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 24

안희연, '율마' ('신서정' 또는 '서정시'의 새 시대)

율마 창가가 환해졌네, 말했습니다 그가 나를 처음 이곳으로 데려오던 날이었습니다 율마는 측백나무과에 해당됩니다 강한 빛을 좋아하며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지요 어린나무일수록 물을 더 자주 주어야 합니다 그는 동봉된 메모를 꼼꼼히 읽으며 내 앞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하루를 지켜봅니다 잠에서 깨어나 상을 차리고 먹다 만 밥을 치우고 티브이를 보다 다시 잠드는 생활입니다 그는 좀처럼 외출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에게 발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아주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것 외엔 미동도 없습니다 물과 햇빛이 필요한 건 오히려 그쪽인 것 같습니다 나는 알지 못합니다..

문학노트 2025.04.29

곽재구, '도솔암 풍경' ('올드함'을 읽는다는 일)

도솔암 풍경 칡꽃 향기 달빛 쏟는 선운사 도솔암에서 하룻밤 비럭잠을 잤습니다 밤늦게 최승자의 시집을 읽는다는 처녀보살은 광주에서 왔다는 말 듣고 어쩐지 내 행장에 최루탄 냄새 나더라고 웃었습니다 지장보살도 산 아래 내려가면 최루 가스에 울먹일 것이라 말했더니 방금 친 인절미 한 접시 따뜻하게 내왔습니다 밤 깊어 머슴새 울음 잠들고 창문 열면 노오랗게 불 밝힌 선방 하나 계곡물 소리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 곽재구, 서울 세노야 (문지, 1990) ... '올드함'을 읽는다는 일 : 곽재구의 오래된 시집 한 권을 읽었습니다. 데뷔작인 '사평역에서' 한 편만으로 '대표작'이라는 수식어를 대체해도 될 만..

문학노트 2025.04.27

윤지양,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사월의 마지막 주말)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신의 시간 안에 들어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너바나 음악이 흐른다. 인간의 시간은 바퀴와 함께 굴러간다. 신의 시간은 차창 밖에 있다. 호흡이 길다. 막 지나온 공연을 떠올렸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향해 조명이 비춰지는 시간.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현을 조율하고 첼리스트 두 명이 만담을 나누었다. 이전에도 신을 생각한 적은 있지만 무엇으로 태어나는 것일까? 플루트가 금빛으로 빛났다. 지휘자는 폴짝 폴짝 뛰기도 했다. 사람들이 중간에 기침을 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기침을 했다. 어떤 사람은 발작처럼 튀어나왔다. 기침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보았던가. 또 다른 사람이 뒤..

문학노트 2025.04.25

김이강, '안국 너머, 공예 박물관, 비는 내리지만' (무의미한 반복과 유의미한 성찰)

안국 너머, 공예 박물관, 비는 내리지만 희곡집을 읽었다 비는 내리지만 테라스에 앉아서 비를 보지 않고 책을 보면서 상연된 것을 떠올리며 그것을 읽었다 둘은 서로 살아나서 테라스로 온다 옆자리에 개를 데려온 사람들이 있다 한 사람이 개를 안고 다른 사람은 곁에 앉고 둘은 서로 사랑하는 것 같다 사랑하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개를 안고 비를 바라보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면 개에게 간식을 주고 자기들의 책을 읽겠지 처마 아래서 사람들이 우산을 턴다 # 김이강, 경의선 숲길을 걷고 있어 (현대문학, 2024) ... 무의미한 반복과 유의미한 성찰 : ..

문학노트 2025.04.24

나희덕, '시와 물질' (따뜻한 정서가 감싼 시의 효용)

시와 물질 로알드 호프만은 화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규칙을 적용한 물질에는 몇 가지 폭발물과 독극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도 생각해보지 못한 물질들이었다 그 책임을 묻는 질문에 호프만은 대답했다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물질은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그 물질들의 특허권을 갖고 있지 않고 그 결과로 돈을 벌지도 못했어요 어떤 물질이 위험하다고 그것을 발견한 책임을 과학자 개인이 져야 할까요? 우리의 발견은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발견은 수십만 명의 과학자가 함께 맞추며 찾아가는 거대한 퍼즐 속의 일부일 뿐입니다 심지어 시도 사람을 해칠 수 있어요* 슈테판 클라인과 로알드 호프만의 대화를 읽다..

