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벽璧

벽璧       나뭇잎도 계속 모으면 나룻배 한 척쯤 만든다 해서     설마 했지만 몇 년을 또 그러모았나 모르겠습니다      밖엔 내내 비가 오고 축축한 잎새들 차곡히 쌓으면    금세 한 뼘 나무토막쯤은 만들 수도 있었겠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네가 서 있고       벽을 타고 오를 담쟁이 잎은 차곡한 빗물을 머금고     쓰러지지도 않을 벽이 견고하기만 해 그저 애달파                  세찬 바람이 훅 불어오면 또 몇 장 금세 흐트러지고    연신 무너질 것 같던 잎새들도 꾸역꾸역 챙겨야 해서       비가 그칠 때까진 전전긍긍해야 할 시절만 불안한 채      족히 몇십 년 더 걸리는 게 맞을 일인지도 모릅니다         비가 오고 ..

글/습작 2024.05.05

다시 오월

다시 오월       신록이 솟아오르는 기운에 가벼운 걸음걸이를 배우기 시작한다면    에전 대문 앞에서 서성이던 발등에도 푸른 수국이 움틀 때가 많아        혹시 또 몰라 진짜 수국일까, 멈칫하며 서는 동안 해는 비스듬했고    해가 기운 각도만큼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켜보는 그해의 봄이 있고    그해의 가을도 함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 싶어       다시 오월, 기억은 상록수처럼 홀로 푸르른 채 변하지도 않을 계절    변하지도 않을 사랑은 스스로 나이만 먹나 싶어               #

글/습작 2024.05.02

종로에서 아는 사람 다섯을 만났다

종로에서 아는 사람 다섯을 만났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께의 종로를 우연히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색한 미소로 인사하면서 지나치곤 했지     정독도서관에서 한강을 닮은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고         뒷모습을 한참 쳐다봤어 머리카락이 너무 하얗게 세서    아직도 멀쩡한 나는 글쓰기가 부족해서일 거라고 믿었지     새벽마다 글쓰기를 연습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리 똑같애    부지런한 새가 일찍 죽는다던 허튼 농담이 더 지겨워서 그래       소격동 골목길에서 회사 사람을 만났는데 인사도 없이         유니폼만 서로 힐끗 쳐다보았어 각자의 점심시간을 잊은 채    다가올 구조조정의 순간들을 서로 애도하며 분주하기만 할 뿐     직급을 없애겠다며 너도 나도 프로 골퍼..

글/습작 2024.05.01

늦봄

늦봄       개여울을 한참 바라본 적 있었습니다     청계천과 진관사를 오간 걸음이 숨을 고르고 어느 한철을 인화한 순간     빌딩숲과 능선을 따라 두둥실 구름들이 흐르면 그게 그리 좋았습니다     얼음이 녹고 물이 흐르고 벚꽃이 흐드러진 동안    개울가에 소복하게 쌓인 꽃잎이 천천히 썩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떠나고 바람이 부는 동안은 기억도 함께 풍화된 순간들이었고         제법 두툼해진 라일락 잎이 영롱히 빛나는 동안    더는 없을 벚꽃에 대한 그리움도 연초록으로 갈아입는 풍경을 봅니다          늦봄입니다    오지도 않을 사람을 턱없이 기다리는 일은 내내 허망하였을 뿐이고       가지도 않을 바람을 보낸다는 일도 때로는 내내 맞아보는 일입니다      ..

글/습작 2024.04.30

봄의 마지막 축제

봄의 마지막 축제    벚꽃이 다 질 무렵    호수공원에도 한아름 꽃밭이 생기고    이른 새벽의 산책은 두서가 없이 좋았고    아침의 공기는 차고도 선선해서 좋았고    함께 저무는 사랑도    호수공원에 다다르면 개울가에 앉아    함께 물수제비라도 해본다면 좋겠지만    또 다시 떠나야 할 순간임을 직감하고    밖으로 인류의 금자탑인 인공위성이 날 때    내 눈앞에서 점멸하는 붉은 불빛은 그저    속절없던 회상과 애타는 연민의 그림자    그래, 잘 가라는 인사 한마디로도 충분해    이윽고 다가올 아침    길은 멀었고 아직 다리는 튼튼하므로       #

