그런 생각이지. 지금 그래서 그것까지 함께 조사를 좀 더 해보려 해.
잘하실 겁니다.
잘하긴. 혼잣말로 부인을 하며 형식은 혼자 술잔을 마저 비워냈다.
각자 퇴근을 해 집으로 돌아온 저녁.
형식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랑 김 한봉지를 꺼내든 채 TV 리모컨을 찾아 켰다. OTT로 서비스되는 곳들을 한참 검색하다가 어젯밤에 본방이 있었던 드라마를 선택하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1987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을 해 미래의 살인자를 쫓는 추리극이다. 김동욱이 주연을 맡았고 드라마의 전체적 분위기가 흡사 실제 1987년의 그것과도 꽤 닮아서 흥미롭테 지켜본 드라마였다. 졸음이 쏟아지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후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형식은 그만 소파에 드러눕는다. 안되겠어, 자야겠어. TV를 도로 끈다.
형식은 노트북 두대가 있다. 한대는 윈도우11이고 나머지 한대는 리눅스다. 리눅스의 부팅시간이 훨씬 빠르고 가벼워서 형식의 잠자리 옆엔 앉은뱅이 책상에 놓인 리눅스 노트북이 먼저 손에 잡힌다. 형식은 잠들기 전에 아까부터 생각해둔 내용을 검색해보려 노트북을 켰다. 리눅스민트의 배경화면이 금방 나타나면서 새로 설치한 구글 크롬이 실행된다. 형식은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했다.
“챗GPT 소설가”
구글은 곧장 검색결과를 쏟아낸다. 찬찬히 검색결과를 살펴보던 형식의 눈에 “인공지능의 두 얼굴, 챗GPT와 함께 소설 쓰기 과정은 이랬다”는 제목의 기사가 들어온다. “도입무 쓰는 데 3초”라는 경이적 문구도 있었지만, 직접 챗GPT를 활용하면서 창작을 해봤다는 기사가 더 먼저 끌렸다.
단편소설집을 펴낸 저자의 이름들 7명 중 한명이 ‘ChatGPT-3.5’라고 씌어 있는 책에 관한 기사다. 소설을 장면별로 쪼개 주문을 했고, 세계관 구성의 아이디어를 얻고, 등장인물 이름을 요청하는 등이었다니 놀랍긴 하네. 형식은 혼자 중얼거리며 계속 읽는다.
한꺼번에 쓰라고 하면 못 써요.
소설을 8단계로 나눠 단계별 결과물을 얻어 취합했어요.
바다에 잠긴 도시는 잃어버린 터전인데 챗GPT가 제시한 해저 도시 묘사는 경이로움 자체예요.
보조작가를 쓰는 것처럼 도움이 되죠.
언젠가는 작가들이 생성형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작업이 일상화될 수도 있다.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오랫동안 눈에 밟혔다.
3. 소래산에서 동태탕을 먹다
월요일 아침.
지난 주 목요일의 회식을 끝으로 벌써 나흘째 집안에서만 뒹굴고 있다. 금요일은 재택근무였고, 주말과 오는 현충일 사이의 공동연차까지를 포함하면 총 나흘 동안의 연휴다. 형식은 현충일 다음날도 개인연차를 써서 하루를 더 쉬기로 했다. 닷새의 연휴다. 평소 같았으면 출근을 했을 월요일 아침인데, 형식은 느즈막히 잠에서 깨 일단 세수를 하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는다. 조금 후엔 차를 몰고 이른 아침부터 카카오톡으로 일정을 미리 예고한 영근네 집으로 향할 참이다.
오늘 몇시에 만날까. 10시 가능?
그래.
그럼 내가 10시까지 도착할게.
지난번에 영근이 형식네 집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이 대략 한시간 반. 대중교통인만큼 대기시간도 길었고 버스도 구불구불한 경로를 따라 오려니 제법 시간이 걸린 편인데, 오늘 자동차로 이를 만회해볼 요량이었다. 그래도 초행길이니 넉넉히 한시간 전에는 출발을 해야겠지.
형식은 차를 타고 곧장 고속도로 IC로 향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약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수도권순환도로의 IC에 진입을 하면 금세 시원한 질주가 가능해진다. 형식은 IC에 이르자마자 곧장 차선을 바꿔가면서 두세번째 차로로 계속 질주한다. 이내 한강을 건너게 된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물결들을 잠시 바라볼 수 있는 짧은 순간임에도 재빨리 고개를 돌려 잠시나마 그 광경을 쳐다보는 일이 형식한텐 큰 즐거움이다.
영근이가 카카오톡으로 보내온 지도랑 설명을 따르면 이제 곧 차는 시흥IC를 거쳐 시흥 시내로 진입하게 된다. 이윽고 통행료를 지불한 차는 금세 시내 도로에 진입하였고, 곧이어 지도에서 보내준 위치를 찾아 네비게이터를 작동시켰다. 몇분 안에 도착한 좁은 골목에서 함께 사진으로 미리 봤던 한 식당 간판이 사진이 아닌 실물 모양 그대로 눈 앞에 보였다. 여기구나. 도착했다.
