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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서봉, '닫히지 않는 골목' - 붉은 집 ('잔인한 일상' 속에서의 감정을 다루는 방식)

[베껴쓰고 다시읽기] '잔인한 일상' 속에서의 감정을 다루는 방식 : 닫히지 않는 골목 - 붉은 집 붉은 집에 사는 여자에게는 어린 남자가 가끔씩 찾아온다 소문에 의하면 여자는 매형의 정부였는데 어린 남자는 찾아올 때마다 누군가의 뼈 한마디씩을 그녀에게 주고 간다는 것이다 누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이 골목을 떠나 돌아오지 못했고 대신 정부를 들인 매형도 몇 해를 더 살지 못했다 집 앞 동산에 묻힌 매형의 무덤에는 누군가 매해 다녀간 흔적이 있지만 누가 다녀가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린 남자가 누구인지 붉은 비 여자는 뼈마디로 또 무엇을 짓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집은 해가 더할수록 점점 더 붉어지고 있다 * 천서봉,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문학동네, 2023) ... '잔인한 일상' ..

문학노트 2023.12.08

김소연, '먼지가 보이는 아침' (이과적 글쓰기가 문과적 감상문을 마주할 때)

[베껴쓰고 다시읽기] 이과적 글쓰기가 문과적 감상문을 마주할 때 (김소연, 먼지가 보이는 아침) : 2014 신춘문예의 중앙일간지 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는 지방일간지들 일부의 잔여일정만을 남겨놓은 첫 아침인데, 오늘 꺼내놓는 시는 김소연 시인의 시집 중에서 골랐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이윤수의 '먼지가 되어'라는 곡을 참 좋아했던 기억이 있는데, 비슷한 제목이 시예요.) 글쓰기의 형태 역시 다시 원래의 시 한 편을 놓는 방식대로 회귀하였으며, 여전히 아침은 촉박하기만 합니다. 김소연 시인이 가장 최근에 주요 공모전 심사들을 맡아온 이력들도 있기 때문에 그 '스타일'에 대해서도 한번쯤 짚어두시라는 측면을 함께 내포합니다. 말의 유희, 간결한 어체, 상징적으로 그려낸 삽화들, 입체감을 갖는 시어들 중에..

문학노트 2023.12.07

신춘문예 D-1.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10선 (#6~#10)

신춘문예 D-1.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10선 :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변신, 회복기의 노래, 사평역에서, 이사) 6. 목재소에서 (박미란)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신새벽, 새떼들의 향그런 속살거림도 가지 끝 팔랑대던 잎새도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잠 덜 깬 나무들의 이마마다 대못이 박히고 날카로운 톱날 심장을 물어뜯을 때 하얗게 일어서는 생목의 목쉰 울음 꿈 속 깊이 더듬어 보아도 정말 우린 너무 멀리 왔어 눈물처럼 말갛게 목숨 비워 몇 밤을 지새면 누군가 내 몸을 기억하라고 달아놓은 꼬리표 날마다 가벼워져도 먼 하늘 그대, 초록으로 발돋움하는 소리 들릴 때 둥근 목숨 천천히 밀어올리며 잘려지는 노을 어둠에..

문학노트 2023.11.29

신춘문예 D-2.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10선 (#1~#5)

신춘문예 D-2.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10선 : 1.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 (신동엽) 당신의 입술에선 쓰디쓴 물맛이 샘솟더군요, 잊지 못하겠어요. 몸양은 단 먹뱀처럼 애절하구 참 즐거웠어요, 여름날이었죠. 꽃이 핀 高原 은 난 지나고 있었어요. 무성한 풀섶에서 소와 노닐다가, 당신은 꽃으로 날 불렀죠. 바다 언덕으로 나가고 싶어요. 밤하늘은 참 좋네요. 지금 地球는 旅行을 한다나요? 冠座星雲 좀 보세요. 얼마나 먼 세상일까요....... 기중 넓은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럼 그의 바깥엔 다시 또 딴마당이 없는 것일까요? 자, 손을 주세요 밤이 깊었어요. 먼저 쉬세요. 못잊으려나 봐요-우리가 抱擁턴 하늘에 솟은 바위, 그 밑에 깔린 구름 불 달은 바위 위에서 웃으며 잠들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던..

