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39

허연, '휴면기' ("밤에 생긴 상처", 민음 2024)

휴면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염소 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며 시 앞에 섰다. * 허연, "밤에 생긴 상처" (민음, 2024) - :: 메모 :: 칠월 한 달 동안 고작 열 편 남짓 가량의 시편만을 썼다. 가장 부진했던 이..

문학앨범/필사 2024.07.31

한백양, '미리보기 없음' ("2024 신춘문예 당선시집", 문학마을 2024)

미리보기 없음 그릇이 깨지고 순두부찌개 집은 순식간에 결말로 치닫는다 그랬습니까, 그랬습니다, 따위는 없는 허리 구부림과 주인의 앞주머니가 훔치고 간 바닥의 김치 얼룩 누구도 피 흘리지 않았지만 누구나 피 흘리는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정적의 용도가 달라진다 주인도 그릇을 내던진 사람도 좀처럼 말이 없고, 둘 사이를 오가야 마땅한 대화들을 티브이 소리가 뒤덮는다 올해의 경제에는 하한선이 없습니다, 종이로 급하게 숫자를 덧붙인 순두부찌개 백반의 가격부터 그릇을 내던진 사람의 맞은편 사람까지 붉고 창백한 화살표가 이어진다 정말로 최선이었습니까, 힐끗대는 가게 안의 공기가 요동치고 갑자기 재채기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팡파르도 없이 정적이 입구까지 내달린 순간 그래서 죽겠니, 웃어버리는 웃으면 안 되는 사람이..

문학앨범/필사 2024.07.30

꿈을 묻는다는 일

꿈을 묻는다는 일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읽으면 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가 함께 온다며 이를 맞는 심경은 필시 환대일 것이라고 말한 시인의 마음을 오롯이 느껴보기도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서 쉽사리 꺼내기 힘든 질문들이 몇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가장 하기 힘든 말 중 하나는 아마도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일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곧 그 사람의 전부에 관한 질문이자 그 사람이 갖는 일종의 '가치'에 관한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별 생각도 없이 던져지는 아주 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한 사람에게서 그러한 질문을 받게 된다면? 필시 이는 매우 진지한 '관계'를 뜻하는 것이므로, 가장 진지하..

글/습작 2024.07.29

사랑의 찬가

사랑의 찬가    - 셀린 디온의 공연에 부쳐           사랑이 없는 도시를 슬퍼하며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이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사랑을 정말로 해본 사람은 알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셀린 디온이    왜 파리 올림픽 마지막 무대였나를    왜 역대급 퍼포먼스를 펼쳤는가를    어째서 사랑은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사랑은    왜 죽음도 두렵지 않아야 하는가를       새벽녘에 짤막한 편지를 쓰면서도    왜 개켜둔 감정을 다시 꺼냈는가를    또 다시 접어두기만 하였는가를         사랑은 감정도 욕망도 환희도 아닌    철저히 이성적이기만 한 행동인 것     부모요, 형제요, 가족이요,    연인, 이웃, 사회, 세계 등..

글/습작 2024.07.29

자유는 사다리 끝 자전거처럼

자유는 사다리 끝 자전거처럼 - 파리 올림픽 개막공연 기억나니? 동춘동 서커스단 맨 꼭대기 높다란 사다리 끝 자전거 한 대 미소녀가 웃으며 나를 봤는데 큰 입 함박웃음으로 쳐다보았지 사다리 끝이 무너질까봐 무서워 튼튼히 만들었나 조마조마하고 자전거는 자칫 구르고 넘어져서 더더욱 조마조마하고 그걸 함께 쌓았으니 얼마나 그래 밤새 쳐다본 구름 끝 파리의 하늘 장대 끝에 매달린 미인들이 흔들려 섬세한 몸짓을 연주하는 찰나에도 아찔한 현깃증이 먼저 일었는데 자유는 늘 사다리처럼 미련하고... 서툰 자전거 페달만큼 미숙하고... 끝내 모를 자유는 위태롭기만 해 한참을 바라보던 무지개 같았어 그렇게 자유를 꿈꾸곤 해, 그토록 아름다웠던 새벽 어느 날 #

