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674

신춘문예 D-13. 공리가 나오는 영화 (황인찬)

신춘문예 D-13. 공리가 나오는 영화 (황인찬) 시간을 나누고 함께 밥 먹고 또 때로 함께 잠드는 이것이 사랑이라니 군부대 생활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네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이 군인이겠지 무료한 젊은이들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를 말없이 보네 어쩐 일인지 그건 공리가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게 인지 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네 "이거 보자고 한 사람 누구야" 영화가 끝나고 젊은이 중 하나는 화를 냈는데 사실 그건 영화를 보자고 했던 것이 부끄러워 꺼낸 말 공리가 나오는 영화는 감동적이었지만, 젊은이들은 다들 눈가에 물기가 어린 채 말이 없었네 "미안해, 내가 그랬어" 다른 젊은이가 침묵을 깨고 사과를 했네 갑자기 혼자서 엉엉 울었네 밤늦은 시간이 되어 모두 잠들어야만 했고 군부대 생활관에서는 많은..

문학노트 2023.11.17

신춘문예 D-14. 아우라지 (김경주)

신춘문예 D-14. 아우라지 (김경주) 벼루 위에서 마른 먹처럼 강은 얼어 있습니다 바람에 어두운 물소리가 실려 옵니다 바람 속으로 물속의 어둠이 번지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 저녁을 가만히 견뎌야 한다면 무덤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강 속에 죽은 두 손을 담그고 앉아 있겠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다가가기 위하여 밤이면 빛은 얼마나 먼 행성에서 날아오고 있는 것인가요 그런 밤이면 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잠든 새들은 검은 이를 갈고 오랜 비행을 마친 인간은 깨어나 조용히 기체를 떨고 있겠습니다 무명의 별에서 빛 한 채가 날아옵니다 그 빛의 세월이 내 눈까지 날아오는 데 걸리는 음악의 생은 또한 얼마나 고독해야 하는가요 외로운 사람은 눈을 감고 걷고, 눈이 외로운 사람은 강심에 그 눈의 음을 숨겨야 하는 밤입니다 멀리..

문학노트 2023.11.16

신춘문예 D-15. 즐거운 편지 (황동규)

신춘문예 D-15.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현대문학, 1958년 11월 :: 짧은 편지 :: 민음시인총서의 1번이 김수영이었다면, 창비시선의 1번은 신경림..

문학노트 2023.11.15

신춘문예 D-16. 눈 (김수영)

신춘문예 D-16. 눈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자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달나라의 장난 (춘조사, 1956) :: 짧은 편지 :: 이제 불과 16일밖에 남지 않은 탓에 시편을 고르는 작업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어제 발표된 제4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는 북큐레이팅과 팟캐스트 진행자이며 에세이 작가로도 이미 활동해온 박참새 시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비문창 계열에서 수..

문학노트 2023.11.14

신춘문예 D-17.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신춘문예 D-17.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 짧은 편지 ..

문학노트 2023.11.13

[신춘문예 D-18] '신뢰'를 형성한다는 일

[신춘문예 D-18] '신뢰'를 형성한다는 일 : 알랭 드 보통의 책 에 나온 말들 중 "신뢰는 타인의 부재에 대한 합리적 해석"이란 말을 두어 달쯤 전부터 줄곧 생각해온 편입니다. - 이 말에서의 '부재'는 일종의 '미지'인 상태를 뜻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는 결국 스스로의 몫인 셈입니다. 대개의 경우는 강박관념, 불안감, 맹목적 믿음, 무지와 어리석음 등을 경계해야 하나 거꾸로 그것들이 종종 '신뢰'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기계공학 출신의 사람들은 항상 '톨러런스'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치밀한 성격들을 갖고, 반대로 화학공학 출신인 경우는 '믹싱'에 대한 강박으로 사교적인 편이죠. 산업공학 전공자들의 경우는 '최적화'에 대한 강박이 항상 '최선'에 대한 ..

문학노트 2023.11.12

[신춘문예 D-19] 신춘문예의 문화적 위상

[신춘문예 D-19] 신춘문예의 문화적 위상 : "하나의 문화체계에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은, 그것이 당대의 문화적 정황에 어떻게 의미작용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뀌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신춘문예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화제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생산한다. 현재 그것의 의미는 양가적이다. 그 양가성은 신춘문예라는 화려한 행사의 뒷면에 위태로운 흔들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흔들림이 소멸을 낳지는 않는다. 그 흔들림 때문에 그것은 존속한다." - 정명교(정과리), 한국일보 1988. 아침부터 읽었던 글입니다 영하 3도의 날씨가 제법 차가운 편이어서 바깥을 짧게만 산책하고 돌아선 길목에는 은행잎들만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사진은 찍지 않았습..

