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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생활의 발견' (진부하다, 직설적이다, 상상력이 부족하다)

[베껴쓰고 다시읽기] 진부하다, 직설적이다, 상상력이 부족하다 : 생활의 발견 ​ 소스 맛에는 중독성이 있다 때로 소스를 맛있게 먹기 위해 돈가스가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돈가스 소스는 돈가스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연구하고 만든 것일 테지만 ​소스만 있으면 어떤 특정 음식의 맛을 상당 정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맨밥에 돈가스 소스를 끼얹어 먹으면 돈가스와 흡사한 맛이 난다 시작법은 시의 소스 제 소스의 레시피를 가진 시인들이 부럽다 언제라도 한 접시 먹음직한 시를 내놓는 그들! 나는 레시피도 없고, 찬장 깊숙한 데서 꺼낸 인스턴트 돈가스 소스는 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났다 그래도 가난한 나는 맛있게 먹지 * 황인숙, (문지, 2016)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같은 제목을 가진 영화가 있지만,..

문학노트 2024.01.09

박정대,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영하 11도의 주초, 다시 '낭만'에 대하여)

[베껴쓰고 다시읽기] 영하 11도의 주초, 다시 '낭만'에 대하여 :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미스터 션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햇살 좋은 아침이면 앞마당으로 나가 빨래를 너오 그곳에 돌배나무, 목련, 배롱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사과나무, 생강나무, 이팝나무, 자작나무들을 심었소 자작나무에는 따로 이름을 붙여주었소 가난하고 아름다운 사냥꾼의 딸, 꽃 피는 봄이 오면, 자작나무 우체국, 레아 세이두, 장만옥, 톰 웨이츠, 김광석, 빅토르 최, 칼 마르크스, 체 게바라, 아무르, 아르디 백작, 상처 입은 용, 짐 자무시, 짐 모리슨, 닉 케이브, 탕웨이, 아르튀르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들, 이들은 가난하고 아름다운 나의 열혈동지들이오 돌배나무는 대낮에도 주먹만 한 별들을 허공에 띄우오 그 여..

문학노트 2024.01.08

박준, '잠의 살은 차갑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다시보기)

[베껴쓰고 다시읽기] 드라마 "나의 아저씨" 다시보기 : 잠의 살은 차갑다 깊은 잠에 빠진 살은 차다 간장에 양지를 졸이는 꿈을 며칠 이어 꾼 것을 두고 나는 마음으로 즐거워했다 으레 그럴 때면 외투를 한 겹 더 입었다 겨울옷의 소매들은 언제나 길고 나는 삐져나온 손끝을 보며 얼마 남지 않은 욕실의 치약과 굳은 치약을 힘주어 짜냈을 안간힘에 대해 생각했다 물건을 새로 뜯지 못하는 나의 버릇을 병이라기보다는 몸가짐이라 부르고 싶었다 이 겨울과 밤과 잠과 아직 이른 순荀과 윗바람 같은 것들은 출현보다 의무에 가까웠으므로 불안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지, 2018) 세밑의 큰 우울함이었던 배우 이선균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사로 (개인적으로는 또는 한 가정의)..

문학노트 2024.01.07

강지수, '면접 스터디' ('현대시'와의 면접을 임하는 태도)

[베껴쓰고 다시읽기] '현대시'와의 면접을 임하는 태도 : 면접 스터디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 소리를 내면 그게 진짜 목소리라고 한다 진짜 목소리로 말하면 신뢰와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자 방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인 채 아 아 아 소리를 낸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이제 그 음역대로 말하는 겁니다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닌 진짜 당신의 목소리로요 엉거주춤 허리를 편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왔고…… 멋쩍은 미소를 짓고 몇 번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다가 불쑥 허리를 접고 다시 아 아 거리는 이도 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손짓한다 이리 와서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쭈뼛거리며 무리의 가장..

