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김연덕, '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에서 주목할만한 몇)

단테, 정독 2025. 4. 15. 06:37

 

 

 

   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어릴 적 나를 괴롭히던 기분들은 나도 모르는 새 다 타 버린 것 같아 

 

   환하게 타고 있는 지금의 낮과 

   밤 

   아직 대가 단단한 

   꽃처럼 

   소리 지르는 

 

   끝나 버렸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분들과 그것은 가끔은 속도를 맞추어 검은 연기를 내뿜지만 

 

   이제는 내 것이 아닌 

   어릴 적 살던 집에서 하던 

   실제의 저녁 산책들처럼 

 

   자유롭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이어지던 

   마당에 끝없이 

   심긴 야생 꽃들처럼 

 

   어린 나의 주위에 차가운 

   원을 그리며 떨어졌던 재는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만 눈에 띄게 남아 나의 중심에 질서 있는 모양으로 흩뿌려져 있어 

   그것의 

 

   U자 형태는 1999년의 마당과 닮아 있어서 

   나는 언제든 다 식은 검은 재를 마신 채 그때의 여름 마당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마당에서도 내다보이는 

   자주색 겨울 모직 커튼 

 

   느리게 

 

   끊기기를 

   흐르기를 반복하는 

 

   적막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는 

   주황 분홍 

 

   냉정한 빨강으로 타는 해 

 

   저녁을 먹고 날이 어둑해지면 현관에서부터 뒷산까지 U자 모양으로 이어진 마당을 걷곤 했지 혼자서였는지 형제나 어른과 함께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오늘 나는 혼자  

 

   마당에서 가장 아끼고 무서워하던 꽃을 확인해 보려고 한다 

 

   현관 앞 숨 막히는 간격으로 심긴 나리꽃에는 점박 무늬가 있었고 벌어진 

   꽃잎들 사이로 저렇게나 끈적하게 검을 수 있을까 싶을 만치 검은 수술이 보였는데 나는 가족들이 과연 

   저것이 내뿜은 검은색 감정 

   티 없는 얼굴들로부터 패배한 

 

   오래 

   억눌린 작은 구들의 감정을 

 

   동시에 이 마당의 일부는 놓지 않은 채 

   내 미래의 마당까지 쥐고 흔들려는 아주 

   지친 모습의 

  

   연약하게 

   굴절된 뿌리의 감정을 진심을 이해하고 아름다워하는가 궁금해하곤 했다 그것은 꼭 내가 걸어갈 때만 내 쪽으로 더 다가와선 나를 예의 주시하는 동물 

   

   산책을 방해하고 

   방해되어 상한 마음을 안아 주는 이상한 점박 동물 같았지 차분한 슬픔 차분한 불 같았다 타오르는 하늘 아래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피부와 얼룩을 건너다보곤 했고 우리는 

   꼭 

   서로를 읽어내는 조용한 스트레스 같았어 

 

   산책이 끝나고 돌아오면 나는 거짓말처럼 나리의 얼룩을 잊었고 모직 커튼 안쪽에서 

   다 진 해를 

   나리의 수술처럼 검어진 바깥을 바라보았어 그리고 그 집에서 자랐던 긴 시간 

   나는 단 한 번도 그 꽃이 무섭다고 

   좋다고 

   곁을 지날 때마다 왠지 숨을 참게 된다고 이야기한 적 없었지 

 

 

   #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현대문학, 2025) 

 

 

   ... 

 

 

   현대문학 핀 시리즈에서 주목할만한 몇 : 

 

 

   봉주연이라는 이름을 혹시 들어보셨을까요?... 벌써 3년 전이긴 해도 전국단위 공모전 곳곳에 이름을 올렸던 대단한 신인인데, 최종적으로는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본심과 현대문학 신인추천 본심에서 각각 이름을 올렸었고 현대문학을 통해 공동으로 추천을 받아 등단했던 인물이었죠.

   그의 첫 시집이 불과 2년 만에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이제야 뒤늦게 접하면서 다시금 놀라움을 갖습니다. 대단한 습작량이 아니고선 불가능할 법한 일을 단숨에 해치운 것도 그렇고, 대다수 '등단' 시인들 역시 부러움을 잔뜩 가질만한 일이니까요. 

   김연덕의 세 번째 시집은 봉주연 다음으로 출간하게 된,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올해 첫 시집입니다. 

   최근 신인들의 주요한 작품 경향들 중 하나인 "낯설기만 한 행갈이와 연갈이"를 이 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겠는데, 저도 잘 적응하긴 어렵더군요... 뚝뚝 끊어지는 듯한 리듬이 갖는 새로운 '정서'는 고유함과 정연함 사이에서의 위태로운 곡예를 보는 기분도 들어 섣불리 도전할만한 용기도 잘 나지 않는 부분이라서요. (작품에 대한 평은 생략하도록 할게요.) 

   작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박소란 시인의 경우에서처럼, 최근 들어 대형 출판사들의 주요 문학상은 해당 출판사에서 출간된 작품들로만 수렴되는 듯한 인상을 풍겨온 게 사실입니다. 민음사의 경우처럼 아예 수상작 자체를 '민음의 시' 시리즈로 출간해버리는 경우도 있고요. 출판권력이 갖는 일종의 '카르텔' 효과인데... 말을 아껴두겠습니다. 상의 권위는 출판사 스스로가 만드는 법이니까요. (요즘 가장 '권위'를 갖는 문학상을 하나 꼽으라면? 그래서 이로부터 아예 자유로운 <대산문학상>을 꼽는 편이기도 해요. 역대 수상자들도 그렇고, 상금의 규모도 그렇고... 사실상 이를 능가할만한 '대안'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죠.)

   벌써 4월의 중순을 맞습니다. 날씨가 이젠 좀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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