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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할 일들 (퇴고)

후회할 일들 세찬 풍파 속에서도 말발굽을 잘만 지켜낸다면 길을 잃지 않을 거라는 믿음 따위로 그 먼 행군을 마다하지 않던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잃었던 건 말발굽이 아니라 그들의 처자식임을 과연 몰랐겠는가 영문도 모를 전쟁터에서 사지가 잘려나간 채 죽어간 동료들을 애도하며 매일밤 그들이 태운 송장 냄새의 역겨움이 하늘을 찌르고 검은 하늘 주위로 까마귀 떼가 한참 날아오를 때 어쩌면 그 풍파를 실감했는지 모른다 더 이상 죽지 말자 더는 죽어선 안 된다 하면서도 또 죽어간 동료들을 위하여 모진 눈보라를 얼굴로 마주한 행렬에서 혹 어떤 남녀는 눈이 마주쳤는지 모른다 그 먼 행군길에서 손을 잡아줄 따스한 마음이 전해져 온다면 어찌 마다할 리 있겠는가 하지만 늘 바람 같은 감정이 일고 하룻밤의 연정은 이내 ..

글/습작 2024.06.06

독야청청 (퇴고)

독야청청 그러지 말라고 가지 좀 말라고 남들처럼 다 그렇게 하면 될 걸 굳이 혼자서 그럴 필요가 있냐고 내게 자주 했던 말들이 오는데 고맙게도 내가 듣고팠던 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하는데 가야만 할 길이 있으면 좋을 텐데 군자는 대로행이라고도 했는데 굳이 오솔길도 마다하지 않는데 굳이 골목길 담장 기웃거리는데 어설픈 고백따윌 또 늘어놓는데 아무도 듣지 않을 말을 중얼대며 새벽길을 터벅터벅 이리 걷는데 내 인생의 무게는 얼마만큼인지 그 길의 끄트머리엔 뭐가 있을지 그곳에 가면 널 만날 수 있을지 네 안부들이 커피 한 잔에 녹고 그렇게 따뜻한 온기 뿐이라면 후후 불면서 함께 웃어줄 텐데 어쩌면 손도 한 번 잡았을 텐데 네가 보이지도 않는 이 길에서 막막한 내 발길이 닿는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져만 가는..

글/습작 2024.06.06

지리멸렬 (퇴고)

지리멸렬 안 된다고 그랬다 그러면 안 될 일, 멈춰야만 될 일이라고 했다 소돔의 낯선 이한텐 약점을 감추려 친절했고 친절한 아브라함은 화를 낼 일도 없어야 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너무도 부당한 일 아닌가 첫인상이 안 좋은 조카와도 친할 수 있는 건 가장 사랑한 아내 앞에선 종종 화를 내는 건 첫인상이 안 좋다는 핑계로 가장한 외면은 돌아보면 안 된다던 주문을 잊은 소금기둥 더 이상 그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길가에 핀 이름도 모를 들풀 혹은 꽃이거나 겨울을 이겨낸 파란 하늘 위 하얀 뭉게구름 새벽 찬 공기와 속삭이던 작은 빗방울들도 얼어터진 손이 수줍게 건네주던 편지 역시 첫인상은 늘 별로였고 돌아서야만 보였다 무엇을 여태껏 간과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무엇을 이제라도 지탄해야만 하는 것일까 무엇이 더 해서..

글/습작 2024.06.06

낙화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적막강산 (모음출판사, 1963)

개인노트 2024.06.01

裸木

裸木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 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신경림, 쓰러진 자의 꿈 (창비, 1993) :: 메모 :: 작년에 첫 시집을 엮으며 추린 목록들 중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이란 제목의 습작이 있었는데, 그 습작..

문학노트 2024.05.23

어여쁜 웃음 뒤엔 그 사람이 서 있다 (퇴고)

어여쁜 웃음 뒤엔 그 사람이 서 있다 당신은 외투를 집어 들고 해변으로 걸어간다 얼기 시작한 귀를 뜯어내어 막 떠오른 흰 새에게 붙여준다 닫힌 문 안쪽에서 말들이 뛰고 멎지 않는 피처럼 눈이 내리는 저녁 망치질 소리가 내 귀 안에 쌓이고 - 윤은성, '밤의 결정'에서 ("주소를 쥐고", 문지 2021)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며 손에 꼭 쥔 실타래에선 번번이 툭 끊어진 실을 만질 때가 있다 끄트머리를 안다는 일은 되감고 매듭을 짓는 일 이어 붙이는 일들도 함께 안다는 것이어서 전화기의 줄을 확 잡아당겨 끊는 경우는 사라졌고 대신에 종료버튼을 꾸욱 누르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켜고를 반복했다 이윽고 다시 실타래를 감으면 풀어놓았던 먼지들 하나둘 되감겨 더 이상 날아오르지 않게 되고 사람을 생각한다는 일도 전..

