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266

裸木

裸木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 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신경림, 쓰러진 자의 꿈 (창비, 1993) :: 메모 :: 작년에 첫 시집을 엮으며 추린 목록들 중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이란 제목의 습작이 있었는데, 그 습작..

문학노트 2024.05.23

이른 새벽, 필사 (또는 "인용")에 대하여

저는 모든 종류의 책을 필사합니다. 단 분량이 너무 많은 장편이나 철학서 등은 다른 분들 사진을 찍듯이 필요한 문단만 따로 발췌해 옮겨놓곤 해요.    나중에 들춰보면 종종 도움이 되거든요.    그리고 글쓰기 입장에서는 필사가 그리 큰 도움은 못 되는 것 같아요. (즉 필사는 '기억의 보존' 목적이 더 크죠)    “모작”의 시도가 좀 더 효과적이라 생각해요.        “순수하게 트레이싱으로 그린 그림은 원판에 대고 베껴 그리는 방식이라서 모작보다 난이도가 떨어진다. 난이도가 낮은 만큼 배울 수 있는 한계도 극명하게 낮다. 트레이싱을 하는 데에도 테크닉이 있긴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트레이싱 테크닉을 숙련하는 의미는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실력향상 수단으로 보자면 모작은 최고의 효율..

문학노트 2024.05.08

앤솔로지 2

저자의 말 희망과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요즘이다. 비관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가 비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쉬운 지금, 우리에게 시는 특별하고도 소중하다. 시란 다른 세계를 꿈꾸도록 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우리 앞에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세계의 가능성을 개진하는 것이야말로 시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한권의 시집은 하나의 세계에 준하는 것이고, 한권의 시집을 읽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므로, 시를 사랑하는 우리는 한권의 시집을 읽으며 우리 자신조차 몰랐던 우리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선택지가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비관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다른 세상을 상상할 힘이 아닐까. 우리는 시를 통해 그 힘을 잠..

문학노트 2024.04.21

김수영, ‘푸른 하늘을’

[4·19 특집] 푸른 하늘을 김수영 (金洙暎, 1921~1968)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김수영 시인이 1960년 6월15일에 발표한 작품. 4·19가 일어나고 두 달이 못 되어, 투쟁의 피가 마르기 전에 나온 시. 첫 연은 다소 산문적으로 시작한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수정되어야 한다”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의 하나로 이어진 긴 문장으로 포문을 연 뒤에 2 연에서 탄알 튕기듯 선명한 언어들을 던지며 산문에서..

문학노트 2024.04.19

앤솔로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두 권의 앤솔로지인 창비의 과 문지의 를 훑어보는 시간입니다. 먼저 더 오래된 창비는 창비시선 중 총 74명의 시인들을 추렸고, 창비시선 1호인 신경림의 가 아닌 2호인 조태일의 즉 1975년부터 493호인 황유원의 즉 2023년까지를 담아냈고요. 46판 변형 (127×200m)의 크기로 아르떼 표지를 채택하였고 총 175페이지 분량에 가격은 7,000원에 냈습니다. (출판단지라서인지 확실히 출판경쟁력은 독보적인 편예요.) 창비시선 전체를 아우른다는 면에서 기념비적 요소를 가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창비가 자부심을 가질만한 이정표들로 꼽힐 1978년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1981년 신춘문예 당선작이 아닌 1983년 창비시선 버전) 등이 함..

문학노트 2024.04.19

진은영, '청혼'

모처럼 '오래된 거리처럼' 오래된 시 한 편을 꺼내듭니다. 10년 전의 크디큰 트라우마를 겪던 대한민국은 계간 을 통해 진은영의 시 한 편을 접하게 됩니다. 마치 1980년 5월을 겪은 대한민국 전체가 숨죽여 맞던 이듬해 신춘문예에서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다수는 그 어떤 감정의 '정화'를 떠올렸을 법합니다. 그토록 오래된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저항은 하나이고 사랑과 치유도 하나"라고 시집 전체가 작게 말할 뿐이라던, 또 "예술은 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며,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적은 시집 발문에서도 아마 동일한 느낌을 얻으셨으리라..

