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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일,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시적 '효용'에 관한 물음과 유별난 '취미' 활동)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적 '효용'에 관한 물음과 유별난 '취미' 활동 :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 지금 만나러 가는 너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도 직업일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대답한다. 시인은 가장 큰 직업이다. 마치 스스로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다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가장 큰 직업'이란 말이 좀 걸린다.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 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큰 직업'이란 당최...... 무엇일까,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노동하여 집을 지으면 폭풍이 와도 ..

문학노트 2024.01.25

정현우, '소멸하는 밤' (박형준과 정호승의 변증법적 통일)

[베껴쓰고 다시읽기] 박형준과 정호승의 변증법적 통일 : 소멸하는 밤 흰 어둠이 잠들지 않는 거리, 나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 지난 사랑이 모두 헐거워지는 창문 아래, 눈물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 그러니 우리를 울게 하는 것들은 힘껏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는 것입니까, 어둠을 지우려 우는 별자리들이 느리게 첫눈으로 떨어집니다. 겨울 구름 위로 숨 하고 내미는 입술, 흰 두 뺨이 젖듯이, 베갯잇에서 우우 하고 우는 얼굴, 가장 죽고 싶을 때와 가장 살고 싶을 때의 얼굴은 밤마다 꿈속에서 끝없이 다가오는 얼굴들, 죽은 아이들과 죽은 엄마들과 죽은 모두가 투명한 이파리처럼 흔들릴 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추모는 내가 할 수 없어서 나는 슬퍼야 합니까, 낯빛들이 피어오르는 숲, 별자리는..

문학노트 2024.01.24

김명인, '침묵' (말을 줄여가는 시절)

[베껴쓰고 다시읽기] 말을 줄여가는 시절 : 침묵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

문학노트 2024.01.23

천양희, '너에게 쓴다' (뒤늦은 한파, 보름을 앞둔 입춘)

[베껴쓰고 다시읽기] 뒤늦은 한파, 보름을 앞둔 입춘 : 너에게 쓴다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 천양희,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작가정신, 1998) 대한을 거쳐온 새로운 한 주는 뒤늦게 한파가 불어닥칩니다. 눈앞의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머지 않은 입춘을 헤아려볼 마음도 필요한 때입니다. 천양희 시인은 여럿의 유명한 작품을 남겼지만 뭐니뭐니해도 교보문고 간판에 내걸었던 이 시가 가장 널리 알려진 편이어서 역시 뒤늦게 꺼내봅니다. 중견 이상 시인의 작..

문학노트 2024.01.22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사이좋게 지내기'에 관하여)

[베껴쓰고 다시읽기] '사이좋게 지내기'에 관하여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듯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문학노트 2024.01.19

이유운,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 ('시창작 강의'가 시집제목이 되기도 하는 시대)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창작 강의'가 시집제목이 되기도 하는 시대 :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 ​ 당신이 또 여름이 왔다고 말하는 것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내 등을 바람으로 깎아놓은 거친 손으로 훑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가락 끝이 유독 단단했던 당신의 손톱은 언제나 창백한 회청색이었다 손톱이 왜 파랗지요 하고 물으면 요 안에는 바람이 담겨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던 당신의 입술에는 뼈가 없었다 당신의 손이 습한 등을 훑으면 와사삭 소름이 돋아서 정말로 당신의 손톱에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바람으로 나를 만지며... 내 등뼈는 당신 덕에 조약돌처럼 둥글어졌다 그리하여 아주 먼 미래에 누군가 내 등을 만지면 나는 바람으로 깎여 둥글고 부드러운 짐승이 되어 있었다 ​ 나는 그 먼 미래를 생각하..

문학노트 2024.01.18

이성부, '봄' (다시금 '고전'을 '고전주의'를 생각함)

[베껴쓰고 다시읽기] 다시금 '고전'을 '고전주의'를 생각함 :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민음, 1974) 1998년의 창비 홈페이지는 "글이 있는 뜨락"이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문지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 역할을 ..

문학노트 2024.01.17

황지우,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너무 이른 기다림,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베껴쓰고 다시읽기] 너무 이른 기다림,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 ㅡ 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장사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지, 1999) 오랜만에 황지우 시집을 ..

문학노트 2024.01.16

황인찬,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얼터너티브"가 유행했던, 유행할 미래)

[베껴쓰고 다시읽기] "얼터너티브"가 유행했던, 유행할 미래 :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민음, 2012) 벌써 12년이나 지난 옛 시집을..