글/습작 2024.05.22

삶은 방정식 인생은 부등식

삶은 방정식 인생은 부등식 삶은 방정식 인생은 부등식 삶의 고요한 순간들을 찾고자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방정식을 찾았고 자유와 평등, 이성과 감정, MBTI를 저울질하곤 했어 균형을 맞추려 애썼어 인생의 여러 길목에서 선택은 늘 필요해 최선을 다하고자 부등식을 찾곤 했으며 필요한 가치들을 굳이 나열해놓곤 저울질하곤 했어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했어 방정식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애썼으며 부등식의 선택에 따라 각자 살아온 길 그 선택들을 존중해 삶은 방정식 인생은 부등식 다차원 방정식을 매번 미적분으로 풀어냈고 부등식의 순서들로 매번 선택은 갈라지지 동그라미는 언제 그려봤니? 세모와 네모 중 무엇을 더 많이 그렸니? 동그라미의 면적을 구하면 구의 체적도 구할 수 있지 네모랑 세모는 뿔이 되곤 했고 입체를 구하기도 ..

글/습작 2024.05.18

풀잎들에 맺힌 이슬이 반짝일 때마다 손톱 밑으로 자라고 있는 이끼를 보았어

풀잎들에 맺힌 이슬이 반짝일 때마다    손톱 밑으로 자라고 있는 이끼를 보았어    보고 싶어, 네 눈빛이    한 마디면 족할 말을    대체 왜 긴 문장으로 써야 하는지    살고 싶어, 네 숨결과    한 마디면 족할 일을    이토록 주저하면서 사는 건지    간밤에 내린 비도 이제 멎었는데    길은 미끄럽고 자전거는 휘청거려    더 이상 자전거를 타지 않는 봄    호숫가에 핀 풀꽃들에서    네 영롱한 눈물을 보았을 때    내 손끝에서 자라는 생명을 느끼면    이건 어느 나라의 마법이니?                       #

글/습작 2024.05.16

이른 새벽, 필사 (또는 "인용")에 대하여

저는 모든 종류의 책을 필사합니다. 단 분량이 너무 많은 장편이나 철학서 등은 다른 분들 사진을 찍듯이 필요한 문단만 따로 발췌해 옮겨놓곤 해요.    나중에 들춰보면 종종 도움이 되거든요.    그리고 글쓰기 입장에서는 필사가 그리 큰 도움은 못 되는 것 같아요. (즉 필사는 '기억의 보존' 목적이 더 크죠)    “모작”의 시도가 좀 더 효과적이라 생각해요.        “순수하게 트레이싱으로 그린 그림은 원판에 대고 베껴 그리는 방식이라서 모작보다 난이도가 떨어진다. 난이도가 낮은 만큼 배울 수 있는 한계도 극명하게 낮다. 트레이싱을 하는 데에도 테크닉이 있긴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트레이싱 테크닉을 숙련하는 의미는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실력향상 수단으로 보자면 모작은 최고의 효율..

문학노트 2024.05.08

진주

진주       넓은 화초 잎이 투명한 진주를 머금을 때    인간은 자연을 닮으며 배워간다     기다림 노여움 서러움이 북받칠 때    가끔 토해내기도 하지만     천 일을 만 일을 기다려온 일들만큼은     쉽사리 그러지 못해 계속 품게 되는 법      넓은 화초 잎만큼 우주라도 광활하다면    좁다란 화분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때     기어코 수삽을 꺼내 다시 파내려는 일     더 큰 진주를 다시 품어보려는 일     글을 다시 쓰려 한다는 일          #

글/습작 2024.05.07

벽璧

벽璧       나뭇잎도 계속 모으면 나룻배 한 척쯤 만든다 해서     설마 했지만 몇 년을 또 그러모았나 모르겠습니다      밖엔 내내 비가 오고 축축한 잎새들 차곡히 쌓으면    금세 한 뼘 나무토막쯤은 만들 수도 있었겠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네가 서 있고       벽을 타고 오를 담쟁이 잎은 차곡한 빗물을 머금고     쓰러지지도 않을 벽이 견고하기만 해 그저 애달파                  세찬 바람이 훅 불어오면 또 몇 장 금세 흐트러지고    연신 무너질 것 같던 잎새들도 꾸역꾸역 챙겨야 해서       비가 그칠 때까진 전전긍긍해야 할 시절만 불안한 채      족히 몇십 년 더 걸리는 게 맞을 일인지도 모릅니다         비가 오고 ..