글/습작 2024.04.29

필사의 나이테

필사의 나이테                계단을 세워 제단을 덧대서    죽음과 죽음 이후의 기분을 꺼내고    가장 먼 곳에 차려질 식탁을 준비한다     이름을 부르는 쪽에    이름이 저무는 쪽에     긴 문장을 새긴 채 대답을 비워둔다    벗어나려고 찾은 입구와    굳어지기 싫어하는 발목         - 정영효, '도달할 미래'에서 ("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 문학동네 2023)       등단생활 15년 동안 시집 한 권인 시인의 시를 읽으면     습작생활 30년 내내 시집 한 권인 나 역시 과작이었고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일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슬픔과 죽음에 대해 한참 동안을 생각했으며     사랑과 헌신에 대해 한참 동안을 고민..

글/습작 2024.04.28

황무지

황무지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못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 장옥관, ‘봄밤이다 1’에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기억은 늘 다가온다    한사코 손사래를 치지만 어김없이 다가온다    다가와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곁에 앉는다    그럴 적마다 저어하는 표정으로 또 쳐다보지만    안중에도 없는 기색으로 그렇게 다가와서는    그동안 무얼 했냐면서 금세 까먹은 거냐면서    묻지도 않고 아무 말없이 그렇게 곁에 앉는다       기억이 앉아 있는 자리에 민들레가 ..

글/습작 2024.04.27

어여쁜 웃음 뒤엔 그 사람이 서 있다

어여쁜 웃음 뒤엔 그 사람이 서 있다             문이 여닫힐 때마다    그 안의 나무들이 기울고    깔고 앉은 책들에서는    더 이상 불이 타오르지 못한다      당신은 외투를 집어 들고    해변으로 걸어간다    얼기 시작한 귀를 뜯어내어    막 떠오른 흰 새에게 붙여준다      닫힌 문 안쪽에서 말들이 뛰고    멎지 않는 피처럼 눈이 내리는 저녁    망치질 소리가    내 귀 안에 쌓이고    - 윤은성, '밤의 결정'에서 ("주소를 쥐고", 문지 2021)       오지도 않을 전화를 기다리면서 손에 꼭 쥔 실타래에선 번번이 툭 끊어진 실을 만질 때가 있다       끄트머리를 안다는 일은 되감고 매듭을 짓고 이어 붙이는 일들을 함께 안다는 것이어서    전화기의..

글/습작 2024.04.26

유보적인 단어들

유보적인 단어들       이상하지 않니    저 아름다움을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움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어     문을 열면 어둠이 이동한다     눈밭 위에서 우리는 덜 검은 것이라 불리기에 적당했다    입고 온 하얀 스웨터를 부를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 김리윤, '비결정적인 선'에서 ("투명도 혼합 공간", 문지 2022)       한참을 서성였다    마지못해 한 마디 말이 식사 인사라면 우린 헤어졌을까    끝끝내 답을 찾지 못하였고     함께 한 시절들이 있어서 좋았다     어느 차가운 겨울밤 네가 건네준 따뜻한 위로처럼    어느 선선한 새벽에 말갛게 웃던 네 대화창처럼    때때로 신선한 기운은 연초록 잎으로 무성하고     함께 그리워한 시절들도 있었다     어느 ..

글/습작 2024.04.25

저녁에 내린 봄비

저녁에 내린 봄비 우리는 옥상에서 젖은 몸속으로 무덤 냄새가 추락할 때까지 서로의 빛을 마시며 십자가를 태워 올렸다 너무 아름다워서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믿었다 - 최백규, ‘너의 18번째 여름을 축하해’에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2022) 비가 내린다 봄비가 내린다 봄비는 자기의 정체성이 아니라며 나무 바람 햇살 풀꽃이 더 가깝다며 오늘은 바람이 불어서 좋았다면서 봄비가 내리고 있다 봄비를 맞으러 밖에 나간다 #

