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장석남, '내가 사랑한 거짓말' (망명에서 돌아온 '서정시'의 세계)

단정, 2025. 4. 11. 04:48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나는 살아왔다 나는 살았다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
   거짓말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거짓말

   나는 어느 날 사타구니가 뭉개졌고 해골바가지가 깨졌고
   어깨가 쪼개졌고 누군가에게는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구조되었다
   거짓말, 사실적인……
   그러나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나는 그렇게 내가 사랑한 거짓말로
   자서전을 꾸민다

   나는 하나의 정원
   한창 보라색 거짓말이 피어 있고
   곧 붉은 거짓말이 피어날 차례로 봉오리를 맺고 있다
   거짓말을 옮기고 물을 준다
   새와 구름이 거짓말을 더듬어 오가고
   저녁이 하늘에 수수만 년 빛을 모아 노래한다
   어느 날 거짓말을 들추고 들어가면
   나는 끝이다
   거짓말
   내가 사랑할 거짓말

   거짓이 빛나는 치장을 하고 거리를 누빈다


   * 장석남, 같은 제목의 시집 (창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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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명에서 돌아온 '서정시'의 세계 : 
 
 
   한 시대를 풍미해 온 '김수영 문학상'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20세기 후반 대한민국 시단 전체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큰 미덕이 존재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입니다만) 이성복, 황지우와 김광규, 최승호를 거쳐 김용택, 장정일, 김정웅을 그리고 조정권과 장석남까지를 아우르는 시기야말로 이 상이 젊은 시단을 대표할만한 그 어떤 상징물처럼 여겨지기도 한 시절이었나 봅니다. 지금까지도 다양한 활동 중인 유하, 김혜순, 나희덕 등이 그 다음번 수상자들이기도 하죠.  
   그 황금기를 거쳐 온 시인들 중 현역이 이제 몇몇에 불과한 건 그만한 까닭이 있겠지만, 올해 들어 처음 나온 창비시선의 주자로는 '서정시'의 대가 격인 장석남 시인이 또 있겠습니다. 올해로 환갑의 나이를 맞는 이 시인한테는 불과 아홉 번째의 시집이라고도 합니다. 
   흔히들 '서정서'를 말할 때면 크게 '서사'와 '진술'의 두 가지 덕목을 꼽습니다만, 특히 '진술'에 있어서는 예전에도 다루었듯이 '감각'과 '형상화'라는 요소들이 매우 중요하게 작동합니다. (영화로 치자 하면 '서사'가 갖는 힘을 내러티브로, 반대로 이 '진술'의 힘은 미장센과 몽타주 전반에 걸친 부분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겠죠.) 
   장석남 시인이 크게 주목받은 연유 중 하나로는 아마도 이 '감각'과 '형상화' 두 측면에서 모두 발군의 기량을 보여준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비슷한 사례로는 진은영, 박형준 등을 꼽을 수 있겠는데 이들 모두가 철학과와 문창과 출신이라는 점과 또 현직 문창과 교수들이라는 점 또한 해당 학과들에 대한 일종의 '신드롬'을 낳았다는 측면 역시 아예 무시할 순 없겠고요. (현재 이들은 각각 한양여대, 조선대, 동국대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인은 "누군가에게는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구조되었다"는 "거짓말"로 "자서전을 꾸민다"라고 말합니다. "보라색" 꽃이기도 한, "새와 구름"이 오가고 "저녁"이 "노래한다"는 시인의 "정원"에서, 시인은 그 "거짓말"을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할 거라 말합니다. 기어코 "거짓이 빛나는 치장을 하고" 나서는 시인의 자각은 어제도 말했던 "거짓을 통해 진실을 말한다"는 굳은 믿음을 보여준다고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시인이 사랑한 그 "거짓말"이야말로 곧 시에서의 '진술'에 다름 아닐 것이며, 그건 앞서서 말한 대로 '감각'적인 언어들에 의해 구사된 '형상화'의 흔적들로 남습니다. 독자들은 그의 수사에 현혹당하며 또 그 흔적에 취하며 이 시를 마주하게 됩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이미지는 이로써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시인과 독자 사이에 자그만 다리 하나를 놓습니다. 시인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미래파'의 시대 이후부터 '서정시'는 당연히 "올드하다"는 누명을 쓴 채 조명을 받지 못한 채 지내온 편입니다. (어쩌면 시인의 대표작처럼 일종의 '망명'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가끔 빛나는 '서정' 한 편만으로도 온 시대를 망라할만한 그 어떤 '가치'를 얻을 수 있다면, 응당 이 장르의 영속성은 충분하다고까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인이 증명한 대로 '서정시'는 앞으로도 영원할 것 같습니다. 최소한 언어라는 게 존재하는 한. 
   아침부터 좋은 시 한 편을 읽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이 그렇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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