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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린 속을 부여안은 채 너는

쓰린 속을 부여안은 채 너는 엑스트라 배우가 카메라 조명을 벗어나 무심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진단을 받고 치료를 포기하고 혼자 깨어나 천장을 바라보는 새벽 어둠이란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다. - 이장욱,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중에 ("음악집", 문지 2024) 흐려진 화면 위 몇 개의 물방울이 떨어지던 순간 기어코 아무 말없이 화면을 닫은 적이 있었다 이른 새벽 쌀쌀한 공기 그제부터는 역류성 식도염 약을 먹기 시작했고 초여름의 한기가 약기운처럼 몸속을 파고든다 따뜻해지면 좋겠어, 좋겠어서 이불을 다시 감싸 쥐고 누워서 물끄러미 예전 대화들을 되짚어보는 순간이 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동이 트는 일만 같아서 단 한 번 절망한 적 없이 인내심을 키워온 것뿐 때때로 반갑게 인사하던 때를 그리워한다..

글/습작 2024.04.18

확고부동한 미래, 광화문에 피던 수국

확고부동한 미래, 광화문에 피던 수국 그 밤을 묻힌 붓은 이미 붓을 초과하는 무엇이고 그 붓 지나간 자린 모조리 한밤중 텅 빈 골목이 되어 누군가 밤새 그곳을 서성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서 있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거기 놓인 문진의 무게만큼이나 확고 부동한 밤 - 황유원, '검고 맑은 잠' 중에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학동네 2023) 따갑기만 한 봄볕 아래 광화문 거리를 거닐다 수국이 피던 자리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았어 지난 여름 어느 한 저녁, 어두운 골목에서 너는 연초록으로 물든 수국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 - 하얗게 핀 네가 금세 연초록으로 변하던 순간 넌 이제 수선화도 물망초도 아닌 연초록 수국 일방적 선언을 하였을 때, 수선화를 닮았던 네 표정도 함께 투명해졌어 투명하기만 한 여름을 ..

글/습작 2024.04.17

봄비

봄비 봄비를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봄비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봄비 맞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봄비를 좋아하게 되었고 빗방울이 두드린 장독대에 앉아 스스럼없이 경청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좋아한 봄비가 내립니다 주초부터 내내 내리고 있습니다 불쑥 우울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오지 않은 안부들을 궁금해 하다 턱 하고 목이 막힙니다 가파른 사연마다 걱정이 앞섰고 주체 못할 전화기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봄비를 싫어하게 되었고 장독대를 피하며 처마 끝에 서서 물끄러미 빈 하늘을 보곤 합니다 그렇게 싫어한 봄비가 내립니다 주초부터 내내 내리고 있습니다 즐거운 저녁인사를 들었습니다 추적추적 빗방울 속을 거닐면서 내내 생각했습니다 계절이 오고 가는 이치는 차마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몰라 야속하리만큼 담담할 뿐인데... ..

글/습작 2024.04.16

반성

반성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진은영, '청혼' 중에 (계간 2014년 가을) 빈 잔 위로 한꺼풀의 시간이 쏟아지면 이윽고 반성의 향기가 함께 스며들곤 해 그윽해진 사연들을 단숨에 훌쩍 비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망각의 병을 찾고 그렇게 잊힌 시간들 틈에서 때때로 우린 스스로 고독해지는 법을 배웠을까 몰라 여전히 햇빛은 찬란하고 어깨는 가볍고 비가 그친 종로에서 물끄러미 본 그림자 사람이 사람을 배워간다는 일 사람이 사랑을 배워간다는 일 # 진다

글/습작 2024.04.16

진은영, '청혼'

모처럼 '오래된 거리처럼' 오래된 시 한 편을 꺼내듭니다. 10년 전의 크디큰 트라우마를 겪던 대한민국은 계간 을 통해 진은영의 시 한 편을 접하게 됩니다. 마치 1980년 5월을 겪은 대한민국 전체가 숨죽여 맞던 이듬해 신춘문예에서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다수는 그 어떤 감정의 '정화'를 떠올렸을 법합니다. 그토록 오래된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저항은 하나이고 사랑과 치유도 하나"라고 시집 전체가 작게 말할 뿐이라던, 또 "예술은 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며,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적은 시집 발문에서도 아마 동일한 느낌을 얻으셨으리라..