월요일 오전 일과시간인 탓인지 너무 조용한 골목, 차들조차 단 한대 이동하지 않는 한적한 골목에서 형식은 잠시 기다리다가 담배를 피워 문다. 이 놈의 담배, 이젠 끊을 때도 됐는데. 하며
아직 츄리닝 차림인 채로 영근이 나타났다. 먼발치서 슬리퍼를 끌면서 다가오는 영근한테 형식은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네. 작년의 동기모임 이후로 처음 만난 얼굴.
어떻게, 금방 왔네.
와, 고속도로를 타니 금방이네.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어.
내가 가깝다고 했잖아.
그러게.
어디로 갈까.
인천대공원 가볼래?
맞다, 그래.
여태껏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다.
인천대공원 하면 대뜸 떠올렸던 게 백범 김구 선생의 기념관이었다.
언젠가 한밤에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던 중이었다. 용산에 있는 백범기념관과는 달리 또 하나의 기념관이 인천에 있는 줄 그때까진 몰랐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로 탈출하기 전까지 지냈던 장소, 그곳이 인천이다.
형식은 그 기념비를 무려 십년여만에 처음 실물로 바라본다.
하얀 대리석을 잘게 썰어낸 듯한 활자들이 빼곡하게 비석 한가운데에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까지 모두 읽진 못한 채 그저 사진 한장만 덩그러니 담았을 뿐. 영근이가 저만치로 먼저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서 서둘러 다시 산책로를 따로 걷기 시작했다. 어? 어디로 갔지. 그새 영근의 모습이 사라져서 형식은 잠시 헤매다 휴대폰을 꺼내 영근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어, 여기 조금 더 걸어오면 보일 거야.
형식은 바삐 걸음을 옮겨 오분 가량을 더 공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넓직한 광장이 눈에 띄었다. 드넓게 펼쳐진 호수도 단번에 눈앞에 펼쳐진다. 영근이가 저쪽에서 혼자 손을 흔들며 서 있다.
원래 여기가 주출입구야.
아까부터 걸어온 통로랑은 달리 넓다랗게 펼쳐진 보행로가 쭈욱 뻗은 모양새다. 인천대공원의 주출입구가 저쪽으로 난 모양이다. 한가운데에는 영어로 “INCHEON”이라는 글자도 큼지막하게 조형물로 서 있었다.
와, 좋네.
무엇보다 맘에 든 건 드넓은 호수. 건너편에는 아직 개발이 덜 된 예전 산등성이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정경이 퍽 좋게 느껴졌다. 주변에 웬 발전소가 있을까 할만큼 고압전류가 흐를 송전선로들이 눈에 좀 거슬릴 뿐 나머지 풍경들은 썩 자연스러운 편이다. 형식은 금세 휴대폰을 다시 꺼내들고 한동안 그리 크게 바뀌지 않을 듯한 이 풍경을 고스란히 몇 장의 사진드로 담아냈다.
자, 이제 소래포구로 가볼까?
그래, 좋아.
둘이 다시 대공원을 빠져나와 차를 주차해놓은 도로를 향해 걷는다.
소래포구로 향하는 길목만큼은 자신이 있다. 해마다 적어도 한두 번은 찾았던 장소인데 막상 대학교를 다닐 동안은 단 한차례도 가보지 않았던 곳. 몇해 전의 큰 화재로 시장은 이제 새 건물로 바뀌었고 다행히 복구는 완료된 풍경이다. 해산물을 가지런히 내놓고 연신 손님을 부르던 상인들이 서 있고, 왁자지껄한 골목 어귀엔 군데군데 주린 배를 채우느라 식당마다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형식과 영근은 여러 번이나 그 골목길을 서성이다 결국 운전을 해야 하는 부담 탓에 횟집은 건너뛴 채 어느 한 생선구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메뉴는 간단했다. 온갖 생선들을 모듬식으로 섞어 구워주는 백반인데, 막 연탄불에서 구워 나온 생선들이 맛나게 생겼다. 형식과 영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밥 한공기씩을 뚝딱 해치웠다.
여기 맛있네.
그러게, 가격 대비 성능은 최고네.
원래 회를 먹을까 했는데 네가 운전을 해서.
그러게, 좀 아쉽네.
아니야, 다음에 먹지 뭐.
그래.
식사를 마치고 도로 소래포구로 나온 둘은 이제 바다가 보이는 넓은 산책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의 첫사랑이자 지금은 세종시의 한 중학교 교사가 된 그녀랑 함께 머뭇대며 그 길을 걷던 기억이 문득 또 났다. 추억은 늘 이렇듯 아픈 기억들만 호출하는 법이다. 금세 잊기로 한다. 망각은 기억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 된다.