문학노트 2023.11.28

신춘문예 D-2. 현대시인 20선 (#11~#20)

신춘문예 D-2. 현대시인 20선 : (황지우, 박노해, 이성복, 정호승, 김명인, 나희덕, 장석남, 황인숙, 백무산, 진은영) 11. 간절기 (김경주) 엄마는 아직도 남의 집에 가면 몰래 그 집 냉장고 안을 훔쳐본다 그런 날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유 없이 화를 내던 엄마의 일기를, 고향에 가면 아직도 훔쳐보고 있다 궁금해지면 조금 더 사적이게 된다 애정도 없이 내 입술이 네 입술을 떠난다 너는 카페만 가면 몰래 스푼을 훔친다 우아한 도벽은 엄마의 철자법처럼, 걸인의 차양모자처럼 생기가 있다 세상의 기사(記事)들은 모두 여행기다 내일이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특종들, 사건 뒤에 잊힌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닌 적이 있다 나는 네 가계(家系)에 속해 있다 매일 사라질 가계를 다루고 떠나는 나의 행간은..

문학노트 2023.11.28

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1~#10)

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 1. 게 눈 속의 연꽃 (황지우) 1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 2 게 눈속에 연꽃은 없었다 普光의 거품인 양 눈꼽낀 눈으로 게가 뻐..

문학노트 2023.11.27

신춘문예 D-4. 세계/조선/한국일보 신춘문예

신춘문예 D-4. (중앙일간지 리뷰, 5/6//7) 세계/조선/한국일보 신춘문예 : 이제 올해 신춘문예도 그 막바지 단계에 접어드네요... 주말특집인 관계로 나머지 세군데의 신춘문예를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세계/조선/한국일보) 세계일보, 조선일보 및 한국일보까지의 최근 5년간 당선작 및 심사평 요약입니다. ; 1) 세계일보 2019년 : 박신우,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 (심사 - 천양희, 최동호) "「풍선론」은 이미지도 분명하고 시적 언어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는 옥탑방의 화자를 통해 발견이라는 새로움을 무리 없이 전개하고 있었다. 먼저 시적 완성도라는 점에서는 「풍선론」이 앞서 있었으나 그로 인해 발전 가능성은 작아 보였고 마지막 결말의 처리가 추상적이..

문학노트 2023.11.26

신춘문예 D-5. 서울신문 신춘문예

신춘문예 D-5. (중앙일간지 리뷰, 4/7) 서울신문 신춘문예 : 거리에서, 너에게, 말하지 못한 내 사랑, 그리고 나무... 김광석이 있었습니다. 문득 동영상 한 편을 찾아 틀고선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저께는 점심시간에 문득 생각이 나서 대학로를 찾았고 학전 앞에서 한참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전의 대구에서도 그랬나 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그리워하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회복기의 노래, 사평역에서, 이사, 목재소에서, 그리고 볼트... 신춘문예가 있었습니다. 인생에서의 시 한 편도 그런 부분일 것으로 늘 믿어온 편입니다. 어느 한 시절을 대변할 그 시편과 그 시인의 삶들을 늘 그리워했나 봅니다. 어쩌면 이 부분 역시 앞으로도 누군가..

