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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인연 어디서든, 우리는 텅, 텅 비어, 머리카락 몇 개가 날릴 뿐이었다. 누가 돼지를 칠 것인가. 닭들은 달을 향해 날아올랐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얼룩덜룩, 재치 있는 말들이 달을 향해 울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는. 아무것도.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시인해야만 했다. - 서정학,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중에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지, 2017) 날 선 고독이 옆자리의 손짓을 외면한 채 제 발등만 노려보는 계절이 있어 노려본다기보다는 어쩌면 응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삶에 대한 깨달음은 항상 어떤 계기를 두고 뒤늦게 발동하기 시작해 스스로 가파른 무덤에 오르게 되면 함께 할 벗들도 사라져 온전히 제 혼자의 힘으로 정상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걸 ..

글/습작 2024.04.08

껌 종이를 열자 반짝이는 은색이었다 무수한 햇빛이 그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너무 환하게 웃는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벌써 몇십 년째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 - 김선오, '껌 종이' 중에 ("사랑에 대답하는 시", 아침달, 2021) 껌을 좋아한다며 종류도 여러 가지인 걸 차곡히 쌓아놓는 버릇 한 번도 같은 종류를 꺼낸 적 없었고 문학회 후배가 낙서장에 대고 썼던 얘기 단물 다 빠지면 아무렇게나 툭 뱉는 인연 같아 후배를 그런 취급하지는 말아 달라던 읍소였고 졸업하고 선배들을 그런 취급했던 건 그 후배 성공하지 못하면 서러운 법 하다못해 부모님 장례식장에 면이라도 서려면 그립다는 말 한 마디조차 못해본 채로 껌이 되어 수십 년을 함께 살았어 이젠 그만 한 번 뱉은 껌을 도로 씹는 일도 없으니까 무..

글/습작 2024.04.06

연분홍, 연초록,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퍼플, 2024)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연분홍, 연초록 단편집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차례 작가의 말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졸업 오이도 북극곰과 두더지의 상관관계 ( 빈 칸을 채우시오* ) *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헤이리의 가을, ...... ※ 에필로그 (벚꽃, 종로학파)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작가의 말 처음 습작을 하던 때가 기억난다. 하룻밤에 쓴 소설들이 태반이며, 하나같이 치기 어린 잡글이기 일쑤였다. 그 흔적들을 묶어보는 까닭은? 일종의 출사표 같다는 생각일 뿐.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 2024년 봄 호수를 품은 정..

2024.04.06

'2판'이라는 숙제, 일단은 '2쇄'부터

이른 새벽부터 작업을 해 꽤나 어렵게 마무리를 했다 사실 '퇴고'라는 일은 늘상 해오던 일임에도, 막상 '개정판'을 염두에 둔 작업들은 그리 익숙치가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시집과 단평집을 좀 더 가독성이 좋도록 조판의 형태를 변경하였고, 표지 디자인 역시 조금씩 손을 다시 보았다 이제 문제는 앞으로의 '퇴고'다 그것에 따라 실질적인 '초판 2쇄'가 아닌, '2판'의 발행을 남겨놓게 되는 셈이다 (언제쯤에?) # 시집, https://dante21.tistory.com/4504 단테, 종로학파,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퍼플, 2023)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단테, 종로학파 시집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개인노트 2024.04.05

벚꽃

벚꽃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 진은영, '청혼' 중에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여름을 재촉하는 봄볕 눈밑에 혓바늘이 돋는데 분홍빛 구름을 닮았구나 봄의 천사들이 내려앉았나 연신 사진 속 모델이 되고 순식간에 찾아온 꿈처럼 느닷없는 안부에 놀라고 반갑고 또 아리기만 해서 그해 겨울 함께 먹다 남긴 솜사탕처럼 편지를 주고받던 마음처럼 온기와 함께 녹아 흐르고 꽃잎이 녹아 흐른 냇물에 다시 봄비가 찾아올 테고 봄비가 두드리는 화음을 텅 빈 듯 고즈넉한 지혜를 네게 향하는 법을 배울게 #

글/습작 2024.04.03

촌음의 경계

촌음의 경계 서로가 서로를 돌고 돈다 인간관계의 고민은 서로가 서로 사이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날들로 인해 생긴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밤에 맨발바닥에 모래가 서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땅이 아주 가깝게 발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느낀다 - 박형준, 「밤의 소리」 중에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문학동네, 2023) 촌음의 경계를 마다한 채 우리는 관계라는 낱말의 그림자를 찾아 문밖을 서성댑니다 가파른 달빛이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안 벚꽃이 하나둘 피었다 지고 봄이 금세 저물어감을 알아챕니다 이른 겨울밤마다 온통 기다려온 봄임에도 벌써 이렇듯 저문다는 일에 항상 익숙해져만 갑니다 고민하지 않기 위한 방편을 세월만큼 배워온 까닭입니다 그만큼 늙어간 탓입니다 설렘도 없이 그리움도 없이 무덤..