문학노트 2024.04.16

진은영, '방을 위한 엘레지'

방을 위한 엘레지 1 꿈이 죽은 도시에서 사는 일은 괴롭다 누군가 살해된 방에서 사는 일처럼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이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듯 봄이 겨울을 이기고 온다는 것과 그 반대도 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뒤에 오는 것이 승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화성이여 지구를 이기길 내일이여 오늘을 이기길 썰물이여 밀물을 이기길 그러나 봄, 여름 뒤엔 다시 겨울이고 무지노트와 지구본 연필깎이와 제본한 『예술의 규칙』을 한 줄로 늘어놓은 내 방 책상 위로 가장 나중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든 다른 것이 시작될 때마다 예언은 빛나며 빗나갈 테니까 여기는 방이 아니라 거리이며 나는 다만, 여기를 걸어서 지나가는 거라고 벽과 벽 사이를 서성이며 생각하는 것이다 2 이 방에는 수만 개의 유채꽃이 겨울의 ..

문학노트 2024.04.13

인연

인연 어디서든, 우리는 텅, 텅 비어, 머리카락 몇 개가 날릴 뿐이었다. 누가 돼지를 칠 것인가. 닭들은 달을 향해 날아올랐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얼룩덜룩, 재치 있는 말들이 달을 향해 울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는. 아무것도.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시인해야만 했다. - 서정학,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중에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지, 2017) 날 선 고독이 옆자리의 손짓을 외면한 채 제 발등만 노려보는 계절이 있어 노려본다기보다는 어쩌면 응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삶에 대한 깨달음은 항상 어떤 계기를 두고 뒤늦게 발동하기 시작해 스스로 가파른 무덤에 오르게 되면 함께 할 벗들도 사라져 온전히 제 혼자의 힘으로 정상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걸 ..

글/습작 2024.04.08

껌 종이를 열자 반짝이는 은색이었다 무수한 햇빛이 그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너무 환하게 웃는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벌써 몇십 년째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 - 김선오, '껌 종이' 중에 ("사랑에 대답하는 시", 아침달, 2021) 껌을 좋아한다며 종류도 여러 가지인 걸 차곡히 쌓아놓는 버릇 한 번도 같은 종류를 꺼낸 적 없었고 문학회 후배가 낙서장에 대고 썼던 얘기 단물 다 빠지면 아무렇게나 툭 뱉는 인연 같아 후배를 그런 취급하지는 말아 달라던 읍소였고 졸업하고 선배들을 그런 취급했던 건 그 후배 성공하지 못하면 서러운 법 하다못해 부모님 장례식장에 면이라도 서려면 그립다는 말 한 마디조차 못해본 채로 껌이 되어 수십 년을 함께 살았어 이젠 그만 한 번 뱉은 껌을 도로 씹는 일도 없으니까 무..

글/습작 2024.04.06

연분홍, 연초록,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퍼플, 2024)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연분홍, 연초록 단편집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차례 작가의 말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 졸업 오이도 북극곰과 두더지의 상관관계 ( 빈 칸을 채우시오* ) *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헤이리의 가을, ...... ※ 에필로그 (벚꽃, 종로학파)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작가의 말 처음 습작을 하던 때가 기억난다. 하룻밤에 쓴 소설들이 태반이며, 하나같이 치기 어린 잡글이기 일쑤였다. 그 흔적들을 묶어보는 까닭은? 일종의 출사표 같다는 생각일 뿐.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 2024년 봄 호수를 품은 정..

2024.04.06

'2판'이라는 숙제, 일단은 '2쇄'부터

이른 새벽부터 작업을 해 꽤나 어렵게 마무리를 했다 사실 '퇴고'라는 일은 늘상 해오던 일임에도, 막상 '개정판'을 염두에 둔 작업들은 그리 익숙치가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시집과 단평집을 좀 더 가독성이 좋도록 조판의 형태를 변경하였고, 표지 디자인 역시 조금씩 손을 다시 보았다 이제 문제는 앞으로의 '퇴고'다 그것에 따라 실질적인 '초판 2쇄'가 아닌, '2판'의 발행을 남겨놓게 되는 셈이다 (언제쯤에?) # 시집, https://dante21.tistory.com/4504 단테, 종로학파,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퍼플, 2023)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단테, 종로학파 시집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개인노트 2024.04.05