글/습작 2024.07.27

칠월

칠월* 무참한 심경으로 문을 나섰습니다 간밤의 어여쁜 화가는 돌아올 기미가 없고 노래를 부르던 이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김민기라는 이름을 가진 아침이슬이었습니다 까닭 모를 눈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들이 흐르고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만 밤새 들었습니다 떠나는 날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채 미처 못다 한 말들을 적어 편지를 부쳤습니다 장마는 절실함인 줄 알았지만 처절함이 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무참한 심경으로 다시 들어온 방 안 고즈넉한 풍경 몇 장의 사진을 놓고 비로소 다시 시 앞에 서 있습니다 벽과 문 사이 희미한 빛 한 줄기 틈새의 먼지들 투명해진 상처로 흐르는 노래들 칠월의 노래입니다 * 허연, 칠월 (밤에 생긴 상처, 2024)

글/습작 2024.07.25

허연, '칠월' (“밤에 생긴 상처”, 민음 2024)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허연, “밤에 생..

문학앨범/필사 2024.07.25

황농문, "몰입" (랜덤하우스, 2007)

Prologue    몰입, 최고의 나를 만나는 기회      아프리카의 초원을 거닐다가 사자와 마주쳤다고 하자. 이때는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이 상태가 바로 몰입이다.    몰입 상태에서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 능력을 발휘하는 비상사태가 발동한다. 자신을 초긴장 상태로 만들어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때문에 잠재된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한 몰입적 사고는 과학, 비즈니스, 학습 등 여러 분야에서 그 위력을 발휘해왔다. (중략)    놀아도 몰입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몰입하지 않으면 행복을 경험하기 어렵다.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주..

문학앨범/필사 2024.07.24

장석남, '생일'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2017)

생일 달이 마당 밖 잣나무숲을 지날 즈음 흰 돌멩이 하나 들어다가 툇마루 위에 올려두면 어느새 노래가 되어 꽃밭 속으로 어른어른 밀려나갔다 그믐밤이 되어서는 캄캄한 꽃밭 속에서 반딧불이 두엇씩 살아 나왔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닥 그만두었다 흰 돌멩이 하나 들어다가 갓 풀린 개울물에 넣어둔다 귀도 하나는 그 곁에 벗어둔다 * 장석남,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2017) - :: 메모 :: 생일선물이었다 행갈이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그냥 인터넷에서 긁어온 시편 하나 그래도 내겐 아주 소중한 선물이었지... 그걸로도 족했다 더 바란 것도 없었다 이제 그 일도 그저 하나의 추억이 되었을 뿐이다 사랑도 그저 죽음으로써만 스스로를 입증할 뿐, 침묵만이 남는다 그저 침묵 뿐... -

문학앨범/필사 2024.07.22

그리운 그 사람, 김민기

그리운 그 사람, 김민기     - 김민기 선생님을 추모하며       오전에 부음을 접했습니다           황망한 마음을 애써 닫아야 할 일과 도중에 마음이 계속 아리더니 결국 식당에서 눈물을 쏟고야 말았습니다    콩나물국이 나왔는데요 그만 국 위로 가슴에서 쏟은 눈물 탓에 국이 너무 짜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식판을 반납했고 선생님께 편지 한 통을 마저 써야겠어서 이렇게 펜을 들었어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에서 해마다 국민들이 사랑하는 대중가요 100곡을 선정하는 계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의 늦가을에 울려 퍼지던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이 나라 민주화의 결실이었다면 아무런 설명도 예고도 소개도 없이 맨 마지막에 다시 그 노래를 부르던 한 낮은 독백조의 음성을 가진 사내..

글/습작 2024.07.22

슬픈 열대야

슬픈 열대야 제 몸을 물어뜯어서로도 사랑하고 싶을 때가 있어, 사막을 통과하는 바람처럼 뜨거운 목울대로 울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가끔은, 인간이 창문 너머로 보이기도 한다 - 박정대, '슬픈 열대야' 중에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 2001) 사랑에 대한 정의를 '헌신'이라 해놓으면 세상 그 누구도 사랑할 이 없는 게 현실 적당히 거리를 두고도 적당히 타협을 해 간신히 사랑이란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어줍잖은 사랑에 기댄 다른 뜻의 칼날들 사랑을 죄다 들쑤시고 후비고 찢어낸다 사시미만큼 난도질을 당하면 맛이 좋나 숙성을 해봐도 맛이 나쁘면 실력의 문제 실력없는 감정들이 마구 파놓은 자국들 사랑이란 이름으로 남은 잔해들을 본다 #