드넓게 펼쳐진 뻘들 사이로 빼곡히 세워진 아파트들 뿐이었다. 수도권 주변에서 이제 웬만한 공터들은 온통 아파트들로 채워진다. 땅이 부족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꼭 그렇다고 믿진 않았다. 좀 더 좋은 장소들은 항상 공사중이었고, 반대로 교통이 좀 불편한 곳들은 수십년 전 모습 그대로인 채로 방치된 경우들이 훨씬 더 많았다.
소래포구를 등 뒤로 한 채 둘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이제 어디로 가? 시흥으로 돌아가야지.
둘을 싣고 자동차는 제법 미끄러지듯이 도로를 빠져나와 큰 전용도로에 진입한다. 시흥까지는 불과 십여분. 제3경인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시흥에서는 또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다. 영근이 말했다.
목감 가는 쪽으로 조금만 더 가보자.
한창 공사중인 야산이 있었고, 드문드문 새로 생긴 카페들이 제법 눈에 띈다. 아마도 새롭게 조성되는 장소인 모양이다. 영근의 안내에 따라 형식은 비포장 언덕을 조심스럽게 오르내리며 이윽고 어느 한 카페 주차장에 도착했다.
내가 인테리어를 해준 곳이야. 사장님이 잘 알아.
차에서 내린 둘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 주문을 했고, 십여 분을 기다려 커피 두 잔을 받은 다음 곧장 카페 바깥에 설치된 간이 탁자로 향했다. 주변에선 온통 시끄러운 포크레인 소리와 멀리서 개 짖는 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그리 조용한 편은 아니었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시간을 보내기엔 더없이 좋았다.
올해에만 다섯 군데 정도 냈어, 내볼 곳은 다 내봤어.
그래, 언젠간 너도 당선할 날이 있겠지. 안돼도 괜찮고.
안될 가능성이 더 높아. 다 떨어졌다고 생각해.
그래서 독립출판도 함께 생각하는 중이고.
그래, 아무렴 어때. 책을 낸다는 게 더 중요하지.
영향력은 차이가 좀 큰데, 나도 그리 생각해.
난 그것도 좋게 봐. 많고 적은 차이일 뿐이잖아.
그런데 저녁은 뭐 먹을래?
저번에 얘기한 동태탕집 가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거기가 기대만큼 대단한 곳은 아니라…
동태탕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뭐. 난 괜찮아.
그래, 동태탕집으로 가자.
영근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형식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주변은 온통 공사장 뿐인데 휴일임에도 포크레인들이 연신 흙을 퍼담아 나르는 통에 온 사방이 시끄러웠다. 둘은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차를 타고 흙탕길을 금세 빠져나와 다시 포장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널찍한 도로의 맨 끝에서 산마루 하나가 보였다. 저 산이 소래산인가 보네. 응 맞아. 둘은 잠시 소래산과 주변의 산동네들이 그려놓는 정경을 차 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원히 뻗은 도로를 달려 소래산까지 닿은 건 오래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영근네 집이 곧 소래산 기슭인 셈이다.
동태탕집은 영근네 집 근처였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내 담배를 나누어 피웠고 마치 1970년대 영화에나 나올 법한 하얀색 간판에 큼지막한 글씨로 “양원동태탕”이라고 써놓은 한 허름한 식당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저희 동태탕 3인분 주세요.
네.
둘은 구석진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함께 모이기로 한 천신은 아직 연락이 없다. 역시 휴일임에도 가장 바쁜 사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는 그도 오늘이 어쩌면 평일보다는 훨씬 더 피크치에 도달해 있으리라. 영근이 먼저 전화를 건다.
나야, 그래 몇 시쯤에 도착할 수 있겠어?
그래, 알았어.
언제쯤 온대?
어, 삼십 분 정도 더 걸린다고 하네.
그래, 그 정도면 양호하네.
둘은 반찬들과 함께 나온 물수건으로 손을 씻고 물을 한잔씩 나누어 마셨다.
TV에서 무슨 스포츠 중계 같은 걸 틀어놓은 모양인데, 다들 관심이 없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프로야구 중계였다. 형식과 영근은 둘 다 충청도가 고향이니 홈팀이라면 당연히 한화 이글스인데 한화 이글스의 성적은 해마다 맨 밑바닥을 헤매기 일쑤여서 그다지 큰 감흥이 없던 탓이다.
대뜸 도로 경제 문제를 화두로 꺼냈다.
하는 일은 좀 어때?
어, 잘 돼가고 있어. 다음달부턴 경주로 내려가.
경주로?
어, 그 회사 사장님이 경주에 있거든. 본래 직업은 치과의사래.
오, 그래?
운이 좋았던 거지 뭐, 날 좋게 보더라고.
