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창작 강의'가 시집제목이 되기도 하는 시대 :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
당신이 또 여름이 왔다고 말하는 것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내 등을
바람으로 깎아놓은 거친 손으로 훑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가락 끝이 유독 단단했던 당신의 손톱은 언제나 창백한 회청색이었다
손톱이 왜 파랗지요 하고 물으면
요 안에는 바람이 담겨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던
당신의 입술에는 뼈가 없었다
당신의 손이 습한 등을 훑으면 와사삭 소름이 돋아서
정말로 당신의 손톱에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바람으로 나를 만지며...
내 등뼈는 당신 덕에 조약돌처럼 둥글어졌다
그리하여 아주 먼 미래에
누군가 내 등을 만지면
나는 바람으로 깎여 둥글고 부드러운 짐승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
당신의 부푼 무릎 위에 바람의 모양을 그렸다
이제 그 먼 미래가 되어서 바람으로 깎인 나는
이 즈음에는 꼭 당신을 생각한다
바람을 담고 있던 당신의 손톱과
바람의 모양대로 부푼 당신의 무릎
나는 여름이 오면 반드시 당신의 뼈를 떠올리게 되어 있다
내가 만져보지 못한 당신의 뼈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하고
* 이유운,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 (아침달, 2022)
사랑의 언어를 다양한 문장으로 해석한다고 해 인터넷에서 제법 '브랜드'화된 이유운 시인은 지난 2020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철학도 (그것도 동양철학) 출신으로 "메이저 등단"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명세를 꽤 탄 편입니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시를 놓고 심사위원이었던 김윤배 시인과 김명인 시인은 "바람을 담고 있던 당신의 손톱과 / 바람의 모양대로 부푼 당신의 무릎" 같은 시적 확장의 표현력에 매우 높은 점수를 매겨 당선작을 뽑았음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어젯밤엔 공교롭게도 이유운 시인이 리딩을 맡은 한 인터넷 시창작 프로그램을 소개받아 잠시 홈페이지를 들르기도 했는데, 그 프로그램에는 꽤나 익숙한 정현우와 차유오와 고선경 같은 이름들도 브로마이드 화보랑 함께 실려 있어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21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등단'이라는 타이틀은 김수영 식의 양계장 운영도 아니고 이문재 식의 시사저널 기자생활도 아닌 각종 창작교습소와 문창과 입시학원의 "일타강사 자격증" 역할로 확실하게 '포지셔닝'하려는 듯한 풍경입니다.
'그럴 거면 등단은 뭣하러 했나?' '밥이 되는 시를 위하여!' (길 가던 강아지의 선문답)
데뷔작에서 물음표를 던진 시인의 현재가 과연 "당신의 뼈는 어떤 모양이었을까"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지 아니면 또 다른 질문을 품게 되었는가도 몹시 궁금한데, 도저히 그것들을 기억해낼 재간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좀 아쉽습니다.
'레토릭이 레토릭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제 오랜 신념이었지만 어쩌면 이 문장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요일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QU9c0053UAU?si=AVhP6lZxS7yNPP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