글/습작 2024.04.24

우리의 노래가 한 줌 모래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노래가 한 줌 모래가 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부르던 노래가 떠올랐다 이 광장을 벗어날 수가 없구나 이 노래는 끝나지 않는구나 매일 밤 모든 길은 광장으로 이어졌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그랬다 - 강성은, '밤의 광장'에서 (Lo-fi, 문지 2018) 우리의 노래가 한 줌 모래가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모래성을 쌓는 소녀를 불러내고 소녀로 하여금 하얀 모래성을 쌓게 만들고 비바람에 모래가 씻겨 설령 소녀가 울어도 등을 토닥이면서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면 때때금 잔혹한 상처들은 모래성만도 못해 노래가 사라진 광장에는 햇볕만 가득하고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 속 맑은 한 점 구름 유일하게 오갈 수 있는 교통수단? 이 낙타 다시 낙타의 볼을 쓰다듬고 함께 대화하면 너 왜 자꾸 반말이야? 미안해..

글/습작 2024.04.23

덴마크로 떠난 미인

덴마크로 떠난 미인 나는 같은 남자와 두 번 연애에 빠졌고 두 번 작별인사를 했다. 안녕. 택시는 종로1가에서 종로2가로, 동대문으로 미끄러지듯 미끄러지고 있었다. 안녕. 낙엽 몇 장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경관 한 명이 갑자기 모자를 벗어던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몽둥이가 공기를 휘저어댔다. 너무나 깨끗한 거리였고 어느 누구도 겁에 질리지 않았다. 달리는 사람은 헉, 헉, 헉, 입김을 내놓는다. 낙엽 몇 장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 김행숙, '깨끗한 거리'에서 (이별의 능력, 문지 2007) 백만 원을 훔쳐 달아난 직원을 쫓고자 온 직원이 수소문하며 혼비백산인 동안 나는 시큰거리는 허리채만 붙잡은 채 찡긋, 하며 사라지던 표정을 기억했고 덴마크에서 살고 싶어요 이랬다면 또 단서가 될까... ..

글/습작 2024.04.22

그토록 부끄러웠던

그토록 부끄러웠던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 김소연, '다른 이야기'에서 (i에게, 아침달 2018) 처음 만난 날에 오천 원 삥을 뜯었다. 친구들 술값을 내주느라 집에 갈 차비도 털려 하교하던 길의 오늘 처음 본 표정을 붙잡고 삥을 뜯었다. 문학회를 탈퇴했던 바람에 금방 도로 갚지도 못해 한참 동안을 서성였다.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조용히 앉아 ..

글/습작 2024.04.20

사월의 아침이 잔인하다면

사월의 아침이 잔인하다면 나로부터 사과 한알이 떨어진다 덜 익은 껍질을 속옷처럼 입고 거리와 부딪친다 사월이 주워 담지 못한 한마디 끝없이 구른다 사월이 끝나도 나는 끝나지 않듯이 - 한재범, '사월이 좋아'에서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창비 2024) 꽃잔디가 한가득인 거리엔 봄바람이 일고 봄의 바람이 몽글한 구름들 곁으로 흐르면 이윽고 아침이 찾아온다 초미세먼지가 가득한 창문 밖을 쳐다보면 마스크를 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함께 걷고 있다 초미세먼지만 평등한 것이지 마스크는 그렇지가 못해 간밤에 흩뿌려진 대화들이 차곡차곡 쌓인 숫자들만 어김없이 시간을 재촉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순간에도 계속 누군가는 밀어를 시도했지만 또 누군가는 애써 외면하고픈 시절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는..

글/습작 2024.04.19

조급해지지 말기

조급해지지 말기 11월부터 성탄절 트리 켜놓듯 사람들은 피지도 않은 벚꽃축제 일정을 잡고 피지도 않은 연꽃모양 등으로 초파일을 맞고 또 설 연휴까지 켜둔 트리처럼 눈처럼 벚꽃이 다 지면 가을까지 그리워하고 큼지막한 연잎이 모두 시들 때까지 지켜본다 조급해지지 말기 사랑이 덧난다 기다림과 그리움은 제각각의 분량이 있었고 더 오래라 늘어나지도 짧다고 줄지도 않아서 그저 정주행하면 그만일 법 이게 각자의 최선이기 때문 조급해지지 말기 속절없는 그리움만큼 녹슨 상처 #