글/습작 2024.07.15

아놀드 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황지우 옮김, 돌베개 1983)

서론 예술작품은 하나의 도전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순응할 뿐이다. 그것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적과 노력에 의존하며,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기원을 두고 있는 어떤 의미를 작품 속에 불어넣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에게 실제로 감동을 주는 예술은 그런 한에서 현대예술이 된다. (중략) 요컨대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을 때 왜 그것이 일어났는가 하는 이유는 양식만을 고려해서는 해명되지 않는다. 발전의 최정점은 내적인 기준에 의해 확정될 수 없다. 어떤 양식적 형식이 심리학적, 사회학적 법칙에 따라 형성된 시대정신을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때 급격한 선회가 일어나는 법이다. (중략) 사회학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개념은 사고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에 ..

문학앨범/필사 2024.07.10

'플랫폼'에 관한 짤막한 아이디어

'플랫폼'에 관한 짤막한 아이디어          이른바 "카톡" 기반의 커뮤니티들이 겪는 가장 큰 애로사항은 다름 아닌 '아카이빙' 즉, 오가고 나눈 대화 및 정보를 어떻게 저장하고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카카오톡이 인스턴트 메신저인만큼 별도로 이를 배려한 장치를 갖고 있지 않았고, 또 일종의 '보드' 역할을 맡는 공지 기능 역시 3개월이라는 시한부 기능인 탓에 여러 커뮤니티들이 각개약진하는 방식으로 이 '플랫폼'을 고민하게 됩니다.    가장 대중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수단으로는 네이버 카페가 있겠고, 어떤 커뮤니티들은 카카오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다음 카페를 이용하거나 또는 티스토리의 '팀블로그' 기능을 통해 이 문제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다소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

글/습작 2024.07.09

쓸쓸함에 대하여

쓸쓸함에 대하여                 장마철이 달력 한가운데를 관통할 즈음에 물기 어린 거리를 걷다 보면 가끔씩 떠오른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름은 빙그레 미소를 짓게 만들고 또 어떤 이름은 이른 새벽의 머뭇거리던 발걸음처럼 가볍지가 않습니다    때때금 그리운 이름들보다도 이른 새벽의 이름을 더 먼저 떠올리고 그렇게 무게를 갖는 감정에 대해 생각합니다    문득 불어온 바람, 구름 속에 갇힌 햇빛, 물기를 머금은 공기, 답답한 가슴 속 멍울진 말 몇 마디 등을 떠올리다...     이내 눈을 감았습니다       쓸쓸하다는 말을 미처 정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어쩌면 이 감정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에 대한 애석함    이해는커녕 오해할 수밖에 없게 된 사..

글/습작 2024.07.09

이병률, '이 넉넉한 쓸쓸함'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지 2017)

이 넉넉한 쓸쓸함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 이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지, 2017) - :: 메모 :: 새벽녘에 나를 불러 세운 까..

문학앨범/필사 2024.07.09

최백규, '이상기후'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2022)

이상기후      우리가 안고 있으면 낙서를 채색하는 것 가다 무릎 상처에 시퍼렇게 그늘이 자란다     캄캄한 욕실에서 더운물을 얹으면 붉은 꽃잎들이 흩어진다 등허리에 성호를 그으며 이것이 나의 해안이 될 거라 확신한다 그곳에서 너와 마주친다면 세상을 사랑해볼 수도 있겠다 싶다     무덥도록 조용한 실내에 머무르면 죽은 이후가 기억나서     수의를 벗듯이 잔기침을 식힌다     모기를 쫓거나 흐트러진 베개를 고쳐주던 휴일이 침대맡으로 쌓여드는데     숨소리로 구분할 줄 알면서도 자는지 속삭여보는 습관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만 든다     너를 지옥에서 온 안부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물을 마시려다 냉장고 문을 연 채    가만히 서 있다      * 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문학앨범/필사 2024.07.09

