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 5

이른 새벽, 필사 (또는 "인용")에 대하여

저는 모든 종류의 책을 필사합니다. 단 분량이 너무 많은 장편이나 철학서 등은 다른 분들 사진을 찍듯이 필요한 문단만 따로 발췌해 옮겨놓곤 해요.    나중에 들춰보면 종종 도움이 되거든요.    그리고 글쓰기 입장에서는 필사가 그리 큰 도움은 못 되는 것 같아요. (즉 필사는 '기억의 보존' 목적이 더 크죠)    “모작”의 시도가 좀 더 효과적이라 생각해요.        “순수하게 트레이싱으로 그린 그림은 원판에 대고 베껴 그리는 방식이라서 모작보다 난이도가 떨어진다. 난이도가 낮은 만큼 배울 수 있는 한계도 극명하게 낮다. 트레이싱을 하는 데에도 테크닉이 있긴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트레이싱 테크닉을 숙련하는 의미는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실력향상 수단으로 보자면 모작은 최고의 효율..

문학노트 2024.05.08

벽璧

벽璧       나뭇잎도 계속 모으면 나룻배 한 척쯤 만든다 해서     설마 했지만 몇 년을 또 그러모았나 모르겠습니다      밖엔 내내 비가 오고 축축한 잎새들 차곡히 쌓으면    금세 한 뼘 나무토막쯤은 만들 수도 있었겠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네가 서 있고       벽을 타고 오를 담쟁이 잎은 차곡한 빗물을 머금고     쓰러지지도 않을 벽이 견고하기만 해 그저 애달파                  세찬 바람이 훅 불어오면 또 몇 장 금세 흐트러지고    연신 무너질 것 같던 잎새들도 꾸역꾸역 챙겨야 해서       비가 그칠 때까진 전전긍긍해야 할 시절만 불안한 채      족히 몇십 년 더 걸리는 게 맞을 일인지도 모릅니다         비가 오고 ..

글/습작 2024.05.05

다시 오월

다시 오월       신록이 솟아오르는 기운에 가벼운 걸음걸이를 배우기 시작한다면    에전 대문 앞에서 서성이던 발등에도 푸른 수국이 움틀 때가 많아        혹시 또 몰라 진짜 수국일까, 멈칫하며 서는 동안 해는 비스듬했고    해가 기운 각도만큼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켜보는 그해의 봄이 있고    그해의 가을도 함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 싶어       다시 오월, 기억은 상록수처럼 홀로 푸르른 채 변하지도 않을 계절    변하지도 않을 사랑은 스스로 나이만 먹나 싶어               #

글/습작 2024.05.02

종로에서 아는 사람 다섯을 만났다

종로에서 아는 사람 다섯을 만났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께의 종로를 우연히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색한 미소로 인사하면서 지나치곤 했지     정독도서관에서 한강을 닮은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고         뒷모습을 한참 쳐다봤어 머리카락이 너무 하얗게 세서    아직도 멀쩡한 나는 글쓰기가 부족해서일 거라고 믿었지     새벽마다 글쓰기를 연습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리 똑같애    부지런한 새가 일찍 죽는다던 허튼 농담이 더 지겨워서 그래       소격동 골목길에서 회사 사람을 만났는데 인사도 없이         유니폼만 서로 힐끗 쳐다보았어 각자의 점심시간을 잊은 채    다가올 구조조정의 순간들을 서로 애도하며 분주하기만 할 뿐     직급을 없애겠다며 너도 나도 프로 골퍼..

글/습작 2024.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