문학노트 2024.01.15

조연호, '입춘 부근' (대한을 앞둔 채 벌써 '봄'을 기다리는)

[베껴쓰고 다시읽기] 대한을 앞둔 채 벌써 '봄'을 기다리는 : 입춘 부근 그 입춘 부근은 너무나도 따사로워 나는 제방에 걸터 앉아 못생긴 꽃의 꽃말을 외웠다. 아무도 떠나지 않은 자리에 마음이 머물던 자국만 남아 있다. 어떤 책을 펼쳐 읽어도 마음 좋은 청춘은 만날 수 없던 날, 들풀이 머리칼처럼 야윈다. 늙은 개암나무 곁에서 허리를 굽혀 봄볕의 마음을 줍는다. 내가 꽃말을 외울 때마다 거짓으로 잎순이 부풀어 올랐다. 가난한 애인과 함께 부자의 마을에서 헤픈 상대방이 되고 싶던, 내 그리움이 가시에 찔려도 터지지 않았다. 따사로운 나무둥치들이 어린 양처럼 매매 울며 어미 숲을 부른다. 쑥 냄새가 나는 길을 걸었고 그 길가에 호들갑스레 꽃 피고 여동생의 책가방에서 화장품이 쏟아졌다. 찌처럼 조용히 그늘 ..

문학노트 2024.01.14

창작동인 뿔, '어제의 꿈은 오늘의 착란' (창작 커뮤니티들의 롤모델, 창작동인 뿔)

[베껴쓰고 다시읽기] 창작 커뮤니티들의 롤모델, 창작동인 뿔 : 어제의 꿈은 오늘의 착란 소음 속에서 귀를 막으면 파도 소리가 들리나요 손가락을 죄다 자른다면 더는 편지를 적지 않아도 되나요 모든 편지에는 그립고 슬프다는 말을 적어야 하나요 밤하늘도 저렇게 많은 알약을 삼켰다고 하지 않았나요 박하잎을 씹으면 두 눈이 시큰거려요 발끝에서 바다가 죽어가요 어젯밤 꿈은 전부 증발해버렸는데 어지러워요 나는 어지러운 사람이에요 무엇을 말해야 하나요 무엇을 듣고 싶나요 귀를 막으면 알 수 있나요 귀를 막고 눈이 멀면 손끝이 예민해지나요 무엇을 만져야 하나요 무엇이었나요 어둠 속에서 내가 더듬거렸던 것은 끝, 눈물, 다음에 계속 물밀 듯이 밀려오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눈앞을 가리는 건 꼭 눈물이어야 하나요 볼 수 없다..

문학노트 2024.01.12

한백양, '왼편' ("더블"의 영광과 "불혹"의 한 정점)

[베껴쓰고 다시읽기] "더블"의 영광과 "불혹"의 한 정점 : 왼편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

문학노트 2024.01.11

박참새, '새시대' (<시대와의 불화>, 참새와 허수아비)

[베껴쓰고 다시읽기] , 참새와 허수아비 : 새시대 저는 미쳤어요 유유상종 끼리끼리 그러니까 내 친구들 모두 시인이었단 말이죠 얼마나 좋았겠어요 우리끼리만 읽을수 있었거든요 우리끼리는 뭐든 다 좋다고 그랬거든요 객관적으로도 사실이었어요 저는 미쳐서 이게 사랑이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못 썼어요 사랑 시 사랑 시 생각만 하느라 사랑은 보이지 않으니까 내 눈 앞에 살아 있는 사랑 사람들 그것만 보려고 언제 달라질지 모르는 마음이니까 뚫어져라 보기만 했어요 나서지도 못하고 혼자서 공공 앓았어요 가끔은 그랬어요 나 사랑 좇도 모르는 거 같아 사실이에요 나는 미쳤잖아요 미친년이 사랑하면 미친 사랑이지 사랑은 아니잖아요 돌아 버리잖아요 그래서 못 쓰는거예요 나도 쓰고 싶다 사랑 시 사랑 사랑 할 때마다 피치 못하게 쓸..

문학노트 2024.01.10

황인숙, '생활의 발견' (진부하다, 직설적이다, 상상력이 부족하다)

[베껴쓰고 다시읽기] 진부하다, 직설적이다, 상상력이 부족하다 : 생활의 발견 ​ 소스 맛에는 중독성이 있다 때로 소스를 맛있게 먹기 위해 돈가스가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돈가스 소스는 돈가스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연구하고 만든 것일 테지만 ​소스만 있으면 어떤 특정 음식의 맛을 상당 정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맨밥에 돈가스 소스를 끼얹어 먹으면 돈가스와 흡사한 맛이 난다 시작법은 시의 소스 제 소스의 레시피를 가진 시인들이 부럽다 언제라도 한 접시 먹음직한 시를 내놓는 그들! 나는 레시피도 없고, 찬장 깊숙한 데서 꺼낸 인스턴트 돈가스 소스는 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났다 그래도 가난한 나는 맛있게 먹지 * 황인숙, (문지, 2016)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같은 제목을 가진 영화가 있지만,..

