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319

황병승,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 (아젠다)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오후 빛바랜 작업복 차림의 한 늙은 선로공이 보수를 마치고 선로를 따라 걷고 있다 앙상한 그의 어깨 너머로 끝내 만날 수 없는 운명처럼 이어진 은빛 선로 그러나 언제였던가, 아득한 저 멀리로 화살표의 끝처럼 애틋한 키스를 나누던 기억 보수를 마친 한 늙은 선로공이 커다란 공구를 흔들며 선로를 따라 걷고 있다 #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문지, 2013) ... 아젠다 : 21세기 들어 경영학 분야의 최고봉 중 한 명이자 일명 'BPR'의 창시자이기도 한 MIT의 마이클 해머 교수가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새로운 책을 들..

문학노트 2025.05.23

김수영, '책' (좋아하는 시인)

책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 김수영, 오랜 밤 이야기 (창비, 2000) ....

문학노트 2025.05.20

한강, '소년이 온다' (5•18 45주년 아침)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 (창비, 2014) ... 5•18 45주년 아침 : 한강 작가가 "아물지 않는 기억"이라고 쓴,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라고 쓴, "수없이 되태어나 ..

문학노트 2025.05.18

김수영, '절망' ('쿠데타'와 '희망' 그리고 '사랑')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김수영 전집 1 (민음, 1981) ... 쿠데타와 '희망' 그리고 '사랑' : 1981년에 출간돼 초판으로 63쇄를 찍었던 1권에 실렸던 시가 모두 합쳐서 177편에 불과합니다. 시인에 대한 출판사의 애정도 참으로 대단했어서 이듬해인 1982년에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으며, 시인의 육필원고들까지 모두 다 합..

문학노트 2025.05.16

이다희, '시 창작 스터디' ("스승"이라는 말)

시 창작 스터디 토스트를 사먹다가 알던 선배와 마주쳤다. 다희야 내가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린데 시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나도 예전에 시 진짜 열심히 썼거든. 너도 알지? 나는 적당히 대답하면서 토스트를 먹는다. 오늘 점심은 차라리 굶을 것을. 굳이 먹겠다고 내려와서 선배랑 마주쳤다. 다희야 소문 들었어. 그 형이랑 왜 헤어졌어? 아니 욕하지는 말고...... 네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 선배는 토스트를 먹는 입으로 자꾸 내 근황을 물어본다. 나는 선배가 그냥 토스트만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 처음부터 네가 아깝다고 생각했어. 나는 앞으로 볼 일 없으니 그냥 참자고 생각했다. 다희야 오빠가 하는 말 다 시 이야기거든.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그리고..

문학노트 2025.05.15

고정희, '강물' (스승, 한글, 오월)

강물 - 편지 1 푸른 악기처럼 내 마음 울어도 너는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암울한 침묵이 반짝이는 강변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종일 정결법 논쟁으로 술잔을 비우고 너에게로 가는 막배를 놓쳐버린 나는 푸른 풀밭, 마지막 낙조에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이름과 비구상의 시간 위에 쓰라린 마음 각을 떠 널다가 두 눈 가득 고이는 눈물 떠나가는 강물에 섞어 보냈다 # 고정희, 지리산의 봄 (문지, 1987) ... 스승, 한글, 오월 : 내일이 스승의 날입니다. '겨레의 스승'인 세종대왕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지도 이제 꼭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 가지 의미를 덧붙이자면,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이 창간을 한 날이기도 합니다..

문학노트 2025.05.14

백아온, '디스토피아' ('한강' 신드롬을 낳은 신춘문예)

디스토피아 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 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쇼윈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 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고 믿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고 ..

문학노트 2025.05.12

오은, '1년' (<루틴>에 얽힌 소회)

1년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이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 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 줄 ..

문학노트 2025.05.11

김용희, '<구인> 광명기업' (21세기의 노동시)

광명기업 외국인 친구를 사귀려면 여기로 와요 압둘, 쿤, 표씨투 친해지면 각자의 신에게 기도해줄 거예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글로벌 회사랍니다 요즘은 각자도생이라지만 도는 멀고 생은 가까운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해요 매운맛 짠맛 단맛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성실한 태양 아래 정직한 땀을 흘려봐요 투자에 실패해 실성한 사람 하나쯤 알고 있지 않나요? 압둘, 땀 흘리고 먹는 점심은 맛있지? 압둘이 얘기합니다 땀을 많이 흘리면 입맛이 없어요 농담도 잘하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봐요 쿤과 표씨투가 싱긋 웃습니다 서서히 표정을 잃게 되어도 주머니가 빵 빵 해질 거예요 배부를 거예요 소속이란 등껍질을 가져봐요 노동자란 명찰을 달아주고 하루의 휴일을 선물해 드릴게요 혼자 쌓고 혼자 ..