글/습작 2024.05.05

다시 오월

다시 오월       신록이 솟아오르는 기운에 가벼운 걸음걸이를 배우기 시작한다면    에전 대문 앞에서 서성이던 발등에도 푸른 수국이 움틀 때가 많아        혹시 또 몰라 진짜 수국일까, 멈칫하며 서는 동안 해는 비스듬했고    해가 기운 각도만큼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켜보는 그해의 봄이 있고    그해의 가을도 함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 싶어       다시 오월, 기억은 상록수처럼 홀로 푸르른 채 변하지도 않을 계절    변하지도 않을 사랑은 스스로 나이만 먹나 싶어               #

글/습작 2024.05.02

종로에서 아는 사람 다섯을 만났다

종로에서 아는 사람 다섯을 만났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께의 종로를 우연히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색한 미소로 인사하면서 지나치곤 했지     정독도서관에서 한강을 닮은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고         뒷모습을 한참 쳐다봤어 머리카락이 너무 하얗게 세서    아직도 멀쩡한 나는 글쓰기가 부족해서일 거라고 믿었지     새벽마다 글쓰기를 연습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리 똑같애    부지런한 새가 일찍 죽는다던 허튼 농담이 더 지겨워서 그래       소격동 골목길에서 회사 사람을 만났는데 인사도 없이         유니폼만 서로 힐끗 쳐다보았어 각자의 점심시간을 잊은 채    다가올 구조조정의 순간들을 서로 애도하며 분주하기만 할 뿐     직급을 없애겠다며 너도 나도 프로 골퍼..

글/습작 2024.05.01

늦봄

늦봄       개여울을 한참 바라본 적 있었습니다     청계천과 진관사를 오간 걸음이 숨을 고르고 어느 한철을 인화한 순간     빌딩숲과 능선을 따라 두둥실 구름들이 흐르면 그게 그리 좋았습니다     얼음이 녹고 물이 흐르고 벚꽃이 흐드러진 동안    개울가에 소복하게 쌓인 꽃잎이 천천히 썩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떠나고 바람이 부는 동안은 기억도 함께 풍화된 순간들이었고         제법 두툼해진 라일락 잎이 영롱히 빛나는 동안    더는 없을 벚꽃에 대한 그리움도 연초록으로 갈아입는 풍경을 봅니다          늦봄입니다    오지도 않을 사람을 턱없이 기다리는 일은 내내 허망하였을 뿐이고       가지도 않을 바람을 보낸다는 일도 때로는 내내 맞아보는 일입니다      ..

글/습작 2024.04.30

봄의 마지막 축제

봄의 마지막 축제    벚꽃이 다 질 무렵    호수공원에도 한아름 꽃밭이 생기고    이른 새벽의 산책은 두서가 없이 좋았고    아침의 공기는 차고도 선선해서 좋았고    함께 저무는 사랑도    호수공원에 다다르면 개울가에 앉아    함께 물수제비라도 해본다면 좋겠지만    또 다시 떠나야 할 순간임을 직감하고    밖으로 인류의 금자탑인 인공위성이 날 때    내 눈앞에서 점멸하는 붉은 불빛은 그저    속절없던 회상과 애타는 연민의 그림자    그래, 잘 가라는 인사 한마디로도 충분해    이윽고 다가올 아침    길은 멀었고 아직 다리는 튼튼하므로       #

글/습작 2024.04.29

필사의 나이테

필사의 나이테                계단을 세워 제단을 덧대서    죽음과 죽음 이후의 기분을 꺼내고    가장 먼 곳에 차려질 식탁을 준비한다     이름을 부르는 쪽에    이름이 저무는 쪽에     긴 문장을 새긴 채 대답을 비워둔다    벗어나려고 찾은 입구와    굳어지기 싫어하는 발목         - 정영효, '도달할 미래'에서 ("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 문학동네 2023)       등단생활 15년 동안 시집 한 권인 시인의 시를 읽으면     습작생활 30년 내내 시집 한 권인 나 역시 과작이었고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일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슬픔과 죽음에 대해 한참 동안을 생각했으며     사랑과 헌신에 대해 한참 동안을 고민..

