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창작동인 뿔, '어제의 꿈은 오늘의 착란' (창작 커뮤니티들의 롤모델, 창작동인 뿔)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4. 1. 12. 06:33

   

 

 

[베껴쓰고 다시읽기] 창작 커뮤니티들의 롤모델, 창작동인 뿔 : 

 

   

   어제의 꿈은 오늘의 착란 

 

 

   소음 속에서 귀를 막으면 파도 소리가 들리나요 

   손가락을 죄다 자른다면 더는 편지를 적지 않아도 되나요 모든 편지에는 

   그립고 슬프다는 말을 적어야 하나요 

 

   밤하늘도 저렇게 많은 알약을 삼켰다고 하지 않았나요 

   박하잎을 씹으면 두 눈이 시큰거려요 발끝에서 바다가 죽어가요 

   어젯밤 꿈은 전부 증발해버렸는데 

   어지러워요 

   나는 어지러운 사람이에요 

 

   무엇을 말해야 하나요 무엇을 듣고 싶나요 

   귀를 막으면 알 수 있나요 귀를 막고 눈이 멀면 

   손끝이 예민해지나요 무엇을 만져야 하나요 

   무엇이었나요 어둠 속에서 

   내가 더듬거렸던 것은 

 

   끝, 눈물, 다음에 계속 

 

   물밀 듯이 밀려오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눈앞을 가리는 건 꼭 눈물이어야 하나요  

   

   볼 수 없다면 눈 먼 사람이 되는 게 나을까요 

 

   독서를 하다가도 문득 견딜 수 없어져서 

   책을 펼친 채로 덮어두면 날갯짓 소리가 들려요 

   영화는 어떤가요 재생하면 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고 

   나는 여러 인물에게 감정을 대입해요 오래 살았다는 망상을 하곤 해요    

   결국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되는 건가요 

 

   아직 끝이 아니 않았는데도 

   우는 사람이 왜 이리도 많은 걸까요 

 

   그러나 편지를 쓰는 동안 몇 개의 계절이 지나갔다 나는 누구의 선생도 되지 못할 것이며 사실 네가 나에게 가르쳤던 장르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위세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여름은 길고 길어서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그게 나의 장르라고 추측했다 나무가 햇빛을 조각내는 동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편지를 적는 것 적어놓고 보내지 않는 것 

   스스로 읽어보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 위해 

  

   가끔은 저항하기 위해 

   행간의 공백을 들여다보는 것 

   멍하니 죽기를 기다리는 것 우리 중 하나는 

   조각날 거라 기대하는 것 

 

   끝과 눈물과 다음이 계속된다면 

 

   우리 서로 끌어안을까요 

   겹쳐질 수 있나요 두 개의 심장이 가까워지면 

   무엇을 들을 수 있나요 어둠 속에서 

   내가 너의 얼굴을 더듬거렸다고 믿었던, 

   그 순간에 

   너는 무엇을 듣고 있었나요 

 

   여름이 지나가요 

   온 동네를 뛰어다니다 머리를 붙잡고 뒹굴어요 

   현악기가 머릿속을 가득 메워요 

 

   잠이 와요 

   꿈속에선 손 닿는 것마다 시들어가요 온몸에 피부병이 도지고 

   붉은 반점마다 꽃을 그리려는 사람이 있어요 

  

   길 잃은 모든 동물들은 미치기 시작해요 자신의 앞발을 뜯어 먹고 

   꼬리를 잘라 거리에 던져두어요 

   거리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봐요 

   꿈이라는 걸 알아챈 듯이 

 

   음악이 꺼져도 춤을 추는 이가 있을까요 있다면 

   그는 무엇이 그렇게도 그립고 슬픈 걸까요 

   끝이 나고 눈물을 흘려도 정말 

   다음은 계속되는 걸까요 

 

   어지러워요 

   끝내 너는 어지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나요 

   벌써 그렇게 많은 계절이 지났나요 

      

    

   * 창작동인 뿔,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모든 창작 커뮤니티들의 궁극적 목표가 될 공동문집의 성격에 있어 '창작동인 뿔'이 보여준 행보는 또 하나의 옵션이 되기에 충분한 아주 매력적인 교범입니다. 양안다, 최지인, 최백규 이렇게 단 세 명의 시인들이 함께 모여 만든 '익명'의 시집에서 그들의 주력무대인 창비, 민음사, 문학동네, 현대문학 (또는 문지까지도) 등을 아우르는 하나의 교집합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것도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서 시집들을 볼 때면 자주 '집단창작' 언저리에 포진한 시도들을 여럿 읽을 수 있겠는데, 어제 잠시 훑어본 한 시집에서 다섯 명의 무명시인들이 나란히 적어놓은 각자들의 '시인의 말'과 Chapter의 구성과 '에필로그' 등 역시 마치 다섯 권의 독립된 시집들을 한데 묶은 듯한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아서 편집과 기획의 측면으로도 눈여겨볼 부분이 많았습니다.

   벌써 또 주말입니다. 1월의 중순으로 향하는 두번째 주말이며, 올해의 연간일정 또한 다시금 정비해놓을 차례입니다. 여전히 봄부터 겨울까지 줄줄이 문예지들과 신춘문예가 있겠고 철마다 각종 문학상 및 문학계 소식들도 쏟아질 예정입니다. 혹시 공동문집을 발간하게 되면 어느 계절 정도가 적당할까에 대한 궁금증들도 저마다 제각각의 해법들을 가지리라 예상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porftepouLc?si=Jvub7QenpHqS3yv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