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 18

황유원,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오월의 마지막 날)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그 풀이 뚝, 뚝 끊기는 소리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치던 피아니스트의 굽은 오른 손은 불어오는 바람에 서서히 펴져 나무처럼 자라오른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이제는 한가한 게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게 된 나는 저 양들을 보며 비로소 무언갈 깨달아간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연주는 얼마나 놀라운가 풀 한포기 없는 방을 풀밭으로 만들어 놓고 천장을 본 적 없는 하늘빛으로 물들이는 이 연주는, 머릿속을 점령한 채 계속 날뛰는 무가치한 생각들을 스르르 잠들게 하는 이 연주는! 음악은 연주와 더불어 잠이 들고 양들도 이젠 다들 풀밭에 무릎 ..

문학노트 2025.05.30

황병승,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 (아젠다)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오후 빛바랜 작업복 차림의 한 늙은 선로공이 보수를 마치고 선로를 따라 걷고 있다 앙상한 그의 어깨 너머로 끝내 만날 수 없는 운명처럼 이어진 은빛 선로 그러나 언제였던가, 아득한 저 멀리로 화살표의 끝처럼 애틋한 키스를 나누던 기억 보수를 마친 한 늙은 선로공이 커다란 공구를 흔들며 선로를 따라 걷고 있다 #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문지, 2013) ... 아젠다 : 21세기 들어 경영학 분야의 최고봉 중 한 명이자 일명 'BPR'의 창시자이기도 한 MIT의 마이클 해머 교수가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새로운 책을 들..

문학노트 2025.05.23

김수영, '책' (좋아하는 시인)

책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 김수영, 오랜 밤 이야기 (창비, 2000) ....

문학노트 2025.05.20

한강, '소년이 온다' (5•18 45주년 아침)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 (창비, 2014) ... 5•18 45주년 아침 : 한강 작가가 "아물지 않는 기억"이라고 쓴,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라고 쓴, "수없이 다시 태어나 살해당했다"고..

문학노트 2025.05.18

김수영, '절망' ('쿠데타'와 '희망' 그리고 '사랑')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김수영 전집 1 (민음, 1981) ... 쿠데타와 '희망' 그리고 '사랑' : 1981년에 출간돼 초판으로 63쇄를 찍었던 1권에 실렸던 시가 모두 합쳐서 177편에 불과합니다. 시인에 대한 출판사의 애정도 참으로 대단했어서 이듬해인 1982년에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으며, 시인의 육필원고들까지 모두 다 합..

문학노트 2025.05.16

이다희, '시 창작 스터디' ("스승"이라는 말)

시 창작 스터디 토스트를 사먹다가 알던 선배와 마주쳤다. 다희야 내가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린데 시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나도 예전에 시 진짜 열심히 썼거든. 너도 알지? 나는 적당히 대답하면서 토스트를 먹는다. 오늘 점심은 차라리 굶을 것을. 굳이 먹겠다고 내려와서 선배랑 마주쳤다. 다희야 소문 들었어. 그 형이랑 왜 헤어졌어? 아니 욕하지는 말고...... 네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 선배는 토스트를 먹는 입으로 자꾸 내 근황을 물어본다. 나는 선배가 그냥 토스트만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 처음부터 네가 아깝다고 생각했어. 나는 앞으로 볼 일 없으니 그냥 참자고 생각했다. 다희야 오빠가 하는 말 다 시 이야기거든.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그리고..

문학노트 2025.05.15

고정희, '강물' (스승, 한글, 오월)

강물 - 편지 1 푸른 악기처럼 내 마음 울어도 너는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암울한 침묵이 반짝이는 강변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종일 정결법 논쟁으로 술잔을 비우고 너에게로 가는 막배를 놓쳐버린 나는 푸른 풀밭, 마지막 낙조에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이름과 비구상의 시간 위에 쓰라린 마음 각을 떠 널다가 두 눈 가득 고이는 눈물 떠나가는 강물에 섞어 보냈다 # 고정희, 지리산의 봄 (문지, 1987) ... 스승, 한글, 오월 : 내일이 스승의 날입니다. '겨레의 스승'인 세종대왕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지도 이제 꼭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 가지 의미를 덧붙이자면,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이 창간을 한 날이기도 합니다. 동아일보 ..

문학노트 2025.05.14

백아온, '디스토피아' ('한강' 신드롬을 낳은 신춘문예)

디스토피아 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 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쇼윈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 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고 믿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고 ..

