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9

'상'이라는 착각, 동기부여

'상'이라는 착각, 동기부여 '상'이라는 좋은 제도는 받는 이한테 "내가 이만큼 잘한다"는 착각을 선사하곤 합니다. 좋은 격려와 지지의 뜻이 자칫하면 자만과 허영을 불러일으켜 뜻밖의 곤란함이 돼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등학교 때 처음 받았던 상은 어느 신문사가 주관하였던 전국단위 미술대회에서의 입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제 꿈은 '화가'였고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그만두게 되었지만 미술을 엄청 잘하는 줄 혼자 착각했었습니다.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주관한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바람에 '이공계'가 적성에 맞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또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주관한 과학경시대회에서 독후감으로 2등을 차지해 '과학자'의 꿈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교육감상을 받았을 때는 스스로 공부도 썩 ..

글/습작 2024.07.05

조용우, '지나가는 마음' ("세컨드핸드", 민음 2023)

지나가는 마음*      지나가는 마음은 등이 높아 한번 뒤집어지면 제 힘으로는 다시 뒤집을 수 없고    그런 마음 그만두고 쇠족제비가 6차선을 건너    펜스 아래로 길게    없어진다    그래도 이런 도심에서?    고라니, 멧돼지가 때때로 무덤 너머로 머리를 내밀었다 황급히 돌아가고    쑥은 다시 무덤가에    도로변에 무리지어 퍼져 간다    지나가던 노인들이    저마다 비닐봉투를 들고      무릎을 꿇은 채로 쑥을 뜯으며    띄엄띄엄 닳아 사라지는    새삼스레 따사로운 가을 햇빛 아래    덜 시든 초록과    심한 초록 사이로 마음은    사나흘 더 바르게 말라 가며    화요일 밤에 누가 망치로 독을 깨고    쓸어 담는    소리    낮에는 물까치 소리    서로의 새끼에게 ..

문학앨범/필사 2024.07.05

허주영, '거리의 경전'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 민음 2023)

거리의 경전 저편에서 여자는 소리를 지르고 내 쪽으로 애가 걸어온다. 이리 와 이리 좀, 제 부르는 소리를 곁눈질로 도망가는 모양이다. 지나가는 또래 여자애를, 토종 아저씨를, 바람을 아우르는 검고 투명한 비닐을, 쏟아진 은행 열매오 그걸 주워 담는 도시의 작은 동물들을 보며 애는 웃고, 애 엄마는 거의 울고, 나는 애를 버리고 애 엄마 쪽으로 간다. 길은 골목만큼 좁고 광장만큼 시끄럽다. 애가 신발을 질질 끌고, 사람들은 어깨를 통과한다. 둘은 골목에서 싸우고 셋 이상 모이면 광장으로 간다. 둘은 말없이 싸우고 셋 이상은...... 아무래도 좀 위험하겠지요. 집엘 가지 않고? 환한 벽에는 외발로 선 이웃들이 살겠지요. 우리가 이사를 가면 누군가는 결국 집을 잃어요? 엄마는 대답이 없고 거리에 서 있다...

문학앨범/필사 2024.07.04

밤, 비

밤, 비      밤새 비는 제 방 창문 앞 서성거리며 창을 어루만집니다    비들이 보듬고 어루만진 제 창의 상처들은 이내 씻기고   치유된 흔적처럼 멀겋고 뿌연 안개들이 번져갑니다     그리운 걸까를 몰라 밤새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끔씩 마음이 뭉근해져 옴을 느낍니다 잠을 설칩니다    밤새 비는 제 방 창문 앞 서성이며 제 마음을 두드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들은 너도 나도 모를 일이라서     두드린 이와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이 모두 함께    밤잠을 설치곤 하는 일일 뿐입니다     어제의 나도 그제의 너도    한 해 전의 나도 십 년 전의 너도

글/습작 2024.07.03

인정, '빛의 재해석' (전지적 작가 시점, 2024)

빛의 재해석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씩 내몰면서 깊고 넓은 내 감정의 바다를   위로해 주는 네가 내게 오는 모든 것들의 축복이라는 것을 아는가.   어둠이 없으면 별의 반짝임도 없는데,   너는 내게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가.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서 나를 보며    서 있는 네 그 유일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는 아는가.    * 인정, 전지적 작가 시점 (2024)      -    :: 메모 ::    아름다운 글입니다.    빛나는 문장에 잠시 눈길이 멈추었습니다.     늘 건필하십시오...

문학앨범/필사 2024.07.03

비 오는 날 새벽, 불쑥 찾아든 전화 한 통

비 오는 날 새벽, 불쑥 찾아든 전화 한 통       사랑해요    (미쳤나 보다)      불쑥 생각나서 전화흘 한대도      그런 말 할 줄 누가 알았겠니       왜 그런대...        (정말 이해를 못하겠구나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착각도 유분수지)     이런 말들을 곱씹다 결국    한 마디,     알았어...      (알았으면 그만이지     뭐가 더 필요한데)      속 편히 살기로 했다     (가끔 사랑은 연민은    고단하기조차 하다      그 절실함이    그 서글픔이)                       #

글/습작 2024.07.02

칠월의 아침

칠월의 아침    장마전선이 북상을 한 종로는 아직 무사한가 봅니다    주말 내내 안녕치 못한 제 안부도 함께 무사할 것 같습니다    며칠전에 사건이 된 사랑을 놓고 더는 그러지 말라며 달래주던    가벼운 마음들이 하늘에 두둥실 떠 있습니다    어떤 마음은 크게 하얗고 몽글몽글해    바로 옆에 핀 적운의 진회색 그림자를 더 어둡게만 비추고    뭉근한 검은 그림의 무게가 비를 내리게 만드는지도 몰라서       일주일 내내 비와 함께 운다면    소용없는 일들도 소용이 생길까도 잘 모르겠어서      그렇게 울고도 싶어지는 장마,    장마를 기다려온 여름이 함께 흐르고 있었습니다

글/습작 2024.07.01

박참새, '건축' ("정신머리", 민음 2023)

건축 "파이드로스, 글에는 그림처럼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네.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보이지. 하지만 자네가 어떠한 질문을 해도 그들은 무겁게 침묵만 지킨다네. 글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글이 지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자네가 그 내용을 알고 싶어 물어보면, 글은 매번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들려줄 뿐이지." - 플라톤, '파이드로스' 너는 생각한다. 너는 집을 짓고 싶다. 너는 집을 짓는다는 일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너는 아주 기본적인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곧 결여된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너에게는 자본이 없다. 너에게는 땅이 없다. 너에게는 실리적인 재료도..

문학앨범/필사 2024.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