문학노트 2025.04.23

서윤후, '흑백판화' ('추화'의 미학에 관하여)

흑백판화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에서 백반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덜 다정하지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건 아닌데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참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온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어서 그게 벌어지는 모든 일의 이유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되진 않는다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막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

문학노트 2025.04.22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

문학노트 2025.04.21

최현우, '충돌 지점'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

충돌 지점 시간의 살은 언제 갈변하는가 읽으려던 책 말고 읽었던 책이 불쑥 책기둥 복판에 끼어 있을 때 잊었던가, 잃었던가 하물며 저기 어느 날 영혼의 앞뒤를 바꾸었던 문장이 있었는데 그저 그렇게 처박혀 있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럭에서 빠져나온 종이컵으로도 따라오는 차의 앞 유리가 깨지듯 울지 않고 웃으면서 조용히 빛을 씹던 자들의 이빨자국 모여드는 밤이 있다 현생과 전생까지 순식간에 끌려 들어와 박살이 나는 찰나가 있다 날개와 허공이 마찰하는 부분은 공중의 어떤 곳을 망가뜨리는가 운다 혼자면서 혼자로 두지 않으려 했던 사람은 얼마나 두려웠나 통증 없이도 이토록 멍들 수도 있는가 ..

문학노트 2025.04.20

김수영, '푸른 하늘을' (혁명기념일에 부쳐)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유고시집, 거대한 뿌리 (민음, 1974) ... 혁명기념일에 부쳐 : "혁명은 언젠가 이루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 자체다" 해마다 4월 19일이면 신문들마다 기념할만한 시 한 편을 함께 내놓곤 하는데, 지난 2016년 겨울의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

문학노트 2025.04.19

윤유나, '해운대 바닷가 소리회' (시국은 무사태평인지...)

해운대 바닷가 소리회 아침은 너무 멀어 웃음 기다렸지 웃음 파도 길었던 하루 파도 키득 웃음 묶음 파도 파도 가르는 소리 파도 투과 쓸려 가는 모래 모래 해변 쓸리는 저변에 깔린 사람들 끌어내려 바다 넘치고 밀어넣는 바다 비명 바다 바다 비명 기어이 바다 말하지 다른 문을 열고 파도 다가가는 빗속에 비처럼 낯선 바다 듣는 파도 ? ?? !? ... 다시 파도만 물속에 잠긴다 물 밖의 해변 가녀린 해변 부딪치고 덤벼들어 물방울 묶음 투척 잠잠한 물의 바다 다가서다 펼쳐진다 파도 네 다리 펼친 갈색 짐승 떠다니는 잡음 바다 바다 잡음 ..

문학노트 2025.04.18

채호기, '맨 앞에 괸 시' (신구의 공존, 2025년의 시단)

맨 앞에 괸 시 그것은 너의 몸속에 그것을 묻을 그것의 흰 종이다. 그것은 너와 네 꿈으로 합산한 몸을 둥글게 말고 공처럼 벽에 던져졌다. 너는 그것의 머리를 묶은 바다를 풀어낸다. 그것은 작은 입술이 되어 너의 젖가슴 사이로 파고든다. 불을 끈다. 불꽃을 위해 종이에 담은 네 심장을 돌려주마. 시동을 켠다. 엔진 흡기밸브가 흡입한다. 공기와 휘발유가 섞인 혼합체를. 피스톤이 밀고 올라가며 실린더를 압박한다. 피스톤의 운동이 정점에 이르면 점화 플러그에 불이 붙고 내부에 가연성 화학물질이 폭발한다. 피스톤의 직선운동이 구동축의 회전운동으로 바뀐다. 오르다 오르다 천장에 막힌 고동치는 예민한 풍선들. ..

문학노트 2025.04.17

태이, '자이가르닉 위령제' (세월호 11주년을 맞는 아침)

자이가르닉 위령제 아주 작은 접점에서 관찰된 모습은 숟가락으로 살짝 눌러 동글납작하게 만들고 돌려 구우면 버터 향이 천천히 올라옵니다 녹진합니다 종이로 된 소식들은 비를 맞으며 글자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거죠 우천 시에도 자이가르닉 위령제는 우산 속에서 열리니까요! 일요일 아침이니, 노래 한 곡 어때요 종이에 싼 빵과 튤립 한 다발 영어인지 프랑스어인지가 막 적힌 신문 한 부에 샹송이 좋겠네요 아무래도 신청주의니까요 나는 오래된 재생기입니다 주로 의미 없는 것들을 재생합니다 한 곡조 한 곡조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집니다 지난 일은 지난 일, 여태 말로 태어나지 못한 것들이 옹송그려 침묵하고 있습니..