글/습작 2024.04.18

솟대

솟대 오리백숙을 먹은 다음날 아침 전지를 한 나무 끝 매달린 하늘 밤새 오리가 날았었나 봐 사람과 하늘을 이어준다 믿었고 가지를 쳐낸 확신도 굳건했겠지 정작 오리는 하늘을 날지 못해 밥상 위에 올려졌을 뿐 가끔 오리를 닮은 이가 등장해서 나만 믿으라고, 거침없는 말들 속 푸른 날개를 혹 가졌나 훔쳐보면 의심하는 버릇만 생겼어 밥상 위의 오리를 품평하는 동안 어김없이 하늘은 가지 끝에 걸려 맘만 먹어도 오를 수 있었을 텐데 비평하는 게 제일 쉬웠어 질문은 해도 판단을 않는다는 게 날아오른다던 오리를 믿어 본 일 어젯밤 역시 그렇다면 다행일 법 #

글/습작 2024.04.18

쓰린 속을 부여안은 채 너는

쓰린 속을 부여안은 채 너는 엑스트라 배우가 카메라 조명을 벗어나 무심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진단을 받고 치료를 포기하고 혼자 깨어나 천장을 바라보는 새벽 어둠이란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다. - 이장욱,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중에 ("음악집", 문지 2024) 흐려진 화면 위 몇 개의 물방울이 떨어지던 순간 기어코 아무 말없이 화면을 닫은 적이 있었다 이른 새벽 쌀쌀한 공기 그제부터는 역류성 식도염 약을 먹기 시작했고 초여름의 한기가 약기운처럼 몸속을 파고든다 따뜻해지면 좋겠어, 좋겠어서 이불을 다시 감싸 쥐고 누워서 물끄러미 예전 대화들을 되짚어보는 순간이 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동이 트는 일만 같아서 단 한 번 절망한 적 없이 인내심을 키워온 것뿐 때때로 반갑게 인사하던 때를 그리워한다..

글/습작 2024.04.18

확고부동한 미래, 광화문에 피던 수국

확고부동한 미래, 광화문에 피던 수국 그 밤을 묻힌 붓은 이미 붓을 초과하는 무엇이고 그 붓 지나간 자린 모조리 한밤중 텅 빈 골목이 되어 누군가 밤새 그곳을 서성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서 있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거기 놓인 문진의 무게만큼이나 확고 부동한 밤 - 황유원, '검고 맑은 잠' 중에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학동네 2023) 따갑기만 한 봄볕 아래 광화문 거리를 거닐다 수국이 피던 자리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았어 지난 여름 어느 한 저녁, 어두운 골목에서 너는 연초록으로 물든 수국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 - 하얗게 핀 네가 금세 연초록으로 변하던 순간 넌 이제 수선화도 물망초도 아닌 연초록 수국 일방적 선언을 하였을 때, 수선화를 닮았던 네 표정도 함께 투명해졌어 투명하기만 한 여름을 ..

글/습작 2024.04.17

봄비

봄비 봄비를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봄비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봄비 맞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봄비를 좋아하게 되었고 빗방울이 두드린 장독대에 앉아 스스럼없이 경청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좋아한 봄비가 내립니다 주초부터 내내 내리고 있습니다 불쑥 우울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오지 않은 안부들을 궁금해 하다 턱 하고 목이 막힙니다 가파른 사연마다 걱정이 앞섰고 주체 못할 전화기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봄비를 싫어하게 되었고 장독대를 피하며 처마 끝에 서서 물끄러미 빈 하늘을 보곤 합니다 그렇게 싫어한 봄비가 내립니다 주초부터 내내 내리고 있습니다 즐거운 저녁인사를 들었습니다 추적추적 빗방울 속을 거닐면서 내내 생각했습니다 계절이 오고 가는 이치는 차마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몰라 야속하리만큼 담담할 뿐인데... ..

