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영하 20도의 "동지" :
동지
어느 추운 겨울밤, 머언 옛날이었습니다.
서울역 지하도에 할머니가 박스로 城을 만들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계단으로 눈발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무를 밭에서 막 뽑아낸 듯 사정없이 바람이 허벅지를 도려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갈 곳이 없어 할머니의 성에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습니다.
그 안엔 한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성 담벼락,
할머니의 등뒤에 쪼그려앉아 밀려드는 졸음을 참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느새 나를 향해 돌아앉아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성냥을 그을 때마다
계단으로 밀려드는 눈발이
새벽의 어둠속에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품안에 돋아나는 불꽃이
저의 곱은 손과 차디찬 허벅지에
흰 속살인 듯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 박스로 만든 성 안에는
매운 재만 폭삭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 박형준,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창비, 2002)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새벽입니다.
동지, 제게는 훨씬 더 소중한 의미에서 뜻을 담은 말이며 낮과 밤의 길이가 한 극한치를 이루는 날이기도 하죠. 옷을 단단히 챙겨서 입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드디어 2024년 신춘문예도 당선자 소식들만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대부분 연락이 갔을 테며, 또 한해를 더 벼르거나 아니면 다른 모색과 시도들도 분주할 차례인 섣달입니다. 크리스마스도 코앞이고요.
'형상화의 달인'으로 소개해놓기도 한 박형준 시인의 같은 제목인 시 한 편을 올려놓습니다. 올해도 그가 문화일보 신춘문예 심사를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팥죽을 먹는 날이기도 하죠. 팥죽이 여의치 않으신 분들은 단팥빵이라도 꼭 챙겨서 드시길 바랍니다. ^^
날씨는 제 아무리 혹독하다 한들 따스한 마음씨마저 얼어붙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걸 알기에 항시 넉넉함으로 지탱해볼 하루입니다.
다가오는 주말 준비도 잘 해두실 오늘, 기대만큼의 좋은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