문학노트 2025.05.10

윤후명, '소설가 Y씨의 하루' (글이라는 숙명에 관하여)

소설가 Y씨의 하루 소설가 Y씨는 예전에 시를 썼다고 한다 요즘은 안 쓰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를 알고 있다 꽃을 가꿔 식물학자 흉내도 내고 술을 마셔 고래 흉내도 내며 세상을 거꾸로 보려 하지만 사랑이 그를 가로막는다 아무리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가도 사랑이 바로 보라고 꾸짖기 때문에 그는 늘 불안하다 그래서 꽃 피면 꽃 지면 한잔하자고 누구에게나 보챈다는 것이다 소설가 Y씨는 예전에 시를 썼다고 한다 헛소문일지도 모른다 # 윤후명, 쇠물닭의 책 (서정시학, 2012) ... 글이라는 숙명에 관하여 : 윤후명 시인께서 작고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 꺼내놓는 ..

문학노트 2025.05.09

안수현,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오월을 시작하며)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

문학노트 2025.05.07

김소연, 'i에게' (어린이날, 초파일, 입하)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지난겨울 죽은 나무를 버린 적이 있었다. 마른 뿌리를 흙에 파묻고서 나무의 본분대로 세워두었는데. 지난겨울 그렇게 버려지면 좋았을 내가 남몰래 조금씩 미쳐갔다. 남몰래 조금만 미쳐보았다. 머리카락이 타오르는 걸 거울 속으로 지켜보았고 타오르는 소리를 조용히 음미했다. 마음에 들었다. 실컷 울 수도 실컷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끝까지 울어보았고 끝까지 웃어보았다. 너무 좋았다. 양지에 앉아 있었을 때 웅크린 어느 젊은이에게 왜 너는 울지도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젊은이의 눈매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더라. 그건 분명 돌멩이였다. 우는 돌을 본 거야. 그는 외쳤어. 미칠 것 같다고! 외치는 돌을 본 거야...

문학노트 2025.05.05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절망'과 '희망' 사이의 한 섬)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 김수영, 같은 제목의 시집 (창비, 1996) ... ..

문학노트 2025.05.04

허연, '작약과 공터' ("책임을 진다"는 용기)

작약과 공터 진저리가 날 만큼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비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아이의 허기 만큼이나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계절 작약은 울먹거림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에는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공터 밖으로 전해지면 너무나 평범해져버리는 고요 때문에 작약과 나는 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 놓았다 작약을 가만히 ..

문학노트 2025.05.02

박준, '설령' (노동절 아침에 꺼내는 시)

설령 열까지 다 세고 나면 다시 하나둘 올라야 합니다 설령 높고 험하다 해도 딛고 있는 바닥부터 살펴야 합니다 낮고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걸음을 옮깁니다 다만 이후의 시간에 관해서는 얼마간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어차피 나의 기억과 나의 망각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채 닫지 못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들만을 적기로 합니다 "우리는 목소리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닮아간다" "서리고 어리는 것들과 이마를 맞대며 오후를 보냈다" "흙과 종이와 수선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장 하나의 글로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다가오는 계..

문학노트 2025.05.01

안희연, '율마' ('신서정' 또는 '서정시'의 새 시대)

율마 창가가 환해졌네, 말했습니다 그가 나를 처음 이곳으로 데려오던 날이었습니다 율마는 측백나무과에 해당됩니다 강한 빛을 좋아하며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지요 어린나무일수록 물을 더 자주 주어야 합니다 그는 동봉된 메모를 꼼꼼히 읽으며 내 앞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하루를 지켜봅니다 잠에서 깨어나 상을 차리고 먹다 만 밥을 치우고 티브이를 보다 다시 잠드는 생활입니다 그는 좀처럼 외출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에게 발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아주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것 외엔 미동도 없습니다 물과 햇빛이 필요한 건 오히려 그쪽인 것 같습니다 나는 알지 못합니다..

문학노트 2025.04.29

곽재구, '도솔암 풍경' ('올드함'을 읽는다는 일)

도솔암 풍경 칡꽃 향기 달빛 쏟는 선운사 도솔암에서 하룻밤 비럭잠을 잤습니다 밤늦게 최승자의 시집을 읽는다는 처녀보살은 광주에서 왔다는 말 듣고 어쩐지 내 행장에 최루탄 냄새 나더라고 웃었습니다 지장보살도 산 아래 내려가면 최루 가스에 울먹일 것이라 말했더니 방금 친 인절미 한 접시 따뜻하게 내왔습니다 밤 깊어 머슴새 울음 잠들고 창문 열면 노오랗게 불 밝힌 선방 하나 계곡물 소리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 곽재구, 서울 세노야 (문지, 1990) ... '올드함'을 읽는다는 일 : 곽재구의 오래된 시집 한 권을 읽었습니다. 데뷔작인 '사평역에서' 한 편만으로 '대표작'이라는 수식어를 대체해도 될 만..