글/습작 2024.04.16

반성

반성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진은영, '청혼' 중에 (계간 2014년 가을) 빈 잔 위로 한꺼풀의 시간이 쏟아지면 이윽고 반성의 향기가 함께 스며들곤 해 그윽해진 사연들을 단숨에 훌쩍 비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망각의 병을 찾고 그렇게 잊힌 시간들 틈에서 때때로 우린 스스로 고독해지는 법을 배웠을까 몰라 여전히 햇빛은 찬란하고 어깨는 가볍고 비가 그친 종로에서 물끄러미 본 그림자 사람이 사람을 배워간다는 일 사람이 사랑을 배워간다는 일 # 진다

글/습작 2024.04.16

욕망, 부질없음에 관하여

욕망, 부질없음에 관하여 모처럼 단잠에 빠졌다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그런 걸 소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내 주변엔 많다 어제나 오늘로 충분한 게 아니고 내일이 과분해서 그런데 사랑은 해야겠지 얼마나 정직할 수 있을까 돈과 노동과 사랑 앞에서 정직한가 돈과 노동과 사랑은 만져지지 않는 부위가 만져지기를 바라는 그런 걸 소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인 것 - 고선경, '돈이 많았으면 좋겠지' 중에 ("샤워젤과 소다수", 문학동네 2023) 스스럼없이 바란다는 게 부질없음은 그걸 제대로 상실해 본 다음에 느낄 법 오늘도 마리는 산책을 가자 조르지만 매일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몰라도 열심히 자주 산책을 시켰으면 좋겠어 적어도 남한테 피해를 주진 않으니까 세상 일들이 맘처럼 그리 편하지 않아 눈치도 살펴야..

글/습작 2024.04.15

인연

인연 어디서든, 우리는 텅, 텅 비어, 머리카락 몇 개가 날릴 뿐이었다. 누가 돼지를 칠 것인가. 닭들은 달을 향해 날아올랐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얼룩덜룩, 재치 있는 말들이 달을 향해 울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는. 아무것도.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시인해야만 했다. - 서정학,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중에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지, 2017) 날 선 고독이 옆자리의 손짓을 외면한 채 제 발등만 노려보는 계절이 있어 노려본다기보다는 어쩌면 응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삶에 대한 깨달음은 항상 어떤 계기를 두고 뒤늦게 발동하기 시작해 스스로 가파른 무덤에 오르게 되면 함께 할 벗들도 사라져 온전히 제 혼자의 힘으로 정상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걸 ..

글/습작 2024.04.08

껌 종이를 열자 반짝이는 은색이었다 무수한 햇빛이 그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너무 환하게 웃는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벌써 몇십 년째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 - 김선오, '껌 종이' 중에 ("사랑에 대답하는 시", 아침달, 2021) 껌을 좋아한다며 종류도 여러 가지인 걸 차곡히 쌓아놓는 버릇 한 번도 같은 종류를 꺼낸 적 없었고 문학회 후배가 낙서장에 대고 썼던 얘기 단물 다 빠지면 아무렇게나 툭 뱉는 인연 같아 후배를 그런 취급하지는 말아 달라던 읍소였고 졸업하고 선배들을 그런 취급했던 건 그 후배 성공하지 못하면 서러운 법 하다못해 부모님 장례식장에 면이라도 서려면 그립다는 말 한 마디조차 못해본 채로 껌이 되어 수십 년을 함께 살았어 이젠 그만 한 번 뱉은 껌을 도로 씹는 일도 없으니까 무..

글/습작 2024.04.06

연분홍, 연초록,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퍼플, 2024)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연분홍, 연초록 단편집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차례 작가의 말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졸업 오이도 북극곰과 두더지의 상관관계 ( 빈 칸을 채우시오* ) *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헤이리의 가을, ...... ※ 에필로그 (벚꽃, 종로학파)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작가의 말 처음 습작을 하던 때가 기억난다. 하룻밤에 쓴 소설들이 태반이며, 하나같이 치기 어린 잡글이기 일쑤였다. 그 흔적들을 묶어보는 까닭은? 일종의 출사표 같다는 생각일 뿐.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 2024년 봄 호수를 품은 정..