문학노트 2025.04.16

김연덕, '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에서 주목할만한 몇)

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어릴 적 나를 괴롭히던 기분들은 나도 모르는 새 다 타 버린 것 같아 환하게 타고 있는 지금의 낮과 밤 아직 대가 단단한 꽃처럼 소리 지르는 끝나 버렸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분들과 그것은 가끔은 속도를 맞추어 검은 연기를 내뿜지만 이제는 내 것이 아닌 어릴 적 살던 집에서 하던 실제의 저녁 산책들처럼 자유롭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이어지던 마당에 끝없이 심긴 야생 꽃들처럼 어린 나의 주위에 차가운 원을 그리며 떨어졌던 재는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만 눈에 띄게 남아 나의 중심에 질서 있는 모양으로 흩뿌려져 있어 그것의 U자 형태는 1999년의 마당과 닮아 있어서 나는 언..

문학노트 2025.04.15

임경섭,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4월 중순의 눈꽃)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발견한 뒤부터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안다고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와 마주한다 또 다른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다 어? 어떻게 내가 모르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두 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처음 들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만이 유일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라 여긴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도처에서 태어나고 있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당신의 사방에 놓여 있지만 당신은 당신의 처음 그 ..

문학노트 2025.04.14

이기성,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시를 쓴다는 일에 대해서)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항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네게 종이를 한장 건네고 아무것도 쓰지 못했음을 깨닫고 돌아보지만 너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이고 정작 쓰지 못한 마음은 주머니 속에서 쓰디쓴 돌멩이처럼 굴러다닐 때 시계는 정지하고 남아 있는 것은 박동하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에도 남아 있는 것 파도가 사라진 뒤에도 남은 것 네가 떠난 뒤에도 남은 것 어둑한 너의 눈동자처럼 아직은 있는 것 손때 묻고 더러운 빈 종이, 그런 시를 들고 나는 영원히 한 시를 떠나지 못한다 # 이기성, 감자의 멜랑콜리 (창비, 2025) ... 시를 쓴다는 일에 대해서 : 요란한 밤비가 그친 후에도 벚꽃들의 안부가 궁금해 잠시 바깥을 다녀왔습니..

문학노트 2025.04.13

이동욱, '폐선' (등단 18년, 2권의 시집)

폐선(廢線) 내 몸엔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누군가 뛰어온다. 걸어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의 뽐내는 걸음걸이를 보았으면, 춤추듯 공중에서 두 발을 모으는 자세를 기대했지만 그는 뛰어오고, 그는 너무 빨리 그가 남긴 것은 모두 그를 사라지게 한다. 혹은 사라지기 전에 그는 뛰어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가 달려가는 곳이 어딘지, 내 몸은 알지 못한다. 그는 뛰고 있을 때만 존재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내 심장에 닿고, 허파를 지나 팔뚝과 허벅지를 긁으며 어딘가 잠시 머물러 있다. 그는 나를 만나고 싶을 것인가. 나도 나를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

문학노트 2025.04.12

장석남, '내가 사랑한 거짓말' (망명에서 돌아온 '서정시'의 세계)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나는 살아왔다 나는 살았다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 거짓말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거짓말 나는 어느 날 사타구니가 뭉개졌고 해골바가지가 깨졌고 어깨가 쪼개졌고 누군가에게는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구조되었다 거짓말, 사실적인…… 그러나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나는 그렇게 내가 사랑한 거짓말로 자서전을 꾸민다 나는 하나의 정원 한창 보라색 거짓말이 피어 있고 곧 붉은 거짓말이 피어날 차례로 봉오리를 맺고 있다 거짓말을 옮기고 물을 준다 새와 구름이 거짓말을 더듬어 오가고 저녁이 하늘에 수수만 년 빛을 모아 노래한다 어느 날 거짓말을 들추고 들어가면 나는 끝이다 거짓말 내가 사랑할 거짓말 거짓이 빛나는 치장을 하고 ..