문학노트 2023.11.25

신춘문예 D-6. 문화일보 신춘문예

신춘문예 D-6. (중앙일간지 리뷰, 3/6) 문화일보 신춘문예 : 새벽녘에야 비로소 제법 늦어진 평론을 탈고하였습니다. 제목을 고쳤는데 "시대를 넘어서는 '신서정'과의 대화 : 그 오래된 미래"로 하였고요. 중앙일간지 리뷰를 계속 이어서 쓰려 하니, 벌써 새벽 네 시를 넘어섰네요? 좀 서두르겠습니다. 우선 최근 5년간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및 심사평들을 요약해봅니다. ; 2019년 : 조온윤,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심사 - 정호승, 김기택) "이 시는 지상의 수많은 삶과 죽음을 자신의 몸으로 겪어낸 것 같은 할머니가 자신의 마지막을 풍경화처럼 바라보는 시선과 개개의 삶을 넘어 생태계에 각인된 기억에 따라 움직이는 호랑이의 시선을 교차시키고 있다. 서로 얽히면서 소멸되어가는 두 시선은 자연의..

문학노트 2023.11.24

신춘문예 D-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신춘문예 D-7. (중앙일간지 리뷰, 2/8) 동아일보 신춘문예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는 신춘문예는? 1915년의 매일신보였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서울신문이 되겠군요. 정식으로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게 1920년, 동아일보에서 최초로 '신춘문예' 타이틀을 걸고 시작한 해가 1925년이므로 이제는 거의 백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합니다. (조선일보는 1928년부터 시행했다고 합니다.) 그 역사만큼이나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도 기라성 같은 면면을 자랑해온 편이죠. 또 여전히 가장 명성이 높고 영향력도 큰 곳들 중 하나예요. 그만큼 경쟁률 또한 가장 치열하기도 하고요. 유독 심사평들도 매우 쌀쌀맞기만 합니다. 동아일보의 최근 5년간 신춘문예 당선작 및 심사위원들..

문학노트 2023.11.23

신춘문예 D-8. 경향신문 신춘문예

신춘문예 D-8. (중앙일간지 리뷰, 1/8) 경향신문 신춘문예 : 이제 신춘문예도 불과 8일밖에 응모기간이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8일은 각 중앙일간지별로 주요 이력 및 시사점 등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해 공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일명 '총정리' 기간에 해당될까요?) 해당 신문사들은 가나다 순으로 해서 경향, 동아, 문화, 서울, 세계, 조선, 한국, 한국경제 등이며 특히 경제지임에도 당대의 최고 가객 중 한 명인 진은영 시인이 심사를 맡은 한국경제까지를 포함하여 총 여덟 군데입니다. 습작량이 많은 분들이라면 총 40~50편 정도로 각 신문사를 모두 다 도전해볼 수도 있겠네요... 그 첫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경향신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경향신문의 최근 5년간 신춘문예 당선작 및 심사위원들의 심사평 ..

문학노트 2023.11.22

신춘문예 D-9. 녹번동 (이해존)

신춘문예 D-9. 녹번동 (이해존)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놓았다 네모를 그려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 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내린다 무릎 꺾인..

문학노트 2023.11.21

신춘문예 D-10. 사평역에서 (곽재구)

신춘문예 D-10.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 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

문학노트 2023.11.20

신춘문예 D-11. 회복기의 노래 (송기원)

신춘문예 D-11.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회복기의 노래 (송기원) 1 무엇일까. 나의 육체를 헤집어,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것들은. 육체 중의 어느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차라리 무섭고 죄스러운 육체를 바람 속에 내던졌을 때, 그때 바람이 나의 육체에서 꺼낸 것들은.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은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저것들은 무엇일까. 바람을 따라 한없이 풀려나며 버려진 땅, 시든 풀잎, 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어디론가 날려가는 것들은. 저것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든 풀잎들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꽃무더기가 흐드러지고, 죽어있던 소리들이 이슬처럼 깨쳐나 나팔꽃 같은 귓바퀴를 찾아서 비상하고…… 2 누님. 저것들이 정말 저의 육체일까요? 저것..