벚꽃

벚꽃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 진은영, '청혼' 중에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여름을 재촉하는 봄볕 눈밑에 혓바늘이 돋는데 분홍빛 구름을 닮았구나 봄의 천사들이 내려앉았나 연신 사진 속 모델이 되고 순식간에 찾아온 꿈처럼 느닷없는 안부에 놀라고 반갑고 또 아리기만 해서 그해 겨울 함께 먹다 남긴 솜사탕처럼 편지를 주고받던 마음처럼 온기와 함께 녹아 흐르고 꽃잎이 녹아 흐른 냇물에 다시 봄비가 찾아올 테고 봄비가 두드리는 화음을 텅 빈 듯 고즈넉한 지혜를 네게 향하는 법을 배울게 #

글/습작 2024.04.03

촌음의 경계

촌음의 경계 서로가 서로를 돌고 돈다 인간관계의 고민은 서로가 서로 사이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날들로 인해 생긴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밤에 맨발바닥에 모래가 서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땅이 아주 가깝게 발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느낀다 - 박형준, 「밤의 소리」 중에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문학동네, 2023) 촌음의 경계를 마다한 채 우리는 관계라는 낱말의 그림자를 찾아 문밖을 서성댑니다 가파른 달빛이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안 벚꽃이 하나둘 피었다 지고 봄이 금세 저물어감을 알아챕니다 이른 겨울밤마다 온통 기다려온 봄임에도 벌써 이렇듯 저문다는 일에 항상 익숙해져만 갑니다 고민하지 않기 위한 방편을 세월만큼 배워온 까닭입니다 그만큼 늙어간 탓입니다 설렘도 없이 그리움도 없이 무덤..

글/습작 2024.04.02

눈 코 입, 끼리끼리

눈 코 입, 끼리끼리 눈끼리 코끼리 입끼리 끼리끼리 눈끼리 눈끼리 끼리끼리 썩은 눈 꺼져 맑은 눈만 모여 내가 맑은지 누구가 맑은지 아무도 몰라도 그래도 모여 끼리끼리 코끼리 코끼리 끼리끼리 못생긴 코 빠져 잘생긴 코만 잘생긴 코는 기준이 무얼까 아무도 몰라도 그래도 모여 끼리끼리 입끼리 입끼리 끼리끼리 미운 입 찌그러져 예쁜 입만 뭐 할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아무도 몰라도 그래도 모여 끼리끼리 그런데 우리, 왜 모인 거임? 모이라고만 하면 무조건임? 눈끼리 코끼리 입끼리 끼리끼리 #

글/습작 2024.03.27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지극히 어둡고 먼 꿈만 같던 일들도 저렇듯 눈앞에 닥치면 그때 뿐인 걸 봄날은 간다 꽃샘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꽃은 피고 나뭇가지에 돋는 새싹은 하늘을 펴고 내 발걸음도 기지개를 편다 그렇게 봄날은 온다 때 이른 사랑은 쉽게 저물어 슬프고 간밤에 소주 두 병을 마셨다며 울던 친구의 바지도 주름을 편다 그렇게 봄날이 간다 오늘이 퇴직일인데 얼굴도 못 보던 고맙다는 인삿말 뿐인 사내 메일도 용량쿼터제 탓에 금세 지우고 만다 그렇게 계절은 흘러가고 가고 오는 게 익숙해진 늙음 탓에 또 오는 봄날을 간다며 읽는 무심함 진지함 넉넉함 그런 게 멋인 줄 알았다며 또 웃고 또 우는 그런 봄날도 있으련만 오고 가는 게 아니라 남아 있는 걸 그렇게 눈앞에 닥쳐도 그때 뿐인 걸 여전히 어둡고 먼 꿈만 같던 일들 ..