문학노트 2024.01.09

박정대,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영하 11도의 주초, 다시 '낭만'에 대하여)

[베껴쓰고 다시읽기] 영하 11도의 주초, 다시 '낭만'에 대하여 :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미스터 션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햇살 좋은 아침이면 앞마당으로 나가 빨래를 너오 그곳에 돌배나무, 목련, 배롱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사과나무, 생강나무, 이팝나무, 자작나무들을 심었소 자작나무에는 따로 이름을 붙여주었소 가난하고 아름다운 사냥꾼의 딸, 꽃 피는 봄이 오면, 자작나무 우체국, 레아 세이두, 장만옥, 톰 웨이츠, 김광석, 빅토르 최, 칼 마르크스, 체 게바라, 아무르, 아르디 백작, 상처 입은 용, 짐 자무시, 짐 모리슨, 닉 케이브, 탕웨이, 아르튀르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들, 이들은 가난하고 아름다운 나의 열혈동지들이오 돌배나무는 대낮에도 주먹만 한 별들을 허공에 띄우오 그 여..

문학노트 2024.01.08

박준, '잠의 살은 차갑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다시보기)

[베껴쓰고 다시읽기] 드라마 "나의 아저씨" 다시보기 : 잠의 살은 차갑다 깊은 잠에 빠진 살은 차다 간장에 양지를 졸이는 꿈을 며칠 이어 꾼 것을 두고 나는 마음으로 즐거워했다 으레 그럴 때면 외투를 한 겹 더 입었다 겨울옷의 소매들은 언제나 길고 나는 삐져나온 손끝을 보며 얼마 남지 않은 욕실의 치약과 굳은 치약을 힘주어 짜냈을 안간힘에 대해 생각했다 물건을 새로 뜯지 못하는 나의 버릇을 병이라기보다는 몸가짐이라 부르고 싶었다 이 겨울과 밤과 잠과 아직 이른 순荀과 윗바람 같은 것들은 출현보다 의무에 가까웠으므로 불안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지, 2018) 세밑의 큰 우울함이었던 배우 이선균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사로 (개인적으로는 또는 한 가정의)..

문학노트 2024.01.07

강지수, '면접 스터디' ('현대시'와의 면접을 임하는 태도)

[베껴쓰고 다시읽기] '현대시'와의 면접을 임하는 태도 : 면접 스터디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 소리를 내면 그게 진짜 목소리라고 한다 진짜 목소리로 말하면 신뢰와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자 방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인 채 아 아 아 소리를 낸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이제 그 음역대로 말하는 겁니다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닌 진짜 당신의 목소리로요 엉거주춤 허리를 편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왔고…… 멋쩍은 미소를 짓고 몇 번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다가 불쑥 허리를 접고 다시 아 아 거리는 이도 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손짓한다 이리 와서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쭈뼛거리며 무리의 가장..

문학노트 2024.01.04

"예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수단"

알랭 드 보통의 말, # 상세한 내용, https://ggumsugi.tistory.com/440 알랭드보통의 아름다움과 행복의 예술이런 책인지는 몰랐다. 그냥 알랭드보통의 글을 좋아하는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과 행복이 궁금했는데 공예작가들과 청주국제비엔날레에 전시감독을 했던 내용이었다. 나에겐 물건은 쓸모가 기ggumsugi.tistory.com “예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수단이다. 삶의 경험 중에는 아름답지만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것들이 무수히 많으므로 이를 담아둘 적절한 도구가 필요하다. 예술은 복잡성을 편집하여, 인생의 가장 의미 있는 측면들에 빠른 시간 내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예술가란 시간을 정지시켜 우리가 순간순간 소홀히 지나치는 아름다움과 중요성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을 제 일..

