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습작

그토록 부끄러웠던

단테, 연분홍/연초록, 정독, 그리고 종로학파 2024. 4. 20. 06:02

  
  
  
   그토록 부끄러웠던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 김소연, '다른 이야기'에서 (i에게, 아침달 2018) 

  
       
     
   처음 만난 날에 오천 원 삥을 뜯었다. 친구들 술값을 내주느라 집에 갈 차비도 털려 하교하던 길의 오늘 처음 본 표정을 붙잡고 삥을 뜯었다. 문학회를 탈퇴했던 바람에 금방 도로 갚지도 못해 한참 동안을 서성였다.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조용히 앉아 글로 적으며 화내는 사람을 그때 처음 보았다. 넉 달만에 오천 원을 갚았고 함께 영화를 봤고 함께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리어카에서 팔던 장미 한 송이도 마다하던 손끝에 건네주었다. 언젠가는 우는 표정도 보았다. 조용히 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사람도 그때 처음 보았다. 눈물로 바랜 노트에 적힌 글귀에서 '역사' '고독' '절망' 같은 단어들도 처음 보았다. 우는 표정을 보면서도 왜 우는가를 내내 몰랐다. 화를 낸 적도 있었다. 개켜둔 이불에 앉혀두고는 그 눈길도 외면한 채 등돌리고 서서 김수영의 '절망'을 읽었고 "똑바로 살아" 하며 호통을 쳤다. 처음으로 웃었던 표정이 아마도 그날인 것 같다. 웃음이 없는 시대를 살면서 웃음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언젠가는 우는 표정이 되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몰라서 정말 많이 미안하다"고 말하며 울먹였던 것 같다. 우는 표정이 되어서도 왜 그랬나를 도통 몰랐다. 처음으로 삥을 뜯고 처음으로 전화를 하고 처음으로 편지를 쓰고 처음으로 녹음한 테잎을 건네주며 처음으로 닮고자 애쓰며 처음으로 생각났고 처음으로 고민을 했고 처음으로 두려웠고 처음으로 존중했으며 처음처럼 경청했고 처음으로 토론도 했고 처음으로 외면도 했고 처음으로 실망도 했으며 처음으로 '절망'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게 됐고 처음처럼 분노했고 처음으로 좌절도 했던, 처음으로 그리웠으며 처음으로 처음으로 '미래'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표정이 그 시절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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