글/습작 2024.04.28

황무지

황무지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못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 장옥관, ‘봄밤이다 1’에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기억은 늘 다가온다    한사코 손사래를 치지만 어김없이 다가온다    다가와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곁에 앉는다    그럴 적마다 저어하는 표정으로 또 쳐다보지만    안중에도 없는 기색으로 그렇게 다가와서는    그동안 무얼 했냐면서 금세 까먹은 거냐면서    묻지도 않고 아무 말없이 그렇게 곁에 앉는다       기억이 앉아 있는 자리에 민들레가 ..

글/습작 2024.04.27

저녁에 내린 봄비

저녁에 내린 봄비 우리는 옥상에서 젖은 몸속으로 무덤 냄새가 추락할 때까지 서로의 빛을 마시며 십자가를 태워 올렸다 너무 아름다워서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믿었다 - 최백규, ‘너의 18번째 여름을 축하해’에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2022) 비가 내린다 봄비가 내린다 봄비는 자기의 정체성이 아니라며 나무 바람 햇살 풀꽃이 더 가깝다며 오늘은 바람이 불어서 좋았다면서 봄비가 내리고 있다 봄비를 맞으러 밖에 나간다 #

글/습작 2024.04.24

우리의 노래가 한 줌 모래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노래가 한 줌 모래가 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부르던 노래가 떠올랐다 이 광장을 벗어날 수가 없구나 이 노래는 끝나지 않는구나 매일 밤 모든 길은 광장으로 이어졌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그랬다 - 강성은, '밤의 광장'에서 (Lo-fi, 문지 2018) 우리의 노래가 한 줌 모래가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모래성을 쌓는 소녀를 불러내고 소녀로 하여금 하얀 모래성을 쌓게 만들고 비바람에 모래가 씻겨 설령 소녀가 울어도 등을 토닥이면서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면 때때금 잔혹한 상처들은 모래성만도 못해 노래가 사라진 광장에는 햇볕만 가득하고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 속 맑은 한 점 구름 유일하게 오갈 수 있는 교통수단? 이 낙타 다시 낙타의 볼을 쓰다듬고 함께 대화하면 너 왜 자꾸 반말이야? 미안해..

글/습작 2024.04.23

덴마크로 떠난 미인

덴마크로 떠난 미인 나는 같은 남자와 두 번 연애에 빠졌고 두 번 작별인사를 했다. 안녕. 택시는 종로1가에서 종로2가로, 동대문으로 미끄러지듯 미끄러지고 있었다. 안녕. 낙엽 몇 장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경관 한 명이 갑자기 모자를 벗어던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몽둥이가 공기를 휘저어댔다. 너무나 깨끗한 거리였고 어느 누구도 겁에 질리지 않았다. 달리는 사람은 헉, 헉, 헉, 입김을 내놓는다. 낙엽 몇 장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 김행숙, '깨끗한 거리'에서 (이별의 능력, 문지 2007) 백만 원을 훔쳐 달아난 직원을 쫓고자 온 직원이 수소문하며 혼비백산인 동안 나는 시큰거리는 허리채만 붙잡은 채 찡긋, 하며 사라지던 표정을 기억했고 덴마크에서 살고 싶어요 이랬다면 또 단서가 될까... ..

글/습작 2024.04.22

앤솔로지 2

저자의 말 희망과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요즘이다. 비관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가 비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쉬운 지금, 우리에게 시는 특별하고도 소중하다. 시란 다른 세계를 꿈꾸도록 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우리 앞에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세계의 가능성을 개진하는 것이야말로 시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한권의 시집은 하나의 세계에 준하는 것이고, 한권의 시집을 읽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므로, 시를 사랑하는 우리는 한권의 시집을 읽으며 우리 자신조차 몰랐던 우리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선택지가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비관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다른 세상을 상상할 힘이 아닐까. 우리는 시를 통해 그 힘을 잠..

문학노트 2024.04.21

그토록 부끄러웠던

그토록 부끄러웠던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 김소연, '다른 이야기'에서 (i에게, 아침달 2018) 처음 만난 날에 오천 원 삥을 뜯었다. 친구들 술값을 내주느라 집에 갈 차비도 털려 하교하던 길의 오늘 처음 본 표정을 붙잡고 삥을 뜯었다. 문학회를 탈퇴했던 바람에 금방 도로 갚지도 못해 한참 동안을 서성였다.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조용히 앉아 ..