글/습작 2024.04.02

사월의 꽃이 지려면

사월의 꽃이 지려면    겪어봐야 안다    지금 피는 꽃들을 보며 왜 늦었냐며 눈을 흘기느니 싸락눈처럼 흩날릴 낙화를 예견하는 편이 낫다    오고 가는 일이 찰나임을 안다    와도 가고 없고 가도 또 오고야 만다    계절은 무시로 한결같은 바람    철마다 피고 지는 마음은 없으니    올 때는 가고 갈 때는 올 때를 먼저 생각하는 일    그래서 겪어봐야 안다    자연의 법칙을 감정의 스산함을    스산해질 일이 없도록    눈을 흘기지 않는다    고맙다는 말부터다    금세 피고 지는 꽃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올 때는 그저 반가울 법    갈 때는 그저 축복일 법    받아들이자    인연의 부산스러움을    더 큰 마음도 있음을    #

글/습작 2024.04.01

김리윤, '재세계reworlding' (1월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베껴쓰고 다시읽기] 1월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 재세계reworlding 지나간 일은 다 잊자 지나간 일은 다 잊는 거야 그는 이 대사의 다음 장면에서 죽었다 영화 속에서 영화는 계속될 것 같았고 그 사람은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잊게 될 것이다 휴대폰 불빛이 신경 쓰여서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어 극장에 꽉 들어찬 어둠은 그 작은 불빛 하나 숨겨주지 못하고 주인공은 12월 밤거리의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오래된 거리를 걸으면 가로수들은 영원히 자랄 것 같다 정원사의 손에서 떨어지는 잎사귀와 뚝뚝 분질러지는 나뭇가지의 미래를, 잔디가 깎이는 동안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통을 다 기억하면서 12월엔 어디에서나 커다란 나무에..

문학노트 2024.02.01

일요일 저녁, 월요일 새벽

새벽 두시 저녁 때 먹은 엽기떡볶이랑 소주에도 단잠은 여지없이 잠을 깼고 이제 도 새로운 한주를 맞을 차례 간밤의 그녀들은 모두들 침묵한 채 그저 '시절인연' 뿐임을 역설하고 난 기어코 두 명의 이름을 전화에서 지웠다 박연정과 송은주. 비로소 떠나보낸다. 아무 미련도 없을 것 아무 그리움도 없을 것 여기까지가 상대방에 대한 예의일 것 그녀는 이제 없다 '가벼운 지인'들 뿐 - 그걸로도 족하다 새로운 한주다 직장보다도 더 먼저 마음이 가는 일들 글쓰기와 동인지와 신명이 날 일들 우선 해보도록 하자 -

개인노트 2024.01.29

손유미, '날씨의 숲 연인의 방' (기성 문단이 찾는 "새로운 목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베껴쓰고 다시읽기] 기성 문단이 찾는 "새로운 목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 날씨의 숲 연인의 방 허공을 꼬집으면 바람 음을 맞춰 이를 가는 작은 천둥 창문엔 내내 비가 내린다 숲 한가운데에서 연인은 머리채 잡힌 인어처럼 흔들리고, 식욕이 팽배해져서 구름 사경을 헤매다 눈을 맞춰 벼락 서로가 하나도 둘도 아니라는 함정에 빠져 돌연 안개 수렁 수렁 비는 잦아든다 언젠가의 슬픔처럼 그러나 수렁 수렁 언제나의 비는 서로를 휘감고 누워 * 손유미, 탕의 영혼들 (창비, 2023) "그의 언어는 불편하지만 한순간 날카롭고, 격렬하지만 빈틈이 적었으며, 퓨전과 키치를 연상시키되 그것을 간단히 넘어선 자리에서 생활과 조우한다... 심사자들은 이 낯선 재능에서 쉽게 요해되지 않는 세계를 구축하는 힘을 읽었다" ..