2024.04.06

벚꽃

벚꽃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 진은영, '청혼' 중에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여름을 재촉하는 봄볕 눈밑에 혓바늘이 돋는데 분홍빛 구름을 닮았구나 봄의 천사들이 내려앉았나 연신 사진 속 모델이 되고 순식간에 찾아온 꿈처럼 느닷없는 안부에 놀라고 반갑고 또 아리기만 해서 그해 겨울 함께 먹다 남긴 솜사탕처럼 편지를 주고받던 마음처럼 온기와 함께 녹아 흐르고 꽃잎이 녹아 흐른 냇물에 다시 봄비가 찾아올 테고 봄비가 두드리는 화음을 텅 빈 듯 고즈넉한 지혜를 네게 향하는 법을 배울게 #

글/습작 2024.04.03

촌음의 경계

촌음의 경계 서로가 서로를 돌고 돈다 인간관계의 고민은 서로가 서로 사이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날들로 인해 생긴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밤에 맨발바닥에 모래가 서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땅이 아주 가깝게 발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느낀다 - 박형준, 「밤의 소리」 중에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문학동네, 2023) 촌음의 경계를 마다한 채 우리는 관계라는 낱말의 그림자를 찾아 문밖을 서성댑니다 가파른 달빛이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안 벚꽃이 하나둘 피었다 지고 봄이 금세 저물어감을 알아챕니다 이른 겨울밤마다 온통 기다려온 봄임에도 벌써 이렇듯 저문다는 일에 항상 익숙해져만 갑니다 고민하지 않기 위한 방편을 세월만큼 배워온 까닭입니다 그만큼 늙어간 탓입니다 설렘도 없이 그리움도 없이 무덤..

글/습작 2024.04.02

사월의 꽃이 지려면

사월의 꽃이 지려면    겪어봐야 안다    지금 피는 꽃들을 보며 왜 늦었냐며 눈을 흘기느니 싸락눈처럼 흩날릴 낙화를 예견하는 편이 낫다    오고 가는 일이 찰나임을 안다    와도 가고 없고 가도 또 오고야 만다    계절은 무시로 한결같은 바람    철마다 피고 지는 마음은 없으니    올 때는 가고 갈 때는 올 때를 먼저 생각하는 일    그래서 겪어봐야 안다    자연의 법칙을 감정의 스산함을    스산해질 일이 없도록    눈을 흘기지 않는다    고맙다는 말부터다    금세 피고 지는 꽃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올 때는 그저 반가울 법    갈 때는 그저 축복일 법    받아들이자    인연의 부산스러움을    더 큰 마음도 있음을    #

글/습작 2024.04.01

정독, 종로학파, "83일 동안의 짤막한 여행" (퍼플, 2023)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83일 동안의 짤막한 여행 정독, 종로학파 단평집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차례 저자의 말 2023년 5월 25일 (목) 2023년 5월 26일 (금) 2023년 5월 27일 (토) 2023년 5월 28일 (일) 2023년 5월 29일 (월) 2023년 5월 30일 (화) 2023년 5월 31일 (수) 2023년 6월 12일 (월) 2023년 6월 13일 (화) 2023년 6월 14일 (수) 2023년 6월 15일 (목) 2023년 6월 16일 (금) 2023년 6월 19일 (월) 2023년 6월 20일 (화) 2023년 6월 21일 (수) 2023년 6월 22일 (목) 2023년 6월 23일 (금) 2023년 ..

2023.10.13

단테, 종로학파,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퍼플, 2023)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단테, 종로학파 시집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차례 시인의 말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침묵보다 더 고요한 죽음의 행진 바비도 기행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게 있다면 동지들 남긴 술잔엔 태풍의 눈 그해 여름은 이렇게 끝나버리고 시인 류시화씨와의 대담 밤의 말들 겨울, 그리운 집 그래 이렇게 사랑하고 난 다음 노란 신호등 배우, 배우의 연인, 배우의 아빠 거위의 꿈 망상과 기억 사이 사랑의 변주곡 챗GPT로 쓴 '이음 1977' 2035년, 우리가 살던 아파트 외벽 더 글로리 꽃샘추위, 3월의 함박눈이 익숙한 시대 술이 덜 깬 아침 마리를 위하여 동물도 그들처럼 양극화 사..

2023.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