글/습작 2024.04.20

사월의 아침이 잔인하다면

사월의 아침이 잔인하다면 나로부터 사과 한알이 떨어진다 덜 익은 껍질을 속옷처럼 입고 거리와 부딪친다 사월이 주워 담지 못한 한마디 끝없이 구른다 사월이 끝나도 나는 끝나지 않듯이 - 한재범, '사월이 좋아'에서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창비 2024) 꽃잔디가 한가득인 거리엔 봄바람이 일고 봄의 바람이 몽글한 구름들 곁으로 흐르면 이윽고 아침이 찾아온다 초미세먼지가 가득한 창문 밖을 쳐다보면 마스크를 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함께 걷고 있다 초미세먼지만 평등한 것이지 마스크는 그렇지가 못해 간밤에 흩뿌려진 대화들이 차곡차곡 쌓인 숫자들만 어김없이 시간을 재촉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순간에도 계속 누군가는 밀어를 시도했지만 또 누군가는 애써 외면하고픈 시절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는..

글/습작 2024.04.19

김수영, ‘푸른 하늘을’

[4·19 특집] 푸른 하늘을 김수영 (金洙暎, 1921~1968)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김수영 시인이 1960년 6월15일에 발표한 작품. 4·19가 일어나고 두 달이 못 되어, 투쟁의 피가 마르기 전에 나온 시. 첫 연은 다소 산문적으로 시작한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수정되어야 한다”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의 하나로 이어진 긴 문장으로 포문을 연 뒤에 2 연에서 탄알 튕기듯 선명한 언어들을 던지며 산문에서..

문학노트 2024.04.19

앤솔로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두 권의 앤솔로지인 창비의 과 문지의 를 훑어보는 시간입니다. 먼저 더 오래된 창비는 창비시선 중 총 74명의 시인들을 추렸고, 창비시선 1호인 신경림의 가 아닌 2호인 조태일의 즉 1975년부터 493호인 황유원의 즉 2023년까지를 담아냈고요. 46판 변형 (127×200m)의 크기로 아르떼 표지를 채택하였고 총 175페이지 분량에 가격은 7,000원에 냈습니다. (출판단지라서인지 확실히 출판경쟁력은 독보적인 편예요.) 창비시선 전체를 아우른다는 면에서 기념비적 요소를 가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창비가 자부심을 가질만한 이정표들로 꼽힐 1978년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1981년 신춘문예 당선작이 아닌 1983년 창비시선 버전) 등이 함..

문학노트 2024.04.19

조급해지지 말기

조급해지지 말기 11월부터 성탄절 트리 켜놓듯 사람들은 피지도 않은 벚꽃축제 일정을 잡고 피지도 않은 연꽃모양 등으로 초파일을 맞고 또 설 연휴까지 켜둔 트리처럼 눈처럼 벚꽃이 다 지면 가을까지 그리워하고 큼지막한 연잎이 모두 시들 때까지 지켜본다 조급해지지 말기 사랑이 덧난다 기다림과 그리움은 제각각의 분량이 있었고 더 오래라 늘어나지도 짧다고 줄지도 않아서 그저 정주행하면 그만일 법 이게 각자의 최선이기 때문 조급해지지 말기 속절없는 그리움만큼 녹슨 상처 #

글/습작 2024.04.18

솟대

솟대 오리백숙을 먹은 다음날 아침 전지를 한 나무 끝 매달린 하늘 밤새 오리가 날았었나 봐 사람과 하늘을 이어준다 믿었고 가지를 쳐낸 확신도 굳건했겠지 정작 오리는 하늘을 날지 못해 밥상 위에 올려졌을 뿐 가끔 오리를 닮은 이가 등장해서 나만 믿으라고, 거침없는 말들 속 푸른 날개를 혹 가졌나 훔쳐보면 의심하는 버릇만 생겼어 밥상 위의 오리를 품평하는 동안 어김없이 하늘은 가지 끝에 걸려 맘만 먹어도 오를 수 있었을 텐데 비평하는 게 제일 쉬웠어 질문은 해도 판단을 않는다는 게 날아오른다던 오리를 믿어 본 일 어젯밤 역시 그렇다면 다행일 법 #

글/습작 2024.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