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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영, '정물처럼 앉아'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 민음 2022)

정물처럼 앉아       은은하게 빛나던 색을 우리는 알았다     발음해 보면서 궁글어지는 맛    호박 몇 조각을 뒤집어 보면서     "눈은 방향이 없구나"     둥근 유리 주전자 속에서    오래도록 우러나는 호박    물속에서 다른 형상으로 보인다    서로를 밀어내면서     기억이 났다 실처럼 오래 풀리느라    컴컴해진 실내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서로 같아진 손의 온기     누군가는 밖으로 나갔다     눈은 이곳에 없어도    누군가는 만족스럽다     "내가 정물처럼 앉아 있으면    당신이 나를 그려 주기를,     사람으로"     눈이 그쳤고    실내가 다시 밝아 오고 있었다      * 김석영,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 (민음, 2022)      -      :..

문학앨범/필사 2024.07.07

박완서, 산문 "세 가지 소원" (마음산책, 2009)

- 작가가 아끼는 이야기 모음 :       큰 네모와 작은 네모          미술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제출한 그림을 한 장 한 장 들춰 보시던 선생님은 슬기의 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손길을 멈추셨습니다.    슬기는 미술학원에 다닌 적도 없다는데 그림을 아주 잘 그립니다. 학기 초에는 아이들이 선생님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별의별 선생님 얼굴이 다 나왔는데, 선생님은 그중에서 슬기가 그린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슬기야, 이 그림 선생님한테 선물하지 않을래? 그랬더니 슬기는 기분 좋게 으스대며 그러겠다고 했고, 지금 그 그림은 선생님 방 벽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그림은 좀 이상합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 첫 미술시간이라 될 수 있으면 방학 동안..

문학앨범/필사 2024.07.07

김규항, 아포리즘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알마, 2017)

김규항     글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도구가 아니라, 불편함을 수반하더라도 좀더 사유함으로써 세계의 본질에 함께 다가가는 도구다. 모든 아름다움이 그러하듯 문장은 군더거기가 적을수록 아름답다.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 문제를 벗어나 저마다의 쓸모없는 것들에 골몰하는 세계를 소망한다. 지은 책으로 등이 있고, 어린이 교양지 발행인을 맡고 있다.      -      -      감촉에 익숙해지면 향기를 잊기 쉽다.      -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우리,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대개 내적 음성과의 대화다.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

문학앨범/필사 2024.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