잘됐네.
지난 한달 동안 내내 트랙터 운전하는 법 배웠는데, 이게 또 경운기랑은 아예 달라.
그래? 난 하나도 몰라.
경운기는 정말 알면 알수록 위험한 거야. 이건 막 사람도 올라타.
어휴, 그래?
일일이 그걸 제어하는 걸 빼먹었어. 누구라도 경운기 운전한다고 하면 말려야 돼.
전혀 모르던 사실이네.
천신한테서 연락이 온 모양이다. 영근이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한 후, 도착했다는 전갈을 알렸다. 비로소 문을 열고 천신이 등장했다.
와,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어, 너도.
그렇게 셋이 모여 주인 아주머니께 술잔과 수저를 하나 더 부탁하고, 곧이어 셋은 건배를 했다.
동태탕, 오랜만이네.
그래, 다들.
여기가 괜찮은 집인가 보네?
아니야. 주변에 아는 집이 여기 뿐이라.
아, 그래?
천신은 술 한잔을 들이키자마자 막 끓고 있던 동태탕을 한 국자 퍼서 앞접시에 담고 먹어본다.
맛있네.
그래?
와, 국물이 시원하네.
형식과 영근 역시 곧 한 국자씩 자기 앞접시에 동태탕을 담고 살점부터 발라 먹기 시작한다.
형식은 곤이를 좋아한 편이어서 대뜸 접시에 담긴 곤이붜 살짝 집어 입에 넣는다. 살짝 고소한 냄새와 함께 입 안에서 곤이를 씹는 동안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입 마셔본다. 아주 익숙한 맛이 금세 입 안에 퍼졌다. 언제 먹어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맛이 대뜸 반갑다. 이제 동태살을 먹을 차례다. 젓가락으로 부서지지 않게 조심스레 살점을 떼어내 한가득 입 안에 넣는다. 푸석푸석하면서도 향긋한 동태의 속살이 입 안에 대뜸 군침을 고이게 만들었다. 맛있다.
오길 잘했네.
그러게.
얼른 먹어 둬. 이제 일본놈들이 동해에 핵 폐기물을 방류하면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뭐, 동태탕 뿐만이 아니지만.
순간 다들 말이 없어진다. 상식적이지 못한 일들이 세상엔 너무 많이 벌어지기 때문일 거야. 형식은 혼자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더는 말을 않고 동태의 살점 하나를 입 안에 넣는다.
그렇게 셋은 잠시 대화를 생략한 채 아낌없이 동태탕을 나누어 먹었다. 뜨거워 입김을 호호 불면서도 큰 양푼을 올려놓은 버너는 끄지 않은 채 계속해서 김이 모락모락 나게 만들었다. 연이어 술잔들이 오가고 금세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천신이 먼저 물어봤다.
그래서 경주는 언제 갈 건데?
어, 원래 다음 주초에 가려고 했는데 좀 늦어질 것 같아. 내달 초.
그래?
천신은 영근과 몇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훨씬 더 세세히 사정들을 알고 있었다.
저쪽에서 기숙사 문제가 아직 해결 안된 모양이야. 그래서 좀 기다려야 해.
그래. 아무튼, 가서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이제 사장님이 되겠네.
아직은 아니지.
그래도 기술을 배워 창업한다는 게 어디야. 나도 빨리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뭐라도 빨리 터득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
맞아.
형식도 중간에 거들었다. 회사에서도 일과시간 때마다 불쑥불쑥 불안해 하던 감정들이 결국 해법으로 제시한 건 어서 이 희망고문을 탈출하기 위한 방편이요 그건 곧 무언가라도 자격을 얻어 스스로 사업을 하는 방편 뿐이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는 요즘 좀 어때?
늘 그렇지 뭐. 요즘은 무슨 사이트를 만드는데 사업이야 나중을 보고 하는 거니까 크게 문제는 안되는데 당장에 수주가 잘 안되고 지금 사이트도 방문자가 턱없이 모자라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 중…
그래? 우리라도 사이트를 하루에 한 번씩 방문해줄까? 하하.
빙그레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도통 사이트에 방문을 안하는데 이걸 무슨 수로 홍보하지?
천신이 대뜸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사이트 방문 수가 저조한 건 사이트 문제가 아닐 수 있지 않아? 그 사이트가 담는 내용이 와닿지가 않아서 그럴 수 있다고 봐. 나도 예전에 학원 홈페이지를 개설했는데 유사한 다른 학원 홈페이지도 그렇고 거의 방문자가 없었거든. 학원 홈페이지라는 게 뻔하잖아. 볼 게 없다는 거지.
그런가?
가뜩이나 볼 것 많은 세상인데 재미없는 사이트를 굳이 왜? 이럴 걸.
음… 맞는 말이네.
그럼 어떡하면 돼?
