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이기성,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시를 쓴다는 일에 대해서)

단정, 2025. 4. 13. 06:51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항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네게 종이를 한장 건네고 아무것도 쓰지 못했음을 깨닫고 돌아보지만 너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이고
  
   정작 쓰지 못한 마음은 주머니 속에서 쓰디쓴 돌멩이처럼 굴러다닐 때 시계는 정지하고 남아 있는 것은 박동하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에도 남아 있는 것 파도가 사라진 뒤에도 남은 것 네가 떠난 뒤에도 남은 것 어둑한 너의 눈동자처럼 아직은 있는 것
  

   손때 묻고 더러운 빈 종이, 그런 시를 들고 나는 영원히 한 시를 떠나지 못한다  
 
 
   # 이기성, 감자의 멜랑콜리 (창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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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쓴다는 일에 대해서 : 
 
   
   요란한 밤비가 그친 후에도 벚꽃들의 안부가 궁금해 잠시 바깥을 다녀왔습니다. 다행히 모든 꽃잎들이 다 지진 않았고 어떤 나무는 통째로 모양도 굳건히 잘 버텨냈나 봅니다. 비록 절정의 순간은 이제 지나쳤겠지만 아직도 화사한 자태들은 며칠 더 구경해 볼 수 있겠습니다. 4월 중순의 새벽, 이제 아침입니다. 세월호를 기억하게 만드는 이번 한 주가 될 전망이기도 하죠... 
   2015년 현대문학상 수상자인 이기성 시인의 신작을 2025년의 창비시선에서 꺼내봅니다. (여성인 줄도 몰랐었는데 이번에 프로필을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다정한 말투가 인상적인 이 시인도 벌써 올해도 59세이니, 내년이면 환갑을 맞겠습니다. 요즘 들어 시니어들의 신작이 늘어난다는 일은 꽤 반가울 법도 합니다. 
   "항상 남아 있는 것"이 시를 쓰게 만듭니다. "아무것도 쓰지 못했음을 깨닫고" "정작 쓰지 못한 마음"이 "굴러다닐 때" "남아 있는 것은 박동하지 않"습니다. "너의 눈동자처럼 아직은 있는 것"... 비로소 "손때 묻고 더러운 빈 종이"에 시인은 이것을 쓰고자 합니다. 그걸 "떠나지 못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것이 '그리움'인지 '미련'인지 또 아니면 '사랑'인지는 몰라도, 이 다정한 말투의 독백은 곧 '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시와 편지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무언가는 쉽게 알아채도 같은 무언가를 말할 때면 쉽사리 적어내기가 어려운 단어들 몇이 떠오릅니다.
   그 단어들을 생각해보는 아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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