문학노트 2024.04.16

진은영, '방을 위한 엘레지'

방을 위한 엘레지 1 꿈이 죽은 도시에서 사는 일은 괴롭다 누군가 살해된 방에서 사는 일처럼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이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듯 봄이 겨울을 이기고 온다는 것과 그 반대도 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뒤에 오는 것이 승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화성이여 지구를 이기길 내일이여 오늘을 이기길 썰물이여 밀물을 이기길 그러나 봄, 여름 뒤엔 다시 겨울이고 무지노트와 지구본 연필깎이와 제본한 『예술의 규칙』을 한 줄로 늘어놓은 내 방 책상 위로 가장 나중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든 다른 것이 시작될 때마다 예언은 빛나며 빗나갈 테니까 여기는 방이 아니라 거리이며 나는 다만, 여기를 걸어서 지나가는 거라고 벽과 벽 사이를 서성이며 생각하는 것이다 2 이 방에는 수만 개의 유채꽃이 겨울의 ..

문학노트 2024.04.13

김리윤, '재세계reworlding' (1월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베껴쓰고 다시읽기] 1월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 재세계reworlding 지나간 일은 다 잊자 지나간 일은 다 잊는 거야 그는 이 대사의 다음 장면에서 죽었다 영화 속에서 영화는 계속될 것 같았고 그 사람은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잊게 될 것이다 휴대폰 불빛이 신경 쓰여서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어 극장에 꽉 들어찬 어둠은 그 작은 불빛 하나 숨겨주지 못하고 주인공은 12월 밤거리의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오래된 거리를 걸으면 가로수들은 영원히 자랄 것 같다 정원사의 손에서 떨어지는 잎사귀와 뚝뚝 분질러지는 나뭇가지의 미래를, 잔디가 깎이는 동안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통을 다 기억하면서 12월엔 어디에서나 커다란 나무에..

문학노트 2024.02.01

손유미, '날씨의 숲 연인의 방' (기성 문단이 찾는 "새로운 목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베껴쓰고 다시읽기] 기성 문단이 찾는 "새로운 목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 날씨의 숲 연인의 방 허공을 꼬집으면 바람 음을 맞춰 이를 가는 작은 천둥 창문엔 내내 비가 내린다 숲 한가운데에서 연인은 머리채 잡힌 인어처럼 흔들리고, 식욕이 팽배해져서 구름 사경을 헤매다 눈을 맞춰 벼락 서로가 하나도 둘도 아니라는 함정에 빠져 돌연 안개 수렁 수렁 비는 잦아든다 언젠가의 슬픔처럼 그러나 수렁 수렁 언제나의 비는 서로를 휘감고 누워 * 손유미, 탕의 영혼들 (창비, 2023) "그의 언어는 불편하지만 한순간 날카롭고, 격렬하지만 빈틈이 적었으며, 퓨전과 키치를 연상시키되 그것을 간단히 넘어선 자리에서 생활과 조우한다... 심사자들은 이 낯선 재능에서 쉽게 요해되지 않는 세계를 구축하는 힘을 읽었다" ..

문학노트 2024.01.27

주민현,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공식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법)

[베껴쓰고 다시읽기] 공식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법 :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땐 비스듬하게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요 사진기를 모자처럼 쓰고요 철로 위로 방금 뜬 해가 빛날 때 그러나 해는 늘 가려져 있던 것이고 오래된 베레모와 벨루가의 장난기를 섞어 삶의 증오와 미움을 한 발짝 맛있게 끓여요 철로에 앉은 제각기 다른 머리색만큼이나 우리의 고민은 풍요롭고요 양들이 씹어 먹는 게 이야기라면 흰빛들이 세상엔 불어날 거지요 내가 쓰는 이유 당신이 말하는 이유 우리가 말하는 것들 오래된 산책 속에는 극장과 서점이 사라진 도시가 있고 폐업, 폐쇄, 반복되는 임시 개점과 휴업 선생님, 임대료는 점점 높아지고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고 당신이 말하지요 조용하고도 요란스럽게 내리는 비..