개인노트 2024.01.03

2024, 새로운 출발

누구는 빛나는 '등단'의 차이틀을 안고, 또 누군가는 "신춘문예 재수생"이라는 타이틀로도 다시 새해의 첫 출발점에 선다 등단을 한 이는 후속작들과 첫 시집을, 또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연내에 줄지어 있게 될 각종 문예지들과 연말의 신춘문예를 준비하기 시작할 시점이기도 하고 무릇 "초심을 잃지 말자"는 말과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는 말로 스스로를 또 누군가를 격려하며 응원해본다 첫 출근을 하는 아침,

개인노트 2024.01.02

맹재범, '여기 있다' (2024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베껴쓰고 다시읽기]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는 말 : 여기 있다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

문학노트 2024.01.02

송진권, "원근법 배우는 시간' (한 해의 작도법을 접어놓는 차례)

[베껴쓰고 다시읽기] 한 해의 작도법을 접어놓는 차례 : 원근법 배우는 시간 빼빼 마른 여자가 바닥에 화구를 펼쳐놓고 앉아 있는 집입니다 모르는 돌과 꽃에서 뽑아낸 안료를 색색으로 펼쳐놓고 여자는 처음 보는 새 한 마리를 그려냅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포개지고 겹쳐집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새떼입니다 몇 마리나 되겠냐고 여자는 묻습니다 대답을 못 합니다 덧칠한 그림 위에 또 덧칠된 새들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는 천천히 화구를 걷습니다 문을 닫고 밖을 나옵니다 방 안은 깃 치는 소리 지저귀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옵니다 구름들 지붕들이 쏜살같이 그 집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 새들이 퍼덕이며 날아오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

문학노트 2023.12.29

오규원, '겨울 나그네' (<현대시작법>을 능가할 레토릭에 관하여)

[베껴쓰고 다시읽기] 을 능가할 레토릭에 관하여 : 겨울 나그네 지난 겨울도 나의 발은 발가락 사이 그 차가운 겨울을 딛고 있었다. 아무데서나 심장을 놓고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있었다. 그 곁에서 계절은 귀로를 덮고 있었다. 모음을 분분히 싸고 도는 인식의 나무들이 그냥 서서 하루를 이고 있었다. 지난 겨울도 이번 겨울과 동일했다. 겨울을 밟고 선 내 곁에서 동일했다. 마음할 수 없는 사랑이며, 사랑... 내외들의 사랑을 울고 있는 비둘기 따스한 날을 쏘고 있는 곁에서 동일했다. 모든 나는 왜 이유를 모를까. 어디서나 기우뚱, 기우뚱 하며 나는 획득을 딛고 발은 소멸을 딛고 있었다. 끝없는 축복 떨어진 것은 한대로 다 떨어지고 그 밑에서 무게를 받는 일월이여 모두 떨어져 엄숙히 쌓인 위로 감당할 ..

문학노트 2023.12.27

박준, '숲' (바다가 있던 숲의 기억, 12월 마지막 주)

[베껴쓰고 다시읽기] 바다가 있던 숲의 기억, 12월 마지막 주 : 숲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 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문학노트 2023.12.26

나태주, '화이트 크리스마스'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일)

[베껴쓰고 다시읽기]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일 :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 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문학노트 2023.12.24

박형준, '동지' (영하 20도의 "동지")

[베껴쓰고 다시읽기] 영하 20도의 "동지" : 동지 어느 추운 겨울밤, 머언 옛날이었습니다. 서울역 지하도에 할머니가 박스로 城을 만들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계단으로 눈발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무를 밭에서 막 뽑아낸 듯 사정없이 바람이 허벅지를 도려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갈 곳이 없어 할머니의 성에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습니다. 그 안엔 한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성 담벼락, 할머니의 등뒤에 쪼그려앉아 밀려드는 졸음을 참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느새 나를 향해 돌아앉아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성냥을 그을 때마다 계단으로 밀려드는 눈발이 새벽의 어둠속에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품안에 돋아나는 불꽃이 저의 곱은 손과 차디찬 허벅지에 흰 속살인 듯 속삭이고 있었..

문학노트 2023.12.22

김해자, '꽃잎 세탁소' (그래도 여전히 '양대산맥'... 창비시선의 고군분투)

[베껴쓰고 다시읽기] 그래도 여전히 '양대산맥'... 창비시선의 고군분투 : 꽃잎 세탁소 꽃양귀비 붉은 꽃잎 위에 청개구리가 엎드려 있어서 나도 납작 엎드려 뭐 하나 들여다봤더니, 제 목울대로 꽃의 주름을 펴는 게 아닌가, 그 호박씨만 한 것이 앞발 뒷발로 붉은 천 꽉 부여잡고 꽈리 풍선 불어가며 다림질하는 동안 내 마음도 꽃수건처럼 펴지고 있었다 개망초 하얀 꽃잎 위에 나비가 날개를 접고 있어서 나도 땅두릅 그늘 아래서 올려다봤더니, 계란 노른자 같은 꽃술을 빨아대는 것이 아닌가, 그 상추씨만 한 입으로 꽃잎을 빠는 동안 하얀 베갯잇 같은 구름이 간지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하늘이 갓 세수한 듯 말개지고 있었다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어제는 문지 시인선 594호 소식을 전했는데 오늘..

문학노트 202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