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선(廢線)
내 몸엔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누군가 뛰어온다.
걸어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의 뽐내는 걸음걸이를 보았으면,
춤추듯 공중에서 두 발을 모으는 자세를 기대했지만
그는 뛰어오고, 그는 너무 빨리
그가 남긴 것은 모두 그를 사라지게 한다.
혹은 사라지기 전에 그는 뛰어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가 달려가는 곳이 어딘지,
내 몸은 알지 못한다.
그는 뛰고 있을 때만 존재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내 심장에 닿고, 허파를 지나 팔뚝과 허벅지를 긁으며
어딘가 잠시 머물러 있다.
그는 나를 만나고 싶을 것인가.
나도 나를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그를 따라갈 수 없다.
그가 지날 때마다 내 몸에는 트랙이 생긴다.
그 자국을 따라 피가 흐르고 숨이 돈다.
오늘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있고
나는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본다.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하고
내 몸에 아직 아무도 다니지 않은 길이 열린다
*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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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18년, 2권의 시집 :
이동욱 시인이 문학동네에서만 두 권의 시집을 냈고, 이번 시집은 올해 들어 문학동네에서 펴낸 첫 시집입니다. 지난 2007년 신춘문예로 30세의 나이에 등단을 해 44세에 첫 시집을, 그리고 49세에 두 번째 시집을 엮어냅니다. (그동안 밥은 어떻게 먹고살았는지가 훨씬 더 궁금해지는)
예전의 '투톱'을 창비와 문지로 일컫는다면 오히려 요즘 세태에서는 명실상부한 '원톱'의 위치로도 불릴 법한 이 문학동네가 출범한 지도 어언 30년째가 돼갑니다. 부도의 위기를 겪던 시절이 아스라해질 만큼 이젠 제법 넉넉한 분위기인데... 이를 가능하게 만든 두 장본인인 윤대녕, 신경숙은 요즘 통 보이질 않습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을 "따라 누군가 뛰어온다"면, 과연 "내 몸"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시입니다.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고 "따라갈 수 없"기도 하지만, "지날 때마다" "트랙이 생"기고 또 "피가 흐르고 숨이 돈" 내 몸은 "아무도 다니지 않은 길"을 만듭니다. 마치 첫사랑처럼.
비록 과작임이 분명한 시절이었을 테지만, 시인의 이력은 이미 출중하여 시집을 통해 드러날만한 '내공' 역시 큰 울림이 뒤따를 것은 분명합니다. 문학동네시인선도 벌써 200호를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최초의 "독립문예지" 격이었던 시절부터, 그들의 오랜 '초심'과 건투를 항상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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