문학노트 2024.01.26

김중일,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시적 '효용'에 관한 물음과 유별난 '취미' 활동)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적 '효용'에 관한 물음과 유별난 '취미' 활동 :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 지금 만나러 가는 너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도 직업일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대답한다. 시인은 가장 큰 직업이다. 마치 스스로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다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가장 큰 직업'이란 말이 좀 걸린다.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 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큰 직업'이란 당최...... 무엇일까,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노동하여 집을 지으면 폭풍이 와도 ..

문학노트 2024.01.25

정현우, '소멸하는 밤' (박형준과 정호승의 변증법적 통일)

[베껴쓰고 다시읽기] 박형준과 정호승의 변증법적 통일 : 소멸하는 밤 흰 어둠이 잠들지 않는 거리, 나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 지난 사랑이 모두 헐거워지는 창문 아래, 눈물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 그러니 우리를 울게 하는 것들은 힘껏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는 것입니까, 어둠을 지우려 우는 별자리들이 느리게 첫눈으로 떨어집니다. 겨울 구름 위로 숨 하고 내미는 입술, 흰 두 뺨이 젖듯이, 베갯잇에서 우우 하고 우는 얼굴, 가장 죽고 싶을 때와 가장 살고 싶을 때의 얼굴은 밤마다 꿈속에서 끝없이 다가오는 얼굴들, 죽은 아이들과 죽은 엄마들과 죽은 모두가 투명한 이파리처럼 흔들릴 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추모는 내가 할 수 없어서 나는 슬퍼야 합니까, 낯빛들이 피어오르는 숲, 별자리는..

문학노트 2024.01.24

김명인, '침묵' (말을 줄여가는 시절)

[베껴쓰고 다시읽기] 말을 줄여가는 시절 : 침묵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

문학노트 2024.01.23

천양희, '너에게 쓴다' (뒤늦은 한파, 보름을 앞둔 입춘)

[베껴쓰고 다시읽기] 뒤늦은 한파, 보름을 앞둔 입춘 : 너에게 쓴다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 천양희,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작가정신, 1998) 대한을 거쳐온 새로운 한 주는 뒤늦게 한파가 불어닥칩니다. 눈앞의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머지 않은 입춘을 헤아려볼 마음도 필요한 때입니다. 천양희 시인은 여럿의 유명한 작품을 남겼지만 뭐니뭐니해도 교보문고 간판에 내걸었던 이 시가 가장 널리 알려진 편이어서 역시 뒤늦게 꺼내봅니다. 중견 이상 시인의 작..

문학노트 2024.01.22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사이좋게 지내기'에 관하여)

[베껴쓰고 다시읽기] '사이좋게 지내기'에 관하여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듯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문학노트 2024.01.19

이유운,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 ('시창작 강의'가 시집제목이 되기도 하는 시대)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창작 강의'가 시집제목이 되기도 하는 시대 :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 ​ 당신이 또 여름이 왔다고 말하는 것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내 등을 바람으로 깎아놓은 거친 손으로 훑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가락 끝이 유독 단단했던 당신의 손톱은 언제나 창백한 회청색이었다 손톱이 왜 파랗지요 하고 물으면 요 안에는 바람이 담겨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던 당신의 입술에는 뼈가 없었다 당신의 손이 습한 등을 훑으면 와사삭 소름이 돋아서 정말로 당신의 손톱에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바람으로 나를 만지며... 내 등뼈는 당신 덕에 조약돌처럼 둥글어졌다 그리하여 아주 먼 미래에 누군가 내 등을 만지면 나는 바람으로 깎여 둥글고 부드러운 짐승이 되어 있었다 ​ 나는 그 먼 미래를 생각하..

문학노트 2024.01.18

이성부, '봄' (다시금 '고전'을 '고전주의'를 생각함)

[베껴쓰고 다시읽기] 다시금 '고전'을 '고전주의'를 생각함 :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민음, 1974) 1998년의 창비 홈페이지는 "글이 있는 뜨락"이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문지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 역할을 ..

문학노트 2024.01.17

황지우,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너무 이른 기다림,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베껴쓰고 다시읽기] 너무 이른 기다림,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 ㅡ 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장사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지, 1999) 오랜만에 황지우 시집을 ..

