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신경림, '파장'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단정, 2025. 3. 7. 06:09

 
   
    
   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신경림, 농무 (창비, 1975) 
 
 
 
   ...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 

 

      

   신경림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한 해가 다 되어갑니다. 문지시인선의 첫 호를 기록한 황동규 시인처럼 창비시선의 첫 호로 등장했던 시집 <농무>는 한 굵직한 출판사의 정체성을 남김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고전'이 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창비'와 '문지' 시대를 상징하는 두 평론가들인 백낙청, 김현의 존재감이 훨씬 더 커 보이기도 하지만)   

   구수한 정감이 일품인 신경림의 시들에서 제일 먼저 주목한 건 민중들의 삶이었을 테며, 아마도 백낙청은 이를 일컬어 '민중시'라는 호칭을 처음 쓰지 않았을까로도 추측합니다. 물론 '민중시'라는 용어 자체의 연원이 이 생각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보다 더 정확한 의미를 갖는 '민중시'의 연원을 박노해의 시작활동부터라고 보는 분들도 꽤 많으니까요.)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겨운 "못난 놈들"이 장터에서 소소히 나누는 일상들, "자꾸만" "그리워지"는 서울과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로 대체되는 지방의 대조적 모습 속에도 어쩌면 민중들의 삶 역시 그 어떤 '욕망'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걸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현대적 용어로 치면 '부'로 대표되는 그 무엇에 관한 상념들은 그저 쓸쓸하기만 합니다. 

   얼마전에 여러 군데의 도서관들을 찾아 철 지난 창비시선을 차례로 모아 빌렸는데, 요즘의 공공도서관들에서는 심지어 이 거룩한 경전들마저 이빨 빠진 호랑이만큼 죄다 철거된 양상이어서 서고 앞에 서 있는 제 모습 또한 마찬가지의 풍경이지 않았을까 싶어 오늘의 아침은 이 시편을 꺼내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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