문학노트 2025.04.27

윤지양,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사월의 마지막 주말)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신의 시간 안에 들어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너바나 음악이 흐른다. 인간의 시간은 바퀴와 함께 굴러간다. 신의 시간은 차창 밖에 있다. 호흡이 길다. 막 지나온 공연을 떠올렸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향해 조명이 비춰지는 시간.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현을 조율하고 첼리스트 두 명이 만담을 나누었다. 이전에도 신을 생각한 적은 있지만 무엇으로 태어나는 것일까? 플루트가 금빛으로 빛났다. 지휘자는 폴짝 폴짝 뛰기도 했다. 사람들이 중간에 기침을 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기침을 했다. 어떤 사람은 발작처럼 튀어나왔다. 기침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보았던가. 또 다른 사람이 뒤..

문학노트 2025.04.25

김이강, '안국 너머, 공예 박물관, 비는 내리지만' (무의미한 반복과 유의미한 성찰)

안국 너머, 공예 박물관, 비는 내리지만 희곡집을 읽었다 비는 내리지만 테라스에 앉아서 비를 보지 않고 책을 보면서 상연된 것을 떠올리며 그것을 읽었다 둘은 서로 살아나서 테라스로 온다 옆자리에 개를 데려온 사람들이 있다 한 사람이 개를 안고 다른 사람은 곁에 앉고 둘은 서로 사랑하는 것 같다 사랑하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개를 안고 비를 바라보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면 개에게 간식을 주고 자기들의 책을 읽겠지 처마 아래서 사람들이 우산을 턴다 # 김이강, 경의선 숲길을 걷고 있어 (현대문학, 2024) ... 무의미한 반복과 유의미한 성찰 : ..

문학노트 2025.04.24

나희덕, '시와 물질' (따뜻한 정서가 감싼 시의 효용)

시와 물질 로알드 호프만은 화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규칙을 적용한 물질에는 몇 가지 폭발물과 독극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도 생각해보지 못한 물질들이었다 그 책임을 묻는 질문에 호프만은 대답했다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물질은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그 물질들의 특허권을 갖고 있지 않고 그 결과로 돈을 벌지도 못했어요 어떤 물질이 위험하다고 그것을 발견한 책임을 과학자 개인이 져야 할까요? 우리의 발견은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발견은 수십만 명의 과학자가 함께 맞추며 찾아가는 거대한 퍼즐 속의 일부일 뿐입니다 심지어 시도 사람을 해칠 수 있어요* 슈테판 클라인과 로알드 호프만의 대화를 읽다..

문학노트 2025.04.23

서윤후, '흑백판화' ('추화'의 미학에 관하여)

흑백판화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에서 백반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덜 다정하지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건 아닌데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참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온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어서 그게 벌어지는 모든 일의 이유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되진 않는다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막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

문학노트 2025.04.22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

문학노트 2025.04.21

최현우, '충돌 지점'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

충돌 지점 시간의 살은 언제 갈변하는가 읽으려던 책 말고 읽었던 책이 불쑥 책기둥 복판에 끼어 있을 때 잊었던가, 잃었던가 하물며 저기 어느 날 영혼의 앞뒤를 바꾸었던 문장이 있었는데 그저 그렇게 처박혀 있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럭에서 빠져나온 종이컵으로도 따라오는 차의 앞 유리가 깨지듯 울지 않고 웃으면서 조용히 빛을 씹던 자들의 이빨자국 모여드는 밤이 있다 현생과 전생까지 순식간에 끌려 들어와 박살이 나는 찰나가 있다 날개와 허공이 마찰하는 부분은 공중의 어떤 곳을 망가뜨리는가 운다 혼자면서 혼자로 두지 않으려 했던 사람은 얼마나 두려웠나 통증 없이도 이토록 멍들 수도 있는가 ..

문학노트 2025.04.20

김수영, '푸른 하늘을' (혁명기념일에 부쳐)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유고시집, 거대한 뿌리 (민음, 1974) ... 혁명기념일에 부쳐 : "혁명은 언젠가 이루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 자체다" 해마다 4월 19일이면 신문들마다 기념할만한 시 한 편을 함께 내놓곤 하는데, 지난 2016년 겨울의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

문학노트 2025.04.19

윤유나, '해운대 바닷가 소리회' (시국은 무사태평인지...)