글/습작 2024.03.21

환멸

환멸 지친 봄눈이 녹아내리듯 엉겁결에 사라진 풍경을 놓고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가 흘렀을까, 매일같이 신앙으로 떠받들던 이들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나면 이제 남루한 공터엔 더 이상 '광장'이라는 글자를 붙이지 않아도 좋았다 때때금 찾아드는 까마귀 떼도 오늘은 나뭇가지를 쪼아대지 않고, 수요일마다 시끄럽던 확성기들은 여전히 악을 쓰며 귓가를 어지럽히고 지친 봄눈이 언제 다 녹았냐며 누군가 물었는데, 다들 아무 대답을 않고 침묵했다 그리움의 팔 할은 후회이지만, 시간을 다시 되돌이킬 순 없어 후회를 않는 편이 낫지도 않아 그저 조용히 앉아서 말이 없는 연못을 보고 있어 떠난 이는 떠난 그대로 남은 이도 남은 그대로일 뿐 싹이 또 틀 거야 해마다 되풀이해 온 풍경을 놓고 진작에 알아챈 이들은 이미 떠났고,..

글/습작 2024.03.13

오늘의 시작

오늘의 시작 매일이 똑같지 않아 어떤 날은 여섯 시가 밝고 어떤 날은 어둡고 똑같은 열차 안도 누구는 앉고 누군 못 앉고 요일마다 승객들도 달라 짝꿍이 바뀌곤 해 독실한 노인들만 몇 일정히 좌석을 차지해 이른 아침부터 어딜 향하는 걸까 종삼일까 혹은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려 함일까 매일마다 똑같은 건 손주는 늘 아프고 며느리 전화도 없고 없는 건 돈과 머리칼뿐이고 아침부터 고집도 저절로 주름이 깊고 그래도 제일 싸잖아, 너도 무료잖아 오갈 데도 없는 이들의 가파른 쉼터 온양온천을 돌고 또 병천순대 먹으면 매일 한나절 루틴도 안성맞춤일 텐데 난데없이 고함을 지르던 여성이 있고 사람만 피해 다니는 학생들도 꼭 있어 어지간해선 옴싹달싹도 못하는데 움직일 순 없는데 화는 왜 내는데 열차는 태연하게 제 속도만을..

글/습작 2024.02.27

It's Rainy Day (ft. 'Schol of Rock')

It's Rainy Day (ft. 'School of Rock') 3월 말까지, 벚꽃이 피기 전이면 고전적인 락음악을 계속 틀어줘 메르세데스-벤츠가 선택한 공연 월드투어는? 구글어스로 충분해 한껏 기지개를 켠 아이들은 어젯밤 좋은 꿈들을 꾸었을까? 청춘은 늘 아름다워 노년에는 기지개를 어떻게 펴? 그런 건 관심이 없고 락앤롤이 글로벌 스탠다드야 난 YB의 '잊을게'밖에 모르는데 밥 딜런도 락앤롤은 아니니까 가끔 들으면 신도 나지 좋은 장르야 합법적인 마약들이 판치는 동안 시를 쓴다며 소주 7병 자랑을 해 피식 웃었지, 다 그렇게 먹엉 락은 왜 고전이라고 안 불러? 고전시는 다들 안 읽었잖아 현대시가 락은 더 아닐 텐데 랩의 역사가 벌써 반백 년인데 이십 년도 안 지난 고전시들아, 그대들의 죄를 사하노라..

글/습작 2024.02.20

김리윤, '재세계reworlding' (1월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베껴쓰고 다시읽기] 1월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 재세계reworlding 지나간 일은 다 잊자 지나간 일은 다 잊는 거야 그는 이 대사의 다음 장면에서 죽었다 영화 속에서 영화는 계속될 것 같았고 그 사람은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잊게 될 것이다 휴대폰 불빛이 신경 쓰여서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어 극장에 꽉 들어찬 어둠은 그 작은 불빛 하나 숨겨주지 못하고 주인공은 12월 밤거리의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오래된 거리를 걸으면 가로수들은 영원히 자랄 것 같다 정원사의 손에서 떨어지는 잎사귀와 뚝뚝 분질러지는 나뭇가지의 미래를, 잔디가 깎이는 동안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통을 다 기억하면서 12월엔 어디에서나 커다란 나무에..