문학노트 2024.01.04

"예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수단"

알랭 드 보통의 말, # 상세한 내용, https://ggumsugi.tistory.com/440 알랭드보통의 아름다움과 행복의 예술이런 책인지는 몰랐다. 그냥 알랭드보통의 글을 좋아하는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과 행복이 궁금했는데 공예작가들과 청주국제비엔날레에 전시감독을 했던 내용이었다. 나에겐 물건은 쓸모가 기ggumsugi.tistory.com “예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수단이다. 삶의 경험 중에는 아름답지만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것들이 무수히 많으므로 이를 담아둘 적절한 도구가 필요하다. 예술은 복잡성을 편집하여, 인생의 가장 의미 있는 측면들에 빠른 시간 내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예술가란 시간을 정지시켜 우리가 순간순간 소홀히 지나치는 아름다움과 중요성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을 제 일..

개인노트 2024.01.03

2024, 새로운 출발

누구는 빛나는 '등단'의 차이틀을 안고, 또 누군가는 "신춘문예 재수생"이라는 타이틀로도 다시 새해의 첫 출발점에 선다 등단을 한 이는 후속작들과 첫 시집을, 또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연내에 줄지어 있게 될 각종 문예지들과 연말의 신춘문예를 준비하기 시작할 시점이기도 하고 무릇 "초심을 잃지 말자"는 말과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는 말로 스스로를 또 누군가를 격려하며 응원해본다 첫 출근을 하는 아침,

개인노트 2024.01.02

맹재범, '여기 있다' (2024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베껴쓰고 다시읽기]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는 말 : 여기 있다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

문학노트 2024.01.02

송진권, "원근법 배우는 시간' (한 해의 작도법을 접어놓는 차례)

[베껴쓰고 다시읽기] 한 해의 작도법을 접어놓는 차례 : 원근법 배우는 시간 빼빼 마른 여자가 바닥에 화구를 펼쳐놓고 앉아 있는 집입니다 모르는 돌과 꽃에서 뽑아낸 안료를 색색으로 펼쳐놓고 여자는 처음 보는 새 한 마리를 그려냅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포개지고 겹쳐집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새떼입니다 몇 마리나 되겠냐고 여자는 묻습니다 대답을 못 합니다 덧칠한 그림 위에 또 덧칠된 새들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는 천천히 화구를 걷습니다 문을 닫고 밖을 나옵니다 방 안은 깃 치는 소리 지저귀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옵니다 구름들 지붕들이 쏜살같이 그 집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 새들이 퍼덕이며 날아오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

문학노트 2023.12.29

오규원, '겨울 나그네' (<현대시작법>을 능가할 레토릭에 관하여)

[베껴쓰고 다시읽기] 을 능가할 레토릭에 관하여 : 겨울 나그네 지난 겨울도 나의 발은 발가락 사이 그 차가운 겨울을 딛고 있었다. 아무데서나 심장을 놓고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있었다. 그 곁에서 계절은 귀로를 덮고 있었다. 모음을 분분히 싸고 도는 인식의 나무들이 그냥 서서 하루를 이고 있었다. 지난 겨울도 이번 겨울과 동일했다. 겨울을 밟고 선 내 곁에서 동일했다. 마음할 수 없는 사랑이며, 사랑... 내외들의 사랑을 울고 있는 비둘기 따스한 날을 쏘고 있는 곁에서 동일했다. 모든 나는 왜 이유를 모를까. 어디서나 기우뚱, 기우뚱 하며 나는 획득을 딛고 발은 소멸을 딛고 있었다. 끝없는 축복 떨어진 것은 한대로 다 떨어지고 그 밑에서 무게를 받는 일월이여 모두 떨어져 엄숙히 쌓인 위로 감당할 ..

문학노트 2023.12.27

박준, '숲' (바다가 있던 숲의 기억, 12월 마지막 주)

[베껴쓰고 다시읽기] 바다가 있던 숲의 기억, 12월 마지막 주 : 숲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 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문학노트 2023.12.26

나태주, '화이트 크리스마스'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일)

[베껴쓰고 다시읽기]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일 :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 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문학노트 2023.12.24

박형준, '동지' (영하 20도의 "동지")

[베껴쓰고 다시읽기] 영하 20도의 "동지" : 동지 어느 추운 겨울밤, 머언 옛날이었습니다. 서울역 지하도에 할머니가 박스로 城을 만들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계단으로 눈발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무를 밭에서 막 뽑아낸 듯 사정없이 바람이 허벅지를 도려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갈 곳이 없어 할머니의 성에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습니다. 그 안엔 한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성 담벼락, 할머니의 등뒤에 쪼그려앉아 밀려드는 졸음을 참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느새 나를 향해 돌아앉아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성냥을 그을 때마다 계단으로 밀려드는 눈발이 새벽의 어둠속에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품안에 돋아나는 불꽃이 저의 곱은 손과 차디찬 허벅지에 흰 속살인 듯 속삭이고 있었..

