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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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지극히 단순한 약속을 갖는다
누군가 사과를 받아야 한다면 사과를 하기도 하지만
누군가 사과를 않은 채로 계속 이어지는 인연이라면
대개는 그 관계가 이미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해진다
이걸 그토록 어려워 하는 이도 있음을 최근에 알았다
고독을 모르니까 늘 외롭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지만
굳이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 또한 '존중'일까...
자기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며 살고 있는 이들과 함께
같은 세상을 공유하면서 산다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