글쎄, 내 경우는 일단 좀 더 아이템을 확장해보면 어떨까 싶어. 학원 홈페이지도 처음엔 내가 가르치는 과목 위주로만 신경 썼었는데 나중에는 아예 종합학원처럼 모든 과목을 다 섹션별로 나누고 거기에다 과년도 기출문제집을 함께 올렸더니 서서히 반응이 오더라고. 지금은 처음 열었을 때보단 대략 서너 배쯤은 더 방문자가 많아졌어.
그래? 그게 중요하겠네. 아이템 확장.
응. 아무래도 아이템이 풍부한 게 오가는 사람도 많아지지.
나도 회사에다 그런 비슷한 얘길 한번 해봐야겠네.
아무래도 B2B면 더더욱 아이템의 확장성이 중요하지.
맞아, 나도 예전에 인테리어만 따로 운영하니까 그다지 많이 않았었는데 각종 시공이며 견적 같은 걸 함께 메뉴로 구성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
그래, 알았어. Thanks.
문득 다시 동태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동해 바다를 한없이 자유롭게 헤엄치던 명태들이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하나둘씩 차츰 없어지더니 이젠 아예 우리나라 영해에선 잡히지도 않고 북극해 인근으로까지 죄다 밀려났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얘기도 무려 십수 년전의 얘기다. 우리들의 식탁 위에 오르는 동태들도 대부분 북유럽 인근에서 잡힌 고기들이라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됐다.
하물며 수온 하나 때문에도 그렇게 쫓겨난 명태들인데 이젠 아주 핵 폐기물이 담긴 끔찍한 조류가 러시아 인근까지를 침범해 그들을 또 어디까지 몰아낼 것인지도 더 이상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다. 더구나 그 혹독한 환경에서 용케 살아남았다손쳐도 결국 식탁 위의 정겨운 반찬과는 영 거리가 먼 흉물스러운 존재로만 남게 될 공산이 더 커졌다.
그런 생각들을 좀 하다보니 대뜸 술부터 당기게 된다. 형식은 다시 소주잔을 집어들고 단숨에 삼켰다.
내일은 다시 출근하는 날.
다들 일찌감치 자리를 파하자면서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형식과 영근은 함께 식당 밖으로 나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해 식당 가장자리에 있는 처마 끝에 나란히 섰다. 형식은 전자담배를 한 개피 끼워 물었고 영근은 연초로 된 담배를 하나 꺼내서 불을 붙였다. 매캐한 냄새가 공기 안에 퍼진다. 비가 점점 더 거세게 내리는 밤이다.
내일은 쉰다고 했지? 그럼 모레 출근하겠네.
그렇지.
다음엔 또 언제나 볼까?
글쎄. 일정을 누가 잡아줘야지.
어디로 함께 놀러갔으면 좋겠다.
그러게. 매번 시내에서 만나니까 추억 같은 게 잘 없어.
다음엔 꼭 한번 만들어보자고.
그래.
자리를 파하면서 천신이 밥값을 모두 낸단다. 다들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음에도 천신이 끝까지 자긴 이제 경주로 가서 돈 벌면 된다면서 오늘은 오랜만이니 자기가 쏘겠다고 말해 다들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가볍게 한잔 더 하자는 말이 좀 부담스러워 주변을 살피다가 커피 한 잔은 어떨까 하고 물었더니 다들 좋단다. 그래서 일행 모두 인근에 있던 한 커피숍으로 향했다.
술기운이 적당히 오른 터라 커피숍에서는 가벼운 음악을 함께 듣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빨대를 빨아먹으면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몇 마디 둘씩의 가벼운 대화들이 오갔고 정치 얘기는 빠지지가 않았다. 커피 한 잔을 다들 마신 후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보자.
그래, 경주에서 잘 지내고.
한번 놀러가겠다는 얘긴 못했다. 너무 멀기도 하고.
두 달 후면 다시 올라와. 그때쯤에 다시 봐.
그래.
다들 손을 흔들며 서로를 배웅했고, 비를 피하면서 옹기종기 우산들 속으로 숨었다. 형식은 슬리퍼를 끌면서 다시 영근과 함께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럼 내일 돌아가겠네?
어, 괜찮아. 난 내일도 연차니까.
그래, 오늘 잘 먹었고. 잘 쉬어.
응.
집에 도착한 영근과 헤어진 형식은 이제 혼자 나머지 골목길을 마저 걷는다.
영근네 집 앞에 세워둔 차를 잠시 쳐다본 후 좀 더 큰 길이 있는 골목까지 더 나아갔다. 주변은 아직 가로등이 환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탓인지 오가는 행인들은 눈에 띄질 않는다. 먼 발치에 여관 간판 몇이 보인다.
형식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여관을 찾았다. 숙박비를 지불하고 3층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형식은 옷을 벗고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를 한 다음 이내 침대로 향했다. TV를 켜니 예전 드라마를 다시 방송하고 있었다. 드라마를 켜둔 채로 형식은 방 안에 비치해둔 PC를 켰고 인터넷에서 다시 블로그에 접속했다.
