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
종이를 열자
반짝이는 은색이었다
무수한 햇빛이 그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너무 환하게 웃는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벌써 몇십 년째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
- 김선오, '껌 종이' 중에 ("사랑에 대답하는 시", 아침달, 2021)
껌을 좋아한다며
종류도 여러 가지인 걸 차곡히 쌓아놓는 버릇
한 번도 같은 종류를 꺼낸 적 없었고
문학회 후배가 낙서장에 대고 썼던 얘기
단물 다 빠지면 아무렇게나 툭 뱉는 인연 같아
후배를 그런 취급하지는 말아 달라던 읍소였고
졸업하고 선배들을 그런 취급했던 건 그 후배
성공하지 못하면 서러운 법
하다못해 부모님 장례식장에 면이라도 서려면
그립다는 말 한 마디조차 못해본 채로
껌이 되어 수십 년을 함께 살았어 이젠 그만
한 번 뱉은 껌을 도로 씹는 일도 없으니까
무턱대로 전화를 걸었는데
생일 축하한다고 짧게 십여 초 통화를 했고
무덤덤한 말투에도 반가운 인사는 있었고
그랬다면 그것으로도 족할 일인 법
싸구려 껌 한 통이 못내 그리울 때
그 당당했던 찌질함이 참 그리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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