문학노트 2024.02.01

일요일 저녁, 월요일 새벽

새벽 두시 저녁 때 먹은 엽기떡볶이랑 소주에도 단잠은 여지없이 잠을 깼고 이제 도 새로운 한주를 맞을 차례 간밤의 그녀들은 모두들 침묵한 채 그저 '시절인연' 뿐임을 역설하고 난 기어코 두 명의 이름을 전화에서 지웠다 박연정과 송은주. 비로소 떠나보낸다. 아무 미련도 없을 것 아무 그리움도 없을 것 여기까지가 상대방에 대한 예의일 것 그녀는 이제 없다 '가벼운 지인'들 뿐 - 그걸로도 족하다 새로운 한주다 직장보다도 더 먼저 마음이 가는 일들 글쓰기와 동인지와 신명이 날 일들 우선 해보도록 하자 -

개인노트 2024.01.29

손유미, '날씨의 숲 연인의 방' (기성 문단이 찾는 "새로운 목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베껴쓰고 다시읽기] 기성 문단이 찾는 "새로운 목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 날씨의 숲 연인의 방 허공을 꼬집으면 바람 음을 맞춰 이를 가는 작은 천둥 창문엔 내내 비가 내린다 숲 한가운데에서 연인은 머리채 잡힌 인어처럼 흔들리고, 식욕이 팽배해져서 구름 사경을 헤매다 눈을 맞춰 벼락 서로가 하나도 둘도 아니라는 함정에 빠져 돌연 안개 수렁 수렁 비는 잦아든다 언젠가의 슬픔처럼 그러나 수렁 수렁 언제나의 비는 서로를 휘감고 누워 * 손유미, 탕의 영혼들 (창비, 2023) "그의 언어는 불편하지만 한순간 날카롭고, 격렬하지만 빈틈이 적었으며, 퓨전과 키치를 연상시키되 그것을 간단히 넘어선 자리에서 생활과 조우한다... 심사자들은 이 낯선 재능에서 쉽게 요해되지 않는 세계를 구축하는 힘을 읽었다" ..

문학노트 2024.01.27

주민현,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공식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법)

[베껴쓰고 다시읽기] 공식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법 :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땐 비스듬하게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요 사진기를 모자처럼 쓰고요 철로 위로 방금 뜬 해가 빛날 때 그러나 해는 늘 가려져 있던 것이고 오래된 베레모와 벨루가의 장난기를 섞어 삶의 증오와 미움을 한 발짝 맛있게 끓여요 철로에 앉은 제각기 다른 머리색만큼이나 우리의 고민은 풍요롭고요 양들이 씹어 먹는 게 이야기라면 흰빛들이 세상엔 불어날 거지요 내가 쓰는 이유 당신이 말하는 이유 우리가 말하는 것들 오래된 산책 속에는 극장과 서점이 사라진 도시가 있고 폐업, 폐쇄, 반복되는 임시 개점과 휴업 선생님, 임대료는 점점 높아지고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고 당신이 말하지요 조용하고도 요란스럽게 내리는 비..

문학노트 2024.01.26

김중일,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시적 '효용'에 관한 물음과 유별난 '취미' 활동)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적 '효용'에 관한 물음과 유별난 '취미' 활동 :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 지금 만나러 가는 너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도 직업일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대답한다. 시인은 가장 큰 직업이다. 마치 스스로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다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가장 큰 직업'이란 말이 좀 걸린다.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 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큰 직업'이란 당최...... 무엇일까,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노동하여 집을 지으면 폭풍이 와도 ..

문학노트 2024.01.25

정현우, '소멸하는 밤' (박형준과 정호승의 변증법적 통일)

[베껴쓰고 다시읽기] 박형준과 정호승의 변증법적 통일 : 소멸하는 밤 흰 어둠이 잠들지 않는 거리, 나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 지난 사랑이 모두 헐거워지는 창문 아래, 눈물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 그러니 우리를 울게 하는 것들은 힘껏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는 것입니까, 어둠을 지우려 우는 별자리들이 느리게 첫눈으로 떨어집니다. 겨울 구름 위로 숨 하고 내미는 입술, 흰 두 뺨이 젖듯이, 베갯잇에서 우우 하고 우는 얼굴, 가장 죽고 싶을 때와 가장 살고 싶을 때의 얼굴은 밤마다 꿈속에서 끝없이 다가오는 얼굴들, 죽은 아이들과 죽은 엄마들과 죽은 모두가 투명한 이파리처럼 흔들릴 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추모는 내가 할 수 없어서 나는 슬퍼야 합니까, 낯빛들이 피어오르는 숲, 별자리는..

문학노트 2024.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