아무래도 아까 생각하던 동태 이야기를 한번 써보기로 한다. 제목은 뭐라고 할까. 동태를 걱정하는 건가? 그렇다면 ‘동태의 안부’는 어떨까. 형식은 내키는대로 이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태의 안부
알, 애, 곤이를 한가득씩 넣고
미나리, 쑥갓, 무랑 함께 끓이면
모양도 맛도 그야말로 일품이었지
다섯살 때부터 먹었던 동태눈깔
그 진주색 작은 구슬은 왜 먹었을까
이젠 희귀해졌는데
좋아하는 음식들도 가지가지인데
노가리며 북어, 코다리, 황태는 한가족
아빠며 엄마며 딸, 아들 구별도 없이
십년만에 화정역 앞 동태탕을 끓여
시흥에서 종로3가를 거쳐 겨우 당도한
친구들과 함께 먹는다
러시아해를 거쳐 일본인들한테 잡혀
겨우겨우 술상 위에 놓인 여정이
한 세기가 저물었음도 알려
어쩌면 더는
노가리며, 북어, 코다리, 황태도 못 먹고
이별을 고해야만 할 시대
동해바다에서 잡히던 명태들이 좋아
얼리지 않아도 동태탕이라 부른
이 놈의 미련, 왜 또 질겨
명태들아,
동태들아,
생태들아, 안녕하냐
등 굽으면 안돼
곧 구하마
버텨 봐
정부 측 시찰단이 후쿠시마 오염수 무단방류를 선포한 일본에서 귀국했다는 2023년 오월의 마지막 주말, 그 시점을 생각하면서 형식은 동태에 관한 시 한 편을 썼다.
4. 두더지의 가능성을 찾아서
새로운 아침. 연차의 마지막 날.
형식은 이른 아침부터 몸이 불편해 잠을 깼다. 술을 마신 다음날 새벽이면 의레 겪는 일이다.
여관 한 구석에 놓여 있던 커피포트의 물을 끓여 인스턴트 커피를 한잔 타서 마신다. 여전히 속은 더부룩하다. 찬 물도 두 컵 정도를 마셨다. 그랬더니 조금은 나아진 듯하다. 어젯밤에 사다 놓은 컵라면 하나에 물을 붓고 또 몇분을 기다려 이내 흡입하듯 뚝딱 해치웠다. 이제야 속이 한결 좀 낫다고 느꼈다. 밖은 아직 캄캄한데, 오가는 자동차 소리는 몹시 시끄럽다.
형식은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챙겨 입고 일찌감치 여관을 나섰다. 밖에는 어젯밤에 그대로 놓아둔 차가 서 있고 형식은 이내 차에 올라탔다. 묵직한 시동이 걸리면서 차는 다시 골목길을 빠져나와 곧장 큰 도로를 거쳐 다시 고속도로 IC에 진입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형식은 라디오를 듣는다. 새벽에 듣는 오래된 가요들은 형식의 입을 연신 흥얼거리게 만든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어제 오늘 그리고. 하늘색 꿈. 잘못된 만남. 아침의 노래들치곤 제법 시끄러운 편이었지만 형식은 다 아는 노래들이 나온다는 게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수도권순환도로를 질주해 다시 한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먼발치로 보이는 행주산성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아침 햇빛을 받아 온 물결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한강의 풍경을 차창 밖으로 잠시 쳐다보곤 곧장 자유로를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속도로 자유로를 잠시 질주하니까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일산신도시의 모습. 호수공원을 가로지르는 장항IC를 통해 시내로 진입했다. 호수공원의 아침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십오년째를 살고 있는 도시임에도 이 정경은 항상 그립기만 하다.
형식은 이윽고 집에 도착했다.
날짜를 세어보니 오늘이 6월 6일, 현충일이다. 나흘짜리 징검다리 연휴의 맨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내일은 마지막 연차, 그리고 모레부턴 또 다시 출근이 시작된다. 연휴를 마무리하려면 또 많은 것들을 정리해야만 한다. 옷가지며 밀려 있던 일들이며, 아직 반납하지 못한 도서관 책들까지 한꺼번에 해치우려면 하루가 촉박하기만 하다.
샤워를 하고 방안에서 도로 인터넷을 켜서 두더지에 관한 백과사전을 찾기 시작한다. 두더지, 두더지 하면 어렸을 적부터 자주 입에 오르내릴 친숙한 이름인데도 도통 이 동물에 관한 습성이나 특성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온라인 백과사전부터 찾아 읽기 시작한다.