문학노트 2025.05.12

오은, '1년' (<루틴>에 얽힌 소회)

1년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이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 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 줄 ..

문학노트 2025.05.11

김용희, '<구인> 광명기업' (21세기의 노동시)

광명기업 외국인 친구를 사귀려면 여기로 와요 압둘, 쿤, 표씨투 친해지면 각자의 신에게 기도해줄 거예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글로벌 회사랍니다 요즘은 각자도생이라지만 도는 멀고 생은 가까운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해요 매운맛 짠맛 단맛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성실한 태양 아래 정직한 땀을 흘려봐요 투자에 실패해 실성한 사람 하나쯤 알고 있지 않나요? 압둘, 땀 흘리고 먹는 점심은 맛있지? 압둘이 얘기합니다 땀을 많이 흘리면 입맛이 없어요 농담도 잘하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봐요 쿤과 표씨투가 싱긋 웃습니다 서서히 표정을 잃게 되어도 주머니가 빵 빵 해질 거예요 배부를 거예요 소속이란 등껍질을 가져봐요 노동자란 명찰을 달아주고 하루의 휴일을 선물해 드릴게요 혼자 쌓고 혼자 ..

문학노트 2025.05.10

윤후명, '소설가 Y씨의 하루' (글이라는 숙명에 관하여)

소설가 Y씨의 하루 소설가 Y씨는 예전에 시를 썼다고 한다 요즘은 안 쓰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를 알고 있다 꽃을 가꿔 식물학자 흉내도 내고 술을 마셔 고래 흉내도 내며 세상을 거꾸로 보려 하지만 사랑이 그를 가로막는다 아무리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가도 사랑이 바로 보라고 꾸짖기 때문에 그는 늘 불안하다 그래서 꽃 피면 꽃 지면 한잔하자고 누구에게나 보챈다는 것이다 소설가 Y씨는 예전에 시를 썼다고 한다 헛소문일지도 모른다 # 윤후명, 쇠물닭의 책 (서정시학, 2012) ... 글이라는 숙명에 관하여 : 윤후명 시인께서 작고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 꺼내놓는 ..

문학노트 2025.05.09

안수현,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오월을 시작하며)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

문학노트 2025.05.07

김소연, 'i에게' (어린이날, 초파일, 입하)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지난겨울 죽은 나무를 버린 적이 있었다. 마른 뿌리를 흙에 파묻고서 나무의 본분대로 세워두었는데. 지난겨울 그렇게 버려지면 좋았을 내가 남몰래 조금씩 미쳐갔다. 남몰래 조금만 미쳐보았다. 머리카락이 타오르는 걸 거울 속으로 지켜보았고 타오르는 소리를 조용히 음미했다. 마음에 들었다. 실컷 울 수도 실컷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끝까지 울어보았고 끝까지 웃어보았다. 너무 좋았다. 양지에 앉아 있었을 때 웅크린 어느 젊은이에게 왜 너는 울지도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젊은이의 눈매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더라. 그건 분명 돌멩이였다. 우는 돌을 본 거야. 그는 외쳤어. 미칠 것 같다고! 외치는 돌을 본 거야...

문학노트 2025.05.05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절망'과 '희망' 사이의 한 섬)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 김수영, 같은 제목의 시집 (창비, 1996) ... ..

문학노트 2025.05.04

허연, '작약과 공터' ("책임을 진다"는 용기)

작약과 공터 진저리가 날 만큼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비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아이의 허기 만큼이나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계절 작약은 울먹거림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에는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공터 밖으로 전해지면 너무나 평범해져버리는 고요 때문에 작약과 나는 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 놓았다 작약을 가만히 ..

문학노트 2025.05.02

박준, '설령' (노동절 아침에 꺼내는 시)

설령 열까지 다 세고 나면 다시 하나둘 올라야 합니다 설령 높고 험하다 해도 딛고 있는 바닥부터 살펴야 합니다 낮고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걸음을 옮깁니다 다만 이후의 시간에 관해서는 얼마간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어차피 나의 기억과 나의 망각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채 닫지 못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들만을 적기로 합니다 "우리는 목소리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닮아간다" "서리고 어리는 것들과 이마를 맞대며 오후를 보냈다" "흙과 종이와 수선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장 하나의 글로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다가오는 계..

문학노트 2025.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