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차호지, '사랑하는 사람' ('영향력'이 제시할만한 '미래'의 힘)

단테, 정독 2025. 3. 19. 04:06

  

  

  

   사랑하는 사람 

 

 

 

  그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길 속을 걸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늦가을 밑동만 남은 수수밭에 불을 지르고 그 위를 걸었다. 그는 그 때문에 그곳에 갇혔으나 내게 마음의 짐을 가지지 말라고 말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내게 편지를 보냈고 나는 그 편지를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그에 관여했다. 그와 내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을 때 나는 울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게 진짜 사랑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이미 증명을 마친 수학자의 얼굴로 나에게 편지를 건넸다. 그는 나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내가 울면서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편지가 젖거나 구겨지거나 찢어지면 새로운 편지를 건넸다. 돌아가는 길, 문밖에 선 내 이름을 부르며 그는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고 있는 자동문 유리에 어깨를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부터 걸어 나왔다. 오르막길을 오르다 뒤로 돌았고 작아진 건물에 끼인 채 손을 흔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책상 위 모형처럼 보였다. 그는 뭔가 말하고 있었다. 그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일 거였다. 나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도 모르게 그가 넣어둔 편지가 주머니마다 들어 있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 차호지, 시작법 (문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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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력'이 제시할만한 '미래'의 힘 : 

 

 

 

   생각해 보니 올해 들어 벌써 3월이 지나가고 있건만 새로 나온 시집들을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하고 지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매일 같이 시를 읽고 한 편을 골라 소개해온 이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째입니다만, 게으름은 늘 가장 큰 적이어서 어떻든 간에 올해에 새로 나온 시집들도 찾아서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수요일 아침을 맞습니다. 

   작년에 읽었던 시집들 중에서 차호지의 <시작법>을 꺼냅니다.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자 출신답게 데뷔 (등단)한 지 불과 3년 만에 첫 시집을 상재하였는데, 평균적으로 '등단' 시인들이 첫 시집을 내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약 10년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확실히 빠른 편이죠. (물론 출판계의 정황이 워낙 급속도로 변화하는 마당에 이 정도는 이제 약과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만큼 '유망'한 신인들 중 한 명이라는 정도로만 소개해놓고자 합니다.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그럴듯한 방향과 전개가 있다. 이야기의 구조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이지만, 그럴듯함이라는 경험적 감각과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집단적이고 관계적이다." (홍성희, '해설' 중에) 

   이른바 '신서정'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움직임 속에 야심차게 세 가지 기준을 임의로 설정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제니의 '유희'였다면 둘째는 황인찬의 '시니시즘'이요 마지막으로는 박준의 '스토리'를 꼽았었는데, 이를 초월하려는 레퍼런스로는 진은영의 '감각'과 박형준의 '형상화' 및 박정대의 '낭만'까지를 곁들이면 어떻겠는가 싶어 그렇게 글을 썼던 게 기억납니다. (맞거나 틀렸거나와는 전혀 무관히) 아무튼, 박준 식의 동화 같은 이야기들은 아니겠지만 차호지의 시편들 거개는 일종의 '이야기 시' 형식을 차용한 듯한 스토리텔링에 상당 부분을 기댄 모습이죠.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거창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불길 속을 걸을 수도 있"고 "매일 내게 편지를 보냈고" "사랑한다고 속삭였"습니다. "내가 울면서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건물에 끼인 채 손을 흔들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화자는 '비현실적'인 느낌을 갖습니다. 대부분의 이상적 형태들은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기에. 하지만 화자 역시 그 '사랑'에 어느덧 함께 젖어듭니다. 이는 "나도 모르게 그가 넣어둔 편지가 주머니마다 들어 있었다"는 고백이기도 하며,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한참을 걸어야 했"던 고난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은 그처럼 상호작용을 이루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평론가는 '해설'에서 그의 이야기가 갖는 힘을 '영향력'이라고 봤습니다. 그 '영향력'이 곧 말의 힘이며 말이 갖고자 한 목적이라고도 보는 편인데, 어쩌면 이는 모든 '사랑'의 표현들이 갖는 공통된 속성일 수도 있어서 굳이 이를 말의 힘이라고만 규정해 주장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말이 곧 '사랑'의 속삭임"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겠는가로도 읽히는 편이죠. 

   결국 그 '사랑'이 얻고자 하는 부분은 아마도 '미래'일 것 같습니다. 결국 그 '미래'를 향한 몸짓들이 말과 이야기를 통해 어떤 '영향력'을 갖고자 함이며, 이는 결국 독자를 향한 시인의 '프러포즈'에 더 가깝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어처구니없을 일방적인 '사랑' 앞에서 시인은 혼자서 쓰러지고 비틀거리며 혼자 울고 웃는가도 봅니다. 그래서 '미래'의 힘은 결코 가볍지가 않으며 또 이를 위해 그저 외롭고도 쓸쓸한 '영향력'을 얻고자 한 시인은 여전하게도 오늘 역시 부지런한 습작을 하고 또 이를 고쳐 쓰면서 시지프스의 바위를 계속 들어 올립니다.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냐고요? 그건 순전히 시인이 먼저 독자를 (그저 일방적으로) 짝사랑했기 때문이겠죠. ^^ 

   세상의 모든 시인들은 세상의 '사랑'을 받고자 태어난 게 아니고, 그 세상을 먼저 '사랑'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또 시인들의 '숙명'이자 스스로가 자초한 '불행'이기도 하고요. (어딜 가서 함부로 불평하지도 말아야 할) 

   즐거운 수요일 아침입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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