중세 국어에서는 ‘두디쥐’로, 또 근대 국어에서는 ‘두더쥐’로 불리던 이 동물은 그 어원이 ‘뒤지다’의 중세 국어인 ‘뒤디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땅을 헤집고 다니면서 지렁이, 벌레 등을 잡아먹고 사는 쥐를 닮은 동물. 온통 인터넷을 헤집고 다니며 온통 조악한 노래, 조악한 시편들 뿐인 세상을 바라보며 내밀지도 못한 제 시를 움켜쥔 채 하얗게 밤을 새운 덧없는 존재들. 시인이다.
형식은 두더지가 꼭 무슨 시인을 닮았다는 생각마저 문득 들었다. 에이, 아니지. 낮에도 부지런히 시를 쓰는 시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데. 스스로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은 후, 다시 두더지에 관한 문헌을 계속 읽어낸다. 평생 땅을 파고 살아야 하니 발톱은 무척 날카롭고 애초에 시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삶을 살기에 낮에는 밖을 돌아다니지 않는 습성을 가졌다고 한다. 천적으로는 뱀과 매, 수리부엉이 등으로 땅속이거나 땅밖에서 잡아먹힌다고도 한다. 시인들의 천적은? 독자가 아닌 비평가들 뿐이다.
형식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북극곰이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기어들어간다면? 더 오래 살 수도 있진 않을까?
북극곰 역시 놀라운 발톱을 갖고 있으니 이를 이용해 땅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면 날씨가 더운 대륙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지 않은가.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두더지는 과연 무사할까?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형식은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문헌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온다.
-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의 동물행동연구진에 따르면 유럽의 두더지는 겨울에 두개골과 뇌를 평소 크기의 11% 정도 축소합니다. 그러다가 여름이 되면 다시 4% 정도를 되돌립니다... (중략) 연구진은 뇌처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에너지 집약적 조직’을 축소시켜, 각 동물이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중략) 데크만 박사는 “단순한 음식 문제라면 식량이 부족한 겨울에 유럽 두더지의 뇌가 줄어들고, 극심한 더위와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한 여름에는 이베리아 두더지의 뇌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오스트레일리아 커틴대학교 연구진은 가시두더지가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 ‘콧물방울’을 만들어 낸다고 과학저널 ‘바이올로지 레터’에 지난 18일 발표했다... (중략) 관찰 결과, 가시두더지는 콧물로 방울을 만든 뒤 그것을 터뜨려 코끝을 적셨다. 콧물이 증발하면서 피부 아래 순환하는 혈액의 열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다른 신체부위보다 코끝의 체온이 10℃ 정도 낮게 측정됐다… (중략) 환경생리학자 크리스틴 푸커는 “지구가 온난해짐에 따라, 가시두더지의 독특한 열 방출 방식이 얼마나 많은 열을 배출할 수 있는 지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럽의 두더지들은 혹한을 극복하기 위해 두개골의 부피를 줄여 신진대사율을 낮추고 에너지를 유지하는 반면에, 호주의 가시두더지*는 무더위를 견디기 위해 섭취와 움직임을 줄이고 서늘한 동굴 안에서만 지낸다는 얘기는 두더지라는 동물이 혹한과 무더위를 모두 극복하기 위해 정반대의 신진대사를 취할 가능성도 있음을 내비치는 대목들이다. 형식은 흥미가 더 생겼다. 두더지는 추위와 더위를 모두 극복할만한 재주를 가졌구나. (*주: 가시두더지는 단공류 생물로 알을 낳고 배꼽도 없다. 외양 탓에 이름만 빌렸을 뿐이다.)
서늘한 땅 속에서 기거하는 두더지의 삶에서 어쩌면 북극곰의 운명을 조금이나마 유예시킬만한 방편을 찾고팠는지도 모른다. 북극곰한테도 두더지의 생활양식을 보고 배우라고 알려주는 게 어떨까? 영영 그렇게 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최소한 그 무슨 방편이라도 마련할 시간만큼은 지금 그대로 좀 버텨주면 좋지 않을까 해서. 마치 어젯밤에 안부를 묻던 그 동태들처럼.
지난 주말에 한 출판사에서 주최한 신인문학상 발표 소식이 있었다.
형식은 다시금 인터넷 창에서 해당 출판사의 홈페이지를 찾아 접속한다. 우리나라에선 제법 큰 대표적인 출판사 한곳이다. 해마다 이 출판사가 주최한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작가들도 꽤 많아 어느덧 당대의 주류로 자리잡은 이름들도 여럿 있었다. 당선작과 당선소감, 심사평을 가지런히 배치한 웹페이지을 찾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곱씹어 읽을수록 충분히 수긍할만한 속깊은 문장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형식은 이들을 다시 또 읽었다. 그리고 생각을 해본다. 이 좋은 문장들이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심사평의 맨 끝에 추천해놓은 올해의 당선작은 심사평을 무색케할만큼 전혀 패기만만하지도 않은, 현실에 대한 일말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몇몇 기성 시인의 영향을 쉽게 떠올릴 법한 정도의 어중간한 작품이었을 뿐이지 않은가. 결국 달라진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북극곰 얘기처럼.