문학노트 2024.01.27

주민현,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공식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법)

[베껴쓰고 다시읽기] 공식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법 :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땐 비스듬하게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요 사진기를 모자처럼 쓰고요 철로 위로 방금 뜬 해가 빛날 때 그러나 해는 늘 가려져 있던 것이고 오래된 베레모와 벨루가의 장난기를 섞어 삶의 증오와 미움을 한 발짝 맛있게 끓여요 철로에 앉은 제각기 다른 머리색만큼이나 우리의 고민은 풍요롭고요 양들이 씹어 먹는 게 이야기라면 흰빛들이 세상엔 불어날 거지요 내가 쓰는 이유 당신이 말하는 이유 우리가 말하는 것들 오래된 산책 속에는 극장과 서점이 사라진 도시가 있고 폐업, 폐쇄, 반복되는 임시 개점과 휴업 선생님, 임대료는 점점 높아지고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고 당신이 말하지요 조용하고도 요란스럽게 내리는 비..

문학노트 2024.01.26

김중일,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시적 '효용'에 관한 물음과 유별난 '취미' 활동)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적 '효용'에 관한 물음과 유별난 '취미' 활동 :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 지금 만나러 가는 너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도 직업일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대답한다. 시인은 가장 큰 직업이다. 마치 스스로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다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가장 큰 직업'이란 말이 좀 걸린다.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 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큰 직업'이란 당최...... 무엇일까,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노동하여 집을 지으면 폭풍이 와도 ..

문학노트 2024.01.25

정현우, '소멸하는 밤' (박형준과 정호승의 변증법적 통일)

[베껴쓰고 다시읽기] 박형준과 정호승의 변증법적 통일 : 소멸하는 밤 흰 어둠이 잠들지 않는 거리, 나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 지난 사랑이 모두 헐거워지는 창문 아래, 눈물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 그러니 우리를 울게 하는 것들은 힘껏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는 것입니까, 어둠을 지우려 우는 별자리들이 느리게 첫눈으로 떨어집니다. 겨울 구름 위로 숨 하고 내미는 입술, 흰 두 뺨이 젖듯이, 베갯잇에서 우우 하고 우는 얼굴, 가장 죽고 싶을 때와 가장 살고 싶을 때의 얼굴은 밤마다 꿈속에서 끝없이 다가오는 얼굴들, 죽은 아이들과 죽은 엄마들과 죽은 모두가 투명한 이파리처럼 흔들릴 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추모는 내가 할 수 없어서 나는 슬퍼야 합니까, 낯빛들이 피어오르는 숲, 별자리는..

문학노트 2024.01.24

김명인, '침묵' (말을 줄여가는 시절)

[베껴쓰고 다시읽기] 말을 줄여가는 시절 : 침묵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

문학노트 2024.01.23

천양희, '너에게 쓴다' (뒤늦은 한파, 보름을 앞둔 입춘)

[베껴쓰고 다시읽기] 뒤늦은 한파, 보름을 앞둔 입춘 : 너에게 쓴다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 천양희,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작가정신, 1998) 대한을 거쳐온 새로운 한 주는 뒤늦게 한파가 불어닥칩니다. 눈앞의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머지 않은 입춘을 헤아려볼 마음도 필요한 때입니다. 천양희 시인은 여럿의 유명한 작품을 남겼지만 뭐니뭐니해도 교보문고 간판에 내걸었던 이 시가 가장 널리 알려진 편이어서 역시 뒤늦게 꺼내봅니다. 중견 이상 시인의 작..

문학노트 2024.01.22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사이좋게 지내기'에 관하여)

[베껴쓰고 다시읽기] '사이좋게 지내기'에 관하여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듯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문학노트 2024.01.19

이유운,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 ('시창작 강의'가 시집제목이 되기도 하는 시대)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창작 강의'가 시집제목이 되기도 하는 시대 :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 ​ 당신이 또 여름이 왔다고 말하는 것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내 등을 바람으로 깎아놓은 거친 손으로 훑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가락 끝이 유독 단단했던 당신의 손톱은 언제나 창백한 회청색이었다 손톱이 왜 파랗지요 하고 물으면 요 안에는 바람이 담겨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던 당신의 입술에는 뼈가 없었다 당신의 손이 습한 등을 훑으면 와사삭 소름이 돋아서 정말로 당신의 손톱에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바람으로 나를 만지며... 내 등뼈는 당신 덕에 조약돌처럼 둥글어졌다 그리하여 아주 먼 미래에 누군가 내 등을 만지면 나는 바람으로 깎여 둥글고 부드러운 짐승이 되어 있었다 ​ 나는 그 먼 미래를 생각하..

문학노트 2024.01.18

이성부, '봄' (다시금 '고전'을 '고전주의'를 생각함)

[베껴쓰고 다시읽기] 다시금 '고전'을 '고전주의'를 생각함 :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민음, 1974) 1998년의 창비 홈페이지는 "글이 있는 뜨락"이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문지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 역할을 ..