한강, '서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지 2013)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갰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

문학앨범/필사 2024.07.09

한강, '회복기의 노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지 2013)

회복기의 노래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지, 2013)      -      :: 메모 ::     "시간만이 약"인 때가 있었다    지금도 또 그렇다

문학앨범/필사 2024.07.09

정지용, '노인과 꽃'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1946)

노인과 꽃 노인이 꽃나무를 심으심은 무슨 보람을 위하심이오니까. 등이 곱으시고 숨이 차신데도 그래도 꽃을 가꾸시는 양을 뵈오니, 손수 공들이신 가지에 붉고 빛나는 꽃이 맺으리라고 생각하오니, 희고 희신 나룻이나 주름살이 도리어 꽃답도소이다. 나이 이순을 넘어 오히려 여색을 기르는 이도 있거니 실로 누하기* 그지없는 일이옵니다. 빛깔에 취할 수 있음은 빛이 어느 빛일는지 청춘에 맡길 것일는지도 모르겠으나 쇠년*에 오로지 꽃을 사랑하심을 뵈오니 거룩하시게도 정정하시옵니다. 봄비를 맞으시며 심으신 것이 언제 바람과 햇빛이 더워 오면 고운 꽃봉오리가 촉불 켜듯 할 것을 보실 것이매 그만치 노래*의 한 계절이 헛되이 지나지 않은 것이옵니다. 노인의 고담*한 그늘에 어린 자손이 희희하며* 꽃이 피고 나무와 벌이 날..

문학앨범/필사 2024.07.08

정지용, '백록담'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1946)

백록담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착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 옆에서 백화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승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

문학앨범/필사 2024.07.08

정지용, '향수'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1946)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취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

문학앨범/필사 2024.07.08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창비 1996)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

문학앨범/필사 2024.07.08

김석영, '정물처럼 앉아'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 민음 2022)

정물처럼 앉아       은은하게 빛나던 색을 우리는 알았다     발음해 보면서 궁글어지는 맛    호박 몇 조각을 뒤집어 보면서     "눈은 방향이 없구나"     둥근 유리 주전자 속에서    오래도록 우러나는 호박    물속에서 다른 형상으로 보인다    서로를 밀어내면서     기억이 났다 실처럼 오래 풀리느라    컴컴해진 실내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서로 같아진 손의 온기     누군가는 밖으로 나갔다     눈은 이곳에 없어도    누군가는 만족스럽다     "내가 정물처럼 앉아 있으면    당신이 나를 그려 주기를,     사람으로"     눈이 그쳤고    실내가 다시 밝아 오고 있었다      * 김석영,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 (민음, 2022)      -      :..

문학앨범/필사 2024.07.07

박완서, 산문 "세 가지 소원" (마음산책, 2009)

- 작가가 아끼는 이야기 모음 :       큰 네모와 작은 네모          미술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제출한 그림을 한 장 한 장 들춰 보시던 선생님은 슬기의 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손길을 멈추셨습니다.    슬기는 미술학원에 다닌 적도 없다는데 그림을 아주 잘 그립니다. 학기 초에는 아이들이 선생님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별의별 선생님 얼굴이 다 나왔는데, 선생님은 그중에서 슬기가 그린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슬기야, 이 그림 선생님한테 선물하지 않을래? 그랬더니 슬기는 기분 좋게 으스대며 그러겠다고 했고, 지금 그 그림은 선생님 방 벽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그림은 좀 이상합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 첫 미술시간이라 될 수 있으면 방학 동안..

문학앨범/필사 2024.07.07

김규항, 아포리즘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알마, 2017)

김규항     글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도구가 아니라, 불편함을 수반하더라도 좀더 사유함으로써 세계의 본질에 함께 다가가는 도구다. 모든 아름다움이 그러하듯 문장은 군더거기가 적을수록 아름답다.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 문제를 벗어나 저마다의 쓸모없는 것들에 골몰하는 세계를 소망한다. 지은 책으로 등이 있고, 어린이 교양지 발행인을 맡고 있다.      -      -      감촉에 익숙해지면 향기를 잊기 쉽다.      -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우리,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대개 내적 음성과의 대화다.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

문학앨범/필사 2024.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