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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단테, 연분홍/연초록, 정독, 그리고 종로학파 2024. 4. 8. 07:28


  
  
   인연
  
  

   어디서든, 우리는 텅, 텅 비어, 머리카락 몇 개가 날릴 뿐이었다. 누가 돼지를 칠 것인가. 닭들은 달을 향해 날아올랐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얼룩덜룩, 재치 있는 말들이 달을 향해 울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는. 아무것도.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시인해야만 했다.

   - 서정학,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중에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지, 2017)




   날 선 고독이 옆자리의 손짓을 외면한 채 제 발등만 노려보는 계절이 있어 노려본다기보다는 어쩌면 응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삶에 대한 깨달음은 항상 어떤 계기를 두고 뒤늦게 발동하기 시작해
   스스로 가파른 무덤에 오르게 되면 함께 할 벗들도 사라져 온전히 제 혼자의 힘으로 정상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쉽게 시도하지도 못한 일
   코끝을 스치는 산바람은 늘 허무를 느끼게 하지 다 왔다 싶으면 또 가야 하고 또 더 가야 하면 무릎이 아파 왜 가야 하는지도 몰라 그만 걷고 싶어
   친구한테 사진 몇 장을 건네주고 그 고독감을 함께 느끼게 해주고팠어 짧게 한 마디면 충분해 오늘도 달은 차오르고 벚꽃은 눈부시기만 해서 잔인한 이 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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