문학노트 2023.11.19

신춘문예 D-12. 꽃은 봄을 웅성거리지 않았다 (창작동인 뿔)

신춘문예 D-12. 꽃은 봄을 웅성거리지 않았다 (창작동인 뿔) 영원히 비가 오지 않을 세계 아래로 유유히 지나가는 장마들 눈 뜬 채 죽어간 화가의 동맥과 흰 수목의 하엽들과 바람을 긋던 새 떼가 허공에 부서져 썩어가고 있을 때 먼 생을 돌아 한으로 추락하는 숨을 놓친다 자정의 수평선에 먹구름이 돌면 해안가를 따라 휩쓸릴 때까지 떠오르다가 터지는 빛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어서 그곳으로 간다지만 봄은 끝까지 꽃을 살아가고 있다 두 명의 아이는 사라지고 수천만 시간의 바다만 몰아칠 것이다 심장도 찬란히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별들이 몰락하기도 전에 너의 계절이 왔다 *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 짧은 편지 :: 새벽 바람이 거세게 창문을 두드립니다. 가..

문학노트 2023.11.18

신춘문예 D-13. 공리가 나오는 영화 (황인찬)

신춘문예 D-13. 공리가 나오는 영화 (황인찬) 시간을 나누고 함께 밥 먹고 또 때로 함께 잠드는 이것이 사랑이라니 군부대 생활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네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이 군인이겠지 무료한 젊은이들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를 말없이 보네 어쩐 일인지 그건 공리가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게 인지 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네 "이거 보자고 한 사람 누구야" 영화가 끝나고 젊은이 중 하나는 화를 냈는데 사실 그건 영화를 보자고 했던 것이 부끄러워 꺼낸 말 공리가 나오는 영화는 감동적이었지만, 젊은이들은 다들 눈가에 물기가 어린 채 말이 없었네 "미안해, 내가 그랬어" 다른 젊은이가 침묵을 깨고 사과를 했네 갑자기 혼자서 엉엉 울었네 밤늦은 시간이 되어 모두 잠들어야만 했고 군부대 생활관에서는 많은..

문학노트 2023.11.17

신춘문예 D-14. 아우라지 (김경주)

신춘문예 D-14. 아우라지 (김경주) 벼루 위에서 마른 먹처럼 강은 얼어 있습니다 바람에 어두운 물소리가 실려 옵니다 바람 속으로 물속의 어둠이 번지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 저녁을 가만히 견뎌야 한다면 무덤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강 속에 죽은 두 손을 담그고 앉아 있겠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다가가기 위하여 밤이면 빛은 얼마나 먼 행성에서 날아오고 있는 것인가요 그런 밤이면 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잠든 새들은 검은 이를 갈고 오랜 비행을 마친 인간은 깨어나 조용히 기체를 떨고 있겠습니다 무명의 별에서 빛 한 채가 날아옵니다 그 빛의 세월이 내 눈까지 날아오는 데 걸리는 음악의 생은 또한 얼마나 고독해야 하는가요 외로운 사람은 눈을 감고 걷고, 눈이 외로운 사람은 강심에 그 눈의 음을 숨겨야 하는 밤입니다 멀리..

문학노트 2023.11.16

신춘문예 D-15. 즐거운 편지 (황동규)

신춘문예 D-15.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현대문학, 1958년 11월 :: 짧은 편지 :: 민음시인총서의 1번이 김수영이었다면, 창비시선의 1번은 신경림..

문학노트 2023.11.15

신춘문예 D-16. 눈 (김수영)

신춘문예 D-16. 눈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자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달나라의 장난 (춘조사, 1956) :: 짧은 편지 :: 이제 불과 16일밖에 남지 않은 탓에 시편을 고르는 작업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어제 발표된 제4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는 북큐레이팅과 팟캐스트 진행자이며 에세이 작가로도 이미 활동해온 박참새 시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비문창 계열에서 수..

문학노트 2023.11.14

신춘문예 D-17.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신춘문예 D-17.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 짧은 편지 ..