문학노트 2023.12.22

김해자, '꽃잎 세탁소' (그래도 여전히 '양대산맥'... 창비시선의 고군분투)

[베껴쓰고 다시읽기] 그래도 여전히 '양대산맥'... 창비시선의 고군분투 : 꽃잎 세탁소 꽃양귀비 붉은 꽃잎 위에 청개구리가 엎드려 있어서 나도 납작 엎드려 뭐 하나 들여다봤더니, 제 목울대로 꽃의 주름을 펴는 게 아닌가, 그 호박씨만 한 것이 앞발 뒷발로 붉은 천 꽉 부여잡고 꽈리 풍선 불어가며 다림질하는 동안 내 마음도 꽃수건처럼 펴지고 있었다 개망초 하얀 꽃잎 위에 나비가 날개를 접고 있어서 나도 땅두릅 그늘 아래서 올려다봤더니, 계란 노른자 같은 꽃술을 빨아대는 것이 아닌가, 그 상추씨만 한 입으로 꽃잎을 빠는 동안 하얀 베갯잇 같은 구름이 간지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하늘이 갓 세수한 듯 말개지고 있었다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어제는 문지 시인선 594호 소식을 전했는데 오늘..

문학노트 2023.12.18

"행복은 그냥 행복"이라는 말, 하늘

인터넷에서 우연히 주워 듣는 얘기들도 내 고단한 시작활동을 능가해버릴만큼 지혜로운 게 있다면, 과연 내 글쓰기는 무얼 지향해야 할까를 놓고 잠시 생각해보게 되는 일요일... 영하 10도의 파란 하늘, (이하 인용) 류시화 시인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에 소개된 일화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아주 보통의 행복이란? 류시화 시인이 배우 김혜자씨와 네팔로 여행을 갔다가 수도 카트만두 외곽에 있는 유적지를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김혜자씨가 한 노점상 앞에 걸음을 멈추더니 옆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장신구를 펼쳐놓고 파는 여인이었습니다. 그곳은 유명한 관광지라 노점상이 많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나 했더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장신구를 파는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습니다..

개인노트 2023.12.17

박세미, '뒤로 걷는 사람' (문지 시인선 594호의 위용)

[베껴쓰고 다시읽기] 문지 시인선 594호의 위용 : 뒤로 걷는 사람 그에게 세상은 한 발자국씩 넓어지는 것이었다 한 발자국씩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가 걸을 때 옆에서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한 발자국, 사과나무는 불타며 두 발자국, 사과나무는 검게 식으며 세 발자국, 사과나무는 썩은 사과 한 알이 되며 네 발자국,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더러 썩은 사과 한 알이 눈에 맴돌 때면 눈을 감고 이리저리 굴려 녹여 없앴다 그는 최소화된 것들과의 이별에 익숙했다 눈이 오던 어느 날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점이 있었다 그가 한 발자국씩 뒤로 갈 때마다 점은 세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오며 커지더니 다리를 뻗고 손을 흔들며 마침내 웃어 보였다 달려오던 점은 그의 코앞에서 최대화가 되었다..