문학노트 2025.04.11

백가경,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메타버스'에서의 시학)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문학노트 2025.04.10

김주연, '겨울과 봄 사이' ('평생직업'은 스스로 증명하는 일)

겨울과 봄 사이        외우(畏友) 지하가 그려준     그림 속의 난이 베란다 안쪽에서    힘차게 웃고 있네    그림 속 자연은 언제나 청춘    오랜만에 들려온 영상 10도 소식    외투 벗고 나갔다가    오싹- 도로 들어왔다    겨울과 봄이 함께 내 안에 있을 줄은      * 김주연, 강원도의 눈 (문지, 2025)      ...        '평생직업'은 스스로 증명하는 일 :         김현 선생과 함께 엮어낸 는 문학도들의 입문서로 가히 '고전'이라 할만큼 대단한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976년에 나온 이 책이 이제 벌써 초판을 발행한 지도 50년이 다 돼갑니다. 지난 50년 동안 이 책을 통해 문학을 처음 접했거나 또는 '체계적인 커리큘럼'이라는 타이틀로도 접했을 숱..

문학노트 2025.04.09

박준, '지각' (늦은 때가 가장 이른 섭리)

지각      나의 슬픔은 나무 밑에 있고    나의 미인은 호숫가에 있고    나의 잘못은 비탈길에 있다     나는 나무 밑에서 미안해하고    나는 호숫가에서 뉘우치며    나는 비탈에서 슬퍼한다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      * 박준, 마중도 배웅도 없이 (창비, 2025)      ...      늦은 때가 가장 이른 섭리 :      박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비로소 출간됐다는 소식을 공교롭게도 책을 펴낸 출판사 광고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카카오톡에서 우연히 채널 알림창을 열었는데 시인의 출간 소식을 접한 심경은 무덤덤함과 반가움과 '이제서야?' 같은 궁금증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나 봅니다.    21세기, 즉 2000년 이후로 가장 ..

문학노트 2025.04.08

이장욱, '농담' (4월의 시작, 새로운 한 주)

농담 후회가 전화를 걸어와서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나는 반가워서 후회를 만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함께 산책을 했는데 후회가 자꾸 이상한 농담을 해서 나는 말했다. 이를 덜덜 떨며 말했다. 당신이......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압력솥 안의 쌀알처럼 들끓었는데 창밖의 태풍인 듯 휘몰아쳤는데 세월이 흐르자 흰 그릇에 담긴 밥처럼 고요한 밤하늘처럼 무심해졌지. 후회가 한 농담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아, 그런데 그건 눈 내리는 밤의 고독한 사람에 대한 농담이었을까?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농담이었을 텐데 그런데 왜 나는 그토록...... 십년 이십 년 삼십 년이 지난 뒤에 나는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가..

문학노트 2025.04.07

글을 쓴다는 것은 '정치력'의 발현

글을 쓴다는 것은 '정치력'의 발현 어제 한 지인과의 대화에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정치력' 확보 차원이라고 말했는데, 스스로 이 말을 곱씹어본다 확장 또는 확대까지를 염두에 둔 이 '확보'는 다시 말해 입지를 갖는다는 뜻인데, 그건 책을 내고 독자를 얻고 또는 도서관에 입성을 하고 무슨 무슨 문학상을 탔다거나 또 심지어는 어디 어디에 출마를 하는 행위들까지도 모두 망라해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고도 말하였다 실제로 그러한가? 스스로한테 이 질문을 던져본다 발터 벤야민이 쓴 에서도 결국 현대예술이 스스로의 '아우라'를 잃어가는 동시에 인간이 이를 얻고자 한다면 그건 바로 '정치력' (대부분 이를 일상적 표현으로 '영향력'이라 말하지만 엄밀하게) 확보라는 면일 거라고..

개인노트 2025.04.02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봄의 안부, 온다고 함)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醮禮廳)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곰나루 : 충남 공주에 있던 나루. 동학 농민군이 최초로 봉기한 곳 * 초례청 : 전통 혼례인 초례를 치르던 장소 * 신동엽, 52인 시집 (현대한국문학전집 제18권, 신구문화사 1967) ... 봄의 안..

문학노트 2025.04.02

T. S. Eliot '황무지 The Waste Land' (4월은 잔인한 달이 되지 않기 위해)

황무지 The Waste Land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I. 죽은 자의 매장 The Burial of the Dead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른버거 호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

문학노트 2025.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