형식은 도로 웹페이지의 창을 닫았다. 결국 그들만의 리그일 뿐.
올해는 더 늦지 않게 출판을 결행할 계획이다. 형식은 다시 습작노트를 꺼냈고 올해에 써놓은 습작들의 목록을 찬찬히 살폈다. 아직 습작량은 좀 부족해 보이지만, 연말까지를 예상하면 충분히 책 한 권을 낼 수 있을만한 분량이다. 형식은 올해 드디어 첫 책을 출간하기로 한다. 독립출판.
그래봤자 이런 일들이 근본적 ‘대안’은 아님은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없다면, 당장 그 어떤 해법을 내놓기도 힘들다면, 어쩌면 이런 식의 ‘유예’가 좀 더 나은 경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안타 대신에 번트다. 대신에 타구의 궤적 따위가 아닌 엉뚱하게도 타자의 속력이 훨씬 더 중요해지는 희한한 문제가 될 것 같다.
북극곰은 결국 멸종하게 될 것이다. 그 시한도 점점 더 가까워져 이제 더는 늦출 수도 없는 문제가 돼버렸다. 북극곰이 이토록 처참히 멸종을 맞는 동안 과연 인류는 어떤 노력을 해왔을까. 수많은 이들이 이를 지적해왔고 또 뜻있는 이들이 제법 꾸준하게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결국 한 영장류가 한 포유류를 거세하는 이 잔인한 운명을 피할 도리는 더 이상 없게 됐다.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충분하게 살육적인 그 과정까지만을 과학의 역사에 담담하게 남겨놓게 될 것 같다.
더 이상 등단이라는 제도가 작가의 운명을 결정짓지 못한다. 물론 지구상에도 몇 남지 않은 이 희한한 문화적 전통, 그동안 숱한 작가들이 혹독히 비판해온만큼 대다수의 기성 작가들이나 제법 영향력을 갖는 출판사들 역시 어떻게 하면 보다 더 건강한 요람이 될 수 있나를 역력히 고민해온 시절들이긴 했다. 하지만 결국 드라마틱하게 줄어든 독자들, 그 외면을 끝끝내 버텨내기엔 너무나 남루해진 옛 관행들, 몰지각하고도 몰염치하기 짝이 없을 퇴행적 행태 등도 버젓이 살아남았고 또 그런 것들이 어쩌면 무언가를 질식시켜온 주범이자 일련의 지배구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결코 짧은 시간 동안에 품은 속단이거나 회의, 조바심 끝에 고작 얻었던 열패감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유예’일 뿐이니까. 비로소 해법을 찾아낼만큼 또 다른 세상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는 사실도 이미 어느 정도는 터득했으니까. 그래서 끝끝내 지켜낼 무언가라도 존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순 있으니까. 그렇게 선택된 경우일 뿐이니까.
형식은 도로 습작노트를 켠다. 빼곡히 적힌 습작들의 목록 중에서 소설 챕터를 열었다.
그동안 써놓았던 게 어느 정도였을까를 한참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제 다시 천천히 키보드에 손가락들을 가지런히 놓기 시작한다. 제목을 우선 써놓는다. 북극곰을 닮은 소설가와 두더지를 닮은 시인. 둘 다를 합친 제목을 짓겠다면? 북극곰과 두더지의 상관관계. 생뚱맞은 두 동물의 상관관계는? 전혀 없어도 무방하다. 첫 문장이 항상 중요했다. 상관관계의 수준을 상기할 단어들을 먼저 떠올리며. 시작해보자.
텅 빈 화면.
새로운 창작.
에필로그
- 벚꽃, 종로학파
부끄럽다. 책을 펴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그래도 계속한다. 부끄러워서 글을 쓰는 셈이다.
산문의 시대에 정작 산문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부지런해야겠다.
정독도서관에 활짝 핀 벚꽃들을 보면서 문득 예전이 그리웠다.
2024년 4월 6일 (토)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발행일 : 2024년 4월 10일
지은이 : 연분홍, 연초록
출판사 : 퍼플
출판등록 : 제 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 1544-1900
홈페이지 : www.kyobobook.co.kr
ⓒ 연분홍, 연초록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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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발행일 : 2024년 4월 10일
지은이 : 연분홍, 연초록
펴낸이 : 한건희
펴낸곳 : 주식회사 부크크
출판등록 : 2014.07.15 (제2014-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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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분홍, 연초록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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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국판 (초판, 퍼플 2024) : A4 배율 100%, 좌우/상하 여백 30mm (Resized, to New A5)
※ 국배판 (초판) :
※ 국판 (초판, 부크크 2024) : A5 배율 75%, 좌우/상하 여백 20mm (Origi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