문학노트 2024.01.17

황지우,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너무 이른 기다림,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베껴쓰고 다시읽기] 너무 이른 기다림,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 ㅡ 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장사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지, 1999) 오랜만에 황지우 시집을 ..

문학노트 2024.01.16

황인찬,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얼터너티브"가 유행했던, 유행할 미래)

[베껴쓰고 다시읽기] "얼터너티브"가 유행했던, 유행할 미래 :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민음, 2012) 벌써 12년이나 지난 옛 시집을..

문학노트 2024.01.15

조연호, '입춘 부근' (대한을 앞둔 채 벌써 '봄'을 기다리는)

[베껴쓰고 다시읽기] 대한을 앞둔 채 벌써 '봄'을 기다리는 : 입춘 부근 그 입춘 부근은 너무나도 따사로워 나는 제방에 걸터 앉아 못생긴 꽃의 꽃말을 외웠다. 아무도 떠나지 않은 자리에 마음이 머물던 자국만 남아 있다. 어떤 책을 펼쳐 읽어도 마음 좋은 청춘은 만날 수 없던 날, 들풀이 머리칼처럼 야윈다. 늙은 개암나무 곁에서 허리를 굽혀 봄볕의 마음을 줍는다. 내가 꽃말을 외울 때마다 거짓으로 잎순이 부풀어 올랐다. 가난한 애인과 함께 부자의 마을에서 헤픈 상대방이 되고 싶던, 내 그리움이 가시에 찔려도 터지지 않았다. 따사로운 나무둥치들이 어린 양처럼 매매 울며 어미 숲을 부른다. 쑥 냄새가 나는 길을 걸었고 그 길가에 호들갑스레 꽃 피고 여동생의 책가방에서 화장품이 쏟아졌다. 찌처럼 조용히 그늘 ..

문학노트 2024.01.14

창작동인 뿔, '어제의 꿈은 오늘의 착란' (창작 커뮤니티들의 롤모델, 창작동인 뿔)

[베껴쓰고 다시읽기] 창작 커뮤니티들의 롤모델, 창작동인 뿔 : 어제의 꿈은 오늘의 착란 소음 속에서 귀를 막으면 파도 소리가 들리나요 손가락을 죄다 자른다면 더는 편지를 적지 않아도 되나요 모든 편지에는 그립고 슬프다는 말을 적어야 하나요 밤하늘도 저렇게 많은 알약을 삼켰다고 하지 않았나요 박하잎을 씹으면 두 눈이 시큰거려요 발끝에서 바다가 죽어가요 어젯밤 꿈은 전부 증발해버렸는데 어지러워요 나는 어지러운 사람이에요 무엇을 말해야 하나요 무엇을 듣고 싶나요 귀를 막으면 알 수 있나요 귀를 막고 눈이 멀면 손끝이 예민해지나요 무엇을 만져야 하나요 무엇이었나요 어둠 속에서 내가 더듬거렸던 것은 끝, 눈물, 다음에 계속 물밀 듯이 밀려오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눈앞을 가리는 건 꼭 눈물이어야 하나요 볼 수 없다..

문학노트 2024.01.12

한백양, '왼편' ("더블"의 영광과 "불혹"의 한 정점)

[베껴쓰고 다시읽기] "더블"의 영광과 "불혹"의 한 정점 : 왼편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

문학노트 2024.01.11

박참새, '새시대' (<시대와의 불화>, 참새와 허수아비)

[베껴쓰고 다시읽기] , 참새와 허수아비 : 새시대 저는 미쳤어요 유유상종 끼리끼리 그러니까 내 친구들 모두 시인이었단 말이죠 얼마나 좋았겠어요 우리끼리만 읽을수 있었거든요 우리끼리는 뭐든 다 좋다고 그랬거든요 객관적으로도 사실이었어요 저는 미쳐서 이게 사랑이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못 썼어요 사랑 시 사랑 시 생각만 하느라 사랑은 보이지 않으니까 내 눈 앞에 살아 있는 사랑 사람들 그것만 보려고 언제 달라질지 모르는 마음이니까 뚫어져라 보기만 했어요 나서지도 못하고 혼자서 공공 앓았어요 가끔은 그랬어요 나 사랑 좇도 모르는 거 같아 사실이에요 나는 미쳤잖아요 미친년이 사랑하면 미친 사랑이지 사랑은 아니잖아요 돌아 버리잖아요 그래서 못 쓰는거예요 나도 쓰고 싶다 사랑 시 사랑 사랑 할 때마다 피치 못하게 쓸..

문학노트 2024.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