문학노트 2023.12.17

최하림, '컬럼버스여 아메리고여' (편집은 기억을 단절시킨다)

[베껴쓰고 다시읽기] 편집은 기억을 단절시킨다 : 컬럼버스여 아메리고여 바람 센 지방에서는 지치고 시달린 사나이들이 오랜 날의 바다로 나와 밤 별이 성성한 거리를 걷는다 바다의 비늘에 어린 아주 순수한 소리를 들으며 소리 속으로 들어간다 한 줄의 도로가 흐르는 소리 속으로 소리의 밑바닥에는 쥐들의 짹짹이는 소리 들리고 굶주림이 들리고 쓴 슬픔을 토해내면서 해안의 개들이 컹컹 짖는다 그 개들의 검디검은 울음이 분별할 수 없는 피부를 물들이면서 이방의 거리를 헤매게 하고 언제나 이방인이게 하고 비열함으로 이루어진 걸음을 흔들면서 사방의 나무잎처럼 있는 그대들의 모습 무얼하고 있는가 그대들이여 무얼하고 있는가 그대들이여 개짖는 소릴 듣는가 그대들을 뒤쫓는 소리가 아닌가 쫓기고 쫓겨서 극지로 가거라 그곳의 풍습..

문학노트 2023.12.16

박정대, ‘음악들’ (‘모작’의 한 형태, 화답시)

[베껴쓰고 다시읽기] ‘모작’의 한 형태, 화답시 :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박정..

문학노트 2023.12.15

박준, '바위' (빼어난 문장, 다음 그리고 또 다음...)

[베껴쓰고 다시읽기] 빼어난 문장, 다음 그리고 또 다음... (박준, 바위) : 바위 마름 없는 물이 흘러나오던 바위 아래에는 녹빛의 작은 소沼도 하나 있었습니다 밤이면 아이들이 서로의 서투름을 가져와 비벼대었고 새벽에는 무구巫具들이 가지런히 놓이던 곳입니다 촛농과 술병과 인간의 기도와 아린 혀 들이 오방으로 섞였습니다 어느 해 겨울부터 바위에는 부처가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한 젊은 무당이 그려두고 간 부처의 그림이 가부좌를 틀고 잔설을 덮고 있던 것입니다 비와 눈이 많았던 몇 해가 더 지나자 아이들은 바위 앞에 겁을 벗어두고 시내로 떠났습니다 빛에 바랜 부처의 상반신이 먼저 지워졌고 무당들도 바위로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위에 그려진 부처 그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이 넓어지려 넓어진 것이 아니고 물..

문학노트 2023.12.14

박정대, '내 청춘이 지나가네' (불혹, 다음)

[베껴쓰고 다시읽기] 불혹, 다음 : 내 청춘이 지나가네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 박정대, 삶이라는 직업 (문지, 20..

문학노트 2023.12.13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문창과도 신춘문예도 아닌, 작가들의 '졸업장'은?)

[베껴쓰고 다시읽기] 문창과도 신춘문예도 아닌, 작가들의 '졸업장'은?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 파일명 서정시* 그들은 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줌 손톱 몇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

문학노트 2023.12.12

박준, '겨울비' (이른 새벽을 찾아온 손님, 겨울비)

[베껴쓰고 다시읽기] 이른 새벽을 찾아온 손님, 겨울비 (박준, 겨울비) : 겨울비 비는 당신 없이 처음 내리고 손에는 어둠인지 주름인지 모를 너울이 지는 밤입니다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광장으로 마음은 곧잘 나섰지만 약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는 일이 오늘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귓병을 안도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고 끓인 물을 식히려 두어 번 저어나가다 여름의 세찬 빗소리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나중의 일이 되었습니다 *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지, 2018) 새벽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습니다. 날씨가 제법 이상고온을 기록하더니 영락없는 겨울비인 듯합니다. 얼마전에 재회한 한 친구로부터 이사 소식을 들어 잠에서 깨자마자 대뜸 걱..

문학노트 2023.12.11

황지우, '길' (인생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베껴쓰고 다시읽기] 일생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 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문지, 1990) ... "사람들은 희망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거짓말한다. 나는 폐인이 되고 싶다. 나는 완성하고 싶다." "희망의 대답은 대개 둘 중의 하나다. 즉 길흉 중의 하나이다. 이 삶을 다시 살고 싶다고 후회할 때, 그때는 이미 삶을 상당히 살아버린 뒤이다. 거짓말은 끊을 수 없는 유혹이어서 세상에서..

문학노트 2023.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