문학노트 2024.01.16

황인찬,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얼터너티브"가 유행했던, 유행할 미래)

[베껴쓰고 다시읽기] "얼터너티브"가 유행했던, 유행할 미래 :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민음, 2012) 벌써 12년이나 지난 옛 시집을..

문학노트 2024.01.15

조연호, '입춘 부근' (대한을 앞둔 채 벌써 '봄'을 기다리는)

[베껴쓰고 다시읽기] 대한을 앞둔 채 벌써 '봄'을 기다리는 : 입춘 부근 그 입춘 부근은 너무나도 따사로워 나는 제방에 걸터 앉아 못생긴 꽃의 꽃말을 외웠다. 아무도 떠나지 않은 자리에 마음이 머물던 자국만 남아 있다. 어떤 책을 펼쳐 읽어도 마음 좋은 청춘은 만날 수 없던 날, 들풀이 머리칼처럼 야윈다. 늙은 개암나무 곁에서 허리를 굽혀 봄볕의 마음을 줍는다. 내가 꽃말을 외울 때마다 거짓으로 잎순이 부풀어 올랐다. 가난한 애인과 함께 부자의 마을에서 헤픈 상대방이 되고 싶던, 내 그리움이 가시에 찔려도 터지지 않았다. 따사로운 나무둥치들이 어린 양처럼 매매 울며 어미 숲을 부른다. 쑥 냄새가 나는 길을 걸었고 그 길가에 호들갑스레 꽃 피고 여동생의 책가방에서 화장품이 쏟아졌다. 찌처럼 조용히 그늘 ..

문학노트 2024.01.14

창작동인 뿔, '어제의 꿈은 오늘의 착란' (창작 커뮤니티들의 롤모델, 창작동인 뿔)

[베껴쓰고 다시읽기] 창작 커뮤니티들의 롤모델, 창작동인 뿔 : 어제의 꿈은 오늘의 착란 소음 속에서 귀를 막으면 파도 소리가 들리나요 손가락을 죄다 자른다면 더는 편지를 적지 않아도 되나요 모든 편지에는 그립고 슬프다는 말을 적어야 하나요 밤하늘도 저렇게 많은 알약을 삼켰다고 하지 않았나요 박하잎을 씹으면 두 눈이 시큰거려요 발끝에서 바다가 죽어가요 어젯밤 꿈은 전부 증발해버렸는데 어지러워요 나는 어지러운 사람이에요 무엇을 말해야 하나요 무엇을 듣고 싶나요 귀를 막으면 알 수 있나요 귀를 막고 눈이 멀면 손끝이 예민해지나요 무엇을 만져야 하나요 무엇이었나요 어둠 속에서 내가 더듬거렸던 것은 끝, 눈물, 다음에 계속 물밀 듯이 밀려오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눈앞을 가리는 건 꼭 눈물이어야 하나요 볼 수 없다..

문학노트 2024.01.12

한백양, '왼편' ("더블"의 영광과 "불혹"의 한 정점)

[베껴쓰고 다시읽기] "더블"의 영광과 "불혹"의 한 정점 : 왼편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

문학노트 2024.01.11

박참새, '새시대' (<시대와의 불화>, 참새와 허수아비)

[베껴쓰고 다시읽기] , 참새와 허수아비 : 새시대 저는 미쳤어요 유유상종 끼리끼리 그러니까 내 친구들 모두 시인이었단 말이죠 얼마나 좋았겠어요 우리끼리만 읽을수 있었거든요 우리끼리는 뭐든 다 좋다고 그랬거든요 객관적으로도 사실이었어요 저는 미쳐서 이게 사랑이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못 썼어요 사랑 시 사랑 시 생각만 하느라 사랑은 보이지 않으니까 내 눈 앞에 살아 있는 사랑 사람들 그것만 보려고 언제 달라질지 모르는 마음이니까 뚫어져라 보기만 했어요 나서지도 못하고 혼자서 공공 앓았어요 가끔은 그랬어요 나 사랑 좇도 모르는 거 같아 사실이에요 나는 미쳤잖아요 미친년이 사랑하면 미친 사랑이지 사랑은 아니잖아요 돌아 버리잖아요 그래서 못 쓰는거예요 나도 쓰고 싶다 사랑 시 사랑 사랑 할 때마다 피치 못하게 쓸..

