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앨범/필사 6

이제니, '남겨진 것 이후에' (When October Goes, 시월 하순의 시작)

[하루한편] When October Goes, 시월 하순의 시작 (이제니, 남겨진 것 이후에) : 남겨진 것 이후에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

문학앨범/필사 2023.10.16

진은영, ‘몽유의 방문객’ (가을에 지는 꽃, 수국에 얽힌 추억)

[하루한편] 가을에 지는 꽃, 수국에 얽힌 추억 (진은영, 몽유의 방문객) : 몽유의 방문객 너는 오겠지, 달의 해안에 꽃들이 하얗게 밀려오는 봄밤에 너는 오겠지, 부서진 간판의 흐느낌을 가로수 검은 가지로 건드리는 여름밤에 오겠지, 추위와 얼음의 투명한 발톱으로 다듬어진 소박한 식탁에 부엌에서 다시 칼국수를 끓이려고 하얀 밀가루가 여주인의 손톱 사이에 실낱 같은 달로 떠오르는 밤에 초록색처럼 사랑스런 연인이었네, 아닌가 첫 눈송이의 흰빛으로 너는 사랑스러웠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가을밤의 어두워가는 남청색 코트 자락에 기어들어가 별빛처럼 부드러운 국수 한 그릇을 나눠 먹었으므로 꿈속을 걸으면서 너는 기억하네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식탁* 부드럽고 위태로운 장소의 이름 속으로 너는..

문학앨범/필사 2023.10.15

정호승, '서울의 예수' (만약에 나한테 '종교' 같은 게 있다면)

[하루한편] 만약에 나한테 '종교' 같은 게 있다면 : 서울의 예수 - 정호승 1 예수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 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가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랑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문학앨범/필사 2023.10.13

서윤후,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괴도 저 고개 숙인 자의 표정을 알고 싶다 코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어떤 찡그림을 발명했는지 그 찡그림을 펼치지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떠나야 한다 마른 헝겊으로 안경을 닦을 때 초조하게 뒤돌아볼 때 앞은 잠시 앗아갈 것이 많아지는 세계 새장은 모란앵무를 찾으러 떠났다* 흔들의자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림자만 남겨지는 실내악 예열된 오븐 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볼 때 밤새 얼마나 번성하게 될 것인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시작하거나 이젠 얼마 없는 이야기 고개를 들면 모자라게 된다 뜨개질처럼 멀고 먼 생활의 과로사를 시작하게 된다 어딘가 다친 모과들을 닮아 향기를 먼저 내밀게 된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게 된다 고개 숙인 자가 거느리는 밤 속에서 감긴 눈을 일으킬 슬픔이 필요하므로..

문학앨범/필사 2023.07.05

외성(外城) (박형준)

외성(外城) 박형준 나는 닻에 묶여 있는 배를 바라본다. 폭풍이 지나간 하늘에도 구름이 닻처럼 떠 있다. 먼바다로 나아가 밤의 가장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다는 것. 배도 하늘도 하루쯤은 고요하게 쉬어야 한다. 벌써 저녁이 온다. 빛이 어둠 속에서 태어나고 있다. 저녁 바다에 떠 있는 빛들, 바다 위를 날아가는 나비떼 같다. 어서 오라고, 어서 전구마다 불을 가득 켜고 먼바다로 나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어부들의 지친 삶 속에서도 벌써 힘줄이 나비떼처럼 불끈불끈 일어선다. 어두운 바다 위를 미끄러지는 빛들. 저녁이 오면 하늘의 닻인 구름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가장 맑은 별들이 떠오른다.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별들을 지도 삼아 나비보다 영롱한 빛들을 낚는다. 밤에 홀로 눈 뜨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라고..

문학앨범/필사 2023.05.11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안희연)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안희연 할아버지께서 노래를 찾아오라고 하셨다 어떤 노래를요? 그건 차차 알게 될 거라고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고 하셨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이윽고 문지기를 만났다 노래를 찾으러 왔어요 신발을 벗어주면 문을 열어주지 나는 문지기에게 신발을 벗어주었다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윽고 양 치는 목동을 만났다 노래를 찾으러 왔어요 너의 그 근사한 외투를 벗어주면 양의 노래를 들려주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목동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외투를 벗겨 달아났다 오들오들 떨며 달의 분화구를 향해 갔다 거기서 잠시 추위를 달랠 요량이었다 그곳엔 행색이 초라한 사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아저씨, 일어나보세요 저는 노래를 찾으러 왔어요 얘야, 나도 노래를 찾..

문학앨범/필사 2023.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