문학노트 2023.11.13

[신춘문예 D-18] '신뢰'를 형성한다는 일

[신춘문예 D-18] '신뢰'를 형성한다는 일 : 알랭 드 보통의 책 에 나온 말들 중 "신뢰는 타인의 부재에 대한 합리적 해석"이란 말을 두어 달쯤 전부터 줄곧 생각해온 편입니다. - 이 말에서의 '부재'는 일종의 '미지'인 상태를 뜻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는 결국 스스로의 몫인 셈입니다. 대개의 경우는 강박관념, 불안감, 맹목적 믿음, 무지와 어리석음 등을 경계해야 하나 거꾸로 그것들이 종종 '신뢰'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기계공학 출신의 사람들은 항상 '톨러런스'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치밀한 성격들을 갖고, 반대로 화학공학 출신인 경우는 '믹싱'에 대한 강박으로 사교적인 편이죠. 산업공학 전공자들의 경우는 '최적화'에 대한 강박이 항상 '최선'에 대한 ..

문학노트 2023.11.12

[신춘문예 D-19] 신춘문예의 문화적 위상

[신춘문예 D-19] 신춘문예의 문화적 위상 : "하나의 문화체계에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은, 그것이 당대의 문화적 정황에 어떻게 의미작용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뀌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신춘문예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화제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생산한다. 현재 그것의 의미는 양가적이다. 그 양가성은 신춘문예라는 화려한 행사의 뒷면에 위태로운 흔들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흔들림이 소멸을 낳지는 않는다. 그 흔들림 때문에 그것은 존속한다." - 정명교(정과리), 한국일보 1988. 아침부터 읽었던 글입니다 영하 3도의 날씨가 제법 차가운 편이어서 바깥을 짧게만 산책하고 돌아선 길목에는 은행잎들만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사진은 찍지 않았습..

문학노트 2023.11.12

[신춘문예 D-20] 퇴고를 한다는 것

[신춘문예 D-20] 퇴고를 한다는 것 : 가을 단풍이 아쉽게도 벌써 저물고 있습니다. 올해는 기후 탓인지 빨갛게 물든 예쁜 단풍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로 은행잎들만 길가에 잔뜩 나뒹굴고 검붉게 타다 만 흔적들이 곳곳에 남은 상태예요. 오늘부터는 아침 산책도 그만하기로 했고요... 바깥 날씨는 비가 온 다음이라서 꽤 춥네요. 이른 아침마다 새벽 예배를 다니는 한 친구의 옷차림부터 대뜸 걱정하는 시간입니다. 요즘 들어 지인들의 습작을 볼 때면 자꾸만 말을 망설이곤 하게 되었는데, 실은 어떤 한 사람의 글을 놓고 온전히 그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무언가를 '판단'하기가 저어된 까닭입니다... 가끔 옛 영화의 대사를 떠올릴 법한 이 얘기는 사실 '있는 그대로의 편안함'에 관한 문제일 수도 있겠어요. ..

문학노트 2023.11.10

[신춘문예 D-21]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 산책

[신춘문예 D-21]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 산책 : 새벽 공기가 차갑습니다. 동편 하늘에는 그믐달도 떴습니다. 이제 신춘문예도 불과 3주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네요... 아직도 퇴고를 하느라 힘겹고 밤잠을 설치기 일쑤인데, 여전히 작품은 여간해선 눈뜨고 보기 힘들 경우들이 더 많습니다. 어쩌겠나요? 여기까지가 또 '한계'일 뿐입니다. ^^ 11월의 두번째 주말을 맞기 직전인 목요일, 작심을 하고 이제니 시인을 또 꺼내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눈치채셨을 텐데, 아마도 올해 신춘문예를 도전하는 분들 중 대다수는 박준, 이제니, 황인찬의 그늘 아래서 또 더러는 강성은, 나희덕, 김행숙, 오은, 김언 그리고 김경주와 조연호와 양안다까지 정도를 닮아간 채로 이 '구도'의 길을 걸으셨으리라 짐작해봅니다. 그리고,..

문학노트 2023.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