문학노트 2024.01.10

황인숙, '생활의 발견' (진부하다, 직설적이다, 상상력이 부족하다)

[베껴쓰고 다시읽기] 진부하다, 직설적이다, 상상력이 부족하다 : 생활의 발견 ​ 소스 맛에는 중독성이 있다 때로 소스를 맛있게 먹기 위해 돈가스가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돈가스 소스는 돈가스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연구하고 만든 것일 테지만 ​소스만 있으면 어떤 특정 음식의 맛을 상당 정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맨밥에 돈가스 소스를 끼얹어 먹으면 돈가스와 흡사한 맛이 난다 시작법은 시의 소스 제 소스의 레시피를 가진 시인들이 부럽다 언제라도 한 접시 먹음직한 시를 내놓는 그들! 나는 레시피도 없고, 찬장 깊숙한 데서 꺼낸 인스턴트 돈가스 소스는 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났다 그래도 가난한 나는 맛있게 먹지 * 황인숙, (문지, 2016)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같은 제목을 가진 영화가 있지만,..

문학노트 2024.01.09

박정대,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영하 11도의 주초, 다시 '낭만'에 대하여)

[베껴쓰고 다시읽기] 영하 11도의 주초, 다시 '낭만'에 대하여 :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미스터 션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햇살 좋은 아침이면 앞마당으로 나가 빨래를 너오 그곳에 돌배나무, 목련, 배롱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사과나무, 생강나무, 이팝나무, 자작나무들을 심었소 자작나무에는 따로 이름을 붙여주었소 가난하고 아름다운 사냥꾼의 딸, 꽃 피는 봄이 오면, 자작나무 우체국, 레아 세이두, 장만옥, 톰 웨이츠, 김광석, 빅토르 최, 칼 마르크스, 체 게바라, 아무르, 아르디 백작, 상처 입은 용, 짐 자무시, 짐 모리슨, 닉 케이브, 탕웨이, 아르튀르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들, 이들은 가난하고 아름다운 나의 열혈동지들이오 돌배나무는 대낮에도 주먹만 한 별들을 허공에 띄우오 그 여..

문학노트 2024.01.08

박준, '잠의 살은 차갑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다시보기)

[베껴쓰고 다시읽기] 드라마 "나의 아저씨" 다시보기 : 잠의 살은 차갑다 깊은 잠에 빠진 살은 차다 간장에 양지를 졸이는 꿈을 며칠 이어 꾼 것을 두고 나는 마음으로 즐거워했다 으레 그럴 때면 외투를 한 겹 더 입었다 겨울옷의 소매들은 언제나 길고 나는 삐져나온 손끝을 보며 얼마 남지 않은 욕실의 치약과 굳은 치약을 힘주어 짜냈을 안간힘에 대해 생각했다 물건을 새로 뜯지 못하는 나의 버릇을 병이라기보다는 몸가짐이라 부르고 싶었다 이 겨울과 밤과 잠과 아직 이른 순荀과 윗바람 같은 것들은 출현보다 의무에 가까웠으므로 불안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지, 2018) 세밑의 큰 우울함이었던 배우 이선균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사로 (개인적으로는 또는 한 가정의)..

문학노트 2024.01.07

강지수, '면접 스터디' ('현대시'와의 면접을 임하는 태도)

[베껴쓰고 다시읽기] '현대시'와의 면접을 임하는 태도 : 면접 스터디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 소리를 내면 그게 진짜 목소리라고 한다 진짜 목소리로 말하면 신뢰와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자 방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인 채 아 아 아 소리를 낸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이제 그 음역대로 말하는 겁니다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닌 진짜 당신의 목소리로요 엉거주춤 허리를 편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왔고…… 멋쩍은 미소를 짓고 몇 번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다가 불쑥 허리를 접고 다시 아 아 거리는 이도 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손짓한다 이리 와서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쭈뼛거리며 무리의 가장..

문학노트 2024.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