해운대 바닷가 소리회 아침은 너무 멀어 웃음 기다렸지 웃음 파도 길었던 하루 파도 키득 웃음 묶음 파도 파도 가르는 소리 파도 투과 쓸려 가는 모래 모래 해변 쓸리는 저변에 깔린 사람들 끌어내려 바다 넘치고 밀어넣는 바다 비명 바다 바다 비명 기어이 바다 말하지 다른 문을 열고 파도 다가가는 빗속에 비처럼 낯선 바다 듣는 파도 ? ?? !? ... 다시 파도만 물속에 잠긴다 물 밖의 해변 가녀린 해변 부딪치고 덤벼들어 물방울 묶음 투척 잠잠한 물의 바다 다가서다 펼쳐진다 파도 네 다리 펼친 갈색 짐승 떠다니는 잡음 바다 바다 잡음 ..

문학노트 2025.04.18

채호기, '맨 앞에 괸 시' (신구의 공존, 2025년의 시단)

맨 앞에 괸 시 그것은 너의 몸속에 그것을 묻을 그것의 흰 종이다. 그것은 너와 네 꿈으로 합산한 몸을 둥글게 말고 공처럼 벽에 던져졌다. 너는 그것의 머리를 묶은 바다를 풀어낸다. 그것은 작은 입술이 되어 너의 젖가슴 사이로 파고든다. 불을 끈다. 불꽃을 위해 종이에 담은 네 심장을 돌려주마. 시동을 켠다. 엔진 흡기밸브가 흡입한다. 공기와 휘발유가 섞인 혼합체를. 피스톤이 밀고 올라가며 실린더를 압박한다. 피스톤의 운동이 정점에 이르면 점화 플러그에 불이 붙고 내부에 가연성 화학물질이 폭발한다. 피스톤의 직선운동이 구동축의 회전운동으로 바뀐다. 오르다 오르다 천장에 막힌 고동치는 예민한 풍선들. ..

문학노트 2025.04.17

태이, '자이가르닉 위령제' (세월호 11주년을 맞는 아침)

자이가르닉 위령제 아주 작은 접점에서 관찰된 모습은 숟가락으로 살짝 눌러 동글납작하게 만들고 돌려 구우면 버터 향이 천천히 올라옵니다 녹진합니다 종이로 된 소식들은 비를 맞으며 글자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거죠 우천 시에도 자이가르닉 위령제는 우산 속에서 열리니까요! 일요일 아침이니, 노래 한 곡 어때요 종이에 싼 빵과 튤립 한 다발 영어인지 프랑스어인지가 막 적힌 신문 한 부에 샹송이 좋겠네요 아무래도 신청주의니까요 나는 오래된 재생기입니다 주로 의미 없는 것들을 재생합니다 한 곡조 한 곡조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집니다 지난 일은 지난 일, 여태 말로 태어나지 못한 것들이 옹송그려 침묵하고 있습니..

문학노트 2025.04.16

김연덕, '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에서 주목할만한 몇)

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어릴 적 나를 괴롭히던 기분들은 나도 모르는 새 다 타 버린 것 같아 환하게 타고 있는 지금의 낮과 밤 아직 대가 단단한 꽃처럼 소리 지르는 끝나 버렸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분들과 그것은 가끔은 속도를 맞추어 검은 연기를 내뿜지만 이제는 내 것이 아닌 어릴 적 살던 집에서 하던 실제의 저녁 산책들처럼 자유롭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이어지던 마당에 끝없이 심긴 야생 꽃들처럼 어린 나의 주위에 차가운 원을 그리며 떨어졌던 재는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만 눈에 띄게 남아 나의 중심에 질서 있는 모양으로 흩뿌려져 있어 그것의 U자 형태는 1999년의 마당과 닮아 있어서 나는 언..

문학노트 2025.04.15

임경섭,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4월 중순의 눈꽃)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발견한 뒤부터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안다고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와 마주한다 또 다른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다 어? 어떻게 내가 모르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두 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처음 들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만이 유일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라 여긴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도처에서 태어나고 있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당신의 사방에 놓여 있지만 당신은 당신의 처음 그 ..

문학노트 2025.04.14

이기성,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시를 쓴다는 일에 대해서)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항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네게 종이를 한장 건네고 아무것도 쓰지 못했음을 깨닫고 돌아보지만 너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이고 정작 쓰지 못한 마음은 주머니 속에서 쓰디쓴 돌멩이처럼 굴러다닐 때 시계는 정지하고 남아 있는 것은 박동하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에도 남아 있는 것 파도가 사라진 뒤에도 남은 것 네가 떠난 뒤에도 남은 것 어둑한 너의 눈동자처럼 아직은 있는 것 손때 묻고 더러운 빈 종이, 그런 시를 들고 나는 영원히 한 시를 떠나지 못한다 # 이기성, 감자의 멜랑콜리 (창비, 2025) ... 시를 쓴다는 일에 대해서 : 요란한 밤비가 그친 후에도 벚꽃들의 안부가 궁금해 잠시 바깥을 다녀왔습니..

문학노트 2025.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