문학노트 2023.11.12

[신춘문예 D-20] 퇴고를 한다는 것

[신춘문예 D-20] 퇴고를 한다는 것 : 가을 단풍이 아쉽게도 벌써 저물고 있습니다. 올해는 기후 탓인지 빨갛게 물든 예쁜 단풍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로 은행잎들만 길가에 잔뜩 나뒹굴고 검붉게 타다 만 흔적들이 곳곳에 남은 상태예요. 오늘부터는 아침 산책도 그만하기로 했고요... 바깥 날씨는 비가 온 다음이라서 꽤 춥네요. 이른 아침마다 새벽 예배를 다니는 한 친구의 옷차림부터 대뜸 걱정하는 시간입니다. 요즘 들어 지인들의 습작을 볼 때면 자꾸만 말을 망설이곤 하게 되었는데, 실은 어떤 한 사람의 글을 놓고 온전히 그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무언가를 '판단'하기가 저어된 까닭입니다... 가끔 옛 영화의 대사를 떠올릴 법한 이 얘기는 사실 '있는 그대로의 편안함'에 관한 문제일 수도 있겠어요. ..

문학노트 2023.11.10

[신춘문예 D-21]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 산책

[신춘문예 D-21]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 산책 : 새벽 공기가 차갑습니다. 동편 하늘에는 그믐달도 떴습니다. 이제 신춘문예도 불과 3주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네요... 아직도 퇴고를 하느라 힘겹고 밤잠을 설치기 일쑤인데, 여전히 작품은 여간해선 눈뜨고 보기 힘들 경우들이 더 많습니다. 어쩌겠나요? 여기까지가 또 '한계'일 뿐입니다. ^^ 11월의 두번째 주말을 맞기 직전인 목요일, 작심을 하고 이제니 시인을 또 꺼내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눈치채셨을 텐데, 아마도 올해 신춘문예를 도전하는 분들 중 대다수는 박준, 이제니, 황인찬의 그늘 아래서 또 더러는 강성은, 나희덕, 김행숙, 오은, 김언 그리고 김경주와 조연호와 양안다까지 정도를 닮아간 채로 이 '구도'의 길을 걸으셨으리라 짐작해봅니다. 그리고,..

문학노트 2023.11.09

[신춘문예 D-22] 박준의 11년 전 데뷔시집을 읽는 새벽

[신춘문예 D-22] 박준의 11년 전 데뷔시집을 읽는 새벽 : 너무 이른 새벽. 잠버릇이 고약해져서인지 술버릇이 고질병이 된 탓인지 모를 허망함이 문득 떠오를 법한 너무 이른 새벽입니다. 일년 내내 편지를 써온 습관이 있어 모처럼 다시 노트북 앞에 앉습니다. (실은 신춘문예 투고용 습작들을 퇴고하기 위함입니다. 이 글을 쓰면 출근 전까지는 대화창을 못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의 데뷔시집을 모처럼 꺼내듭니다. 벌써 11년의 세월을 넘어선 그 무게감보다는 몇 장마다 되새겨보는 지난 시들의 추억과 그 아름다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려 함이며,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대신하여 왠지 더 끌린 이 시집 중 한 편을 고르려 합니다. 막상 기억을 돌이켜보니 올 한해는 유난스레 이 시집을 퍽 자주 필사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문학노트 2023.11.08

[신춘문예 D-30] "운칠기삼"과 0.03%라는 가능성

[신춘문예 D-30] "운칠기삼"과 0.03%라는 가능성 : "운칠기삼". 흔히들 자주 듣게 된 이 사자성어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는 구글 (현 알파벳)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구글의 성공신화와 그 비결을 묻자 그는 대뜸 자신있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또 앞으로도 줄줄이 대학입시와 신춘문예 소식들로 매우 붐빌 예정이고, 달력은 비로소 시월의 마지막 날을 가리키는 아침입니다. 며칠전부터 계속 Barry Manilow의 'When October Goes'를 듣는 편인데, 이는 주로 가장 덜 팔린다는 Jazz Ballad라는 장르에 속하는 노래입니다. 합격과 탈락, 당선과 낙방의 희비는 항상 크게 엇갈리곤 합니다만, 그저 한 순간들일 뿐이며 '목표..

문학노트 2023.10.31

[신춘문예 D-31] '독자'라는 존재에 관하여... 단 한 명을 위한 창간호의 추억

[신춘문예 D-31] '독자'라는 존재에 관하여... 단 한 명을 위한 창간호의 추억 : 수도권 새벽 기온이 섭씨 8도 아래로 떨어진 날씨예요. 간밤에 블로그를 좀 정리하느라 노트북이 현재 100시간 가까이를 쉬지도 못한 채 달리는 중입니다. 가장 화려할 법한 신인들의 무대인 신춘문예를 손꼽아 기다릴만한 이들은 누굴까를 잠시 생각해보니, 정작 당락의 운명을 손에 쥔 심사진도 아니고 이미 연말께에 이르면 연락이 있고 없음으로 해 스스로 결과를 짐작하게 될 응모자들이 아니겠고... 바로 독자들입니다. 계간 이 창간호를 낸 게 벌써 아득한 추억이 된 시대입니다. 그 첫 호를 펴낸 이가 창간사에서 밝혔던 문구가 문득 생각납니다. "그 출발이야 누가 하든지 막막한 느낌이 앞서기 쉬울 것이다. 먼 길을 어찌 다 가..

문학노트 2023.10.30

[신춘문예 D-32] 언어적 '유희'의 필요성... '진지함'을 되찾기 위한 과정

[신춘문예 D-32] 언어적 '유희'의 필요성... '진지함'을 되찾기 위한 과정 :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린이 그린 그림 / 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린 기린 // 그림 속의 기린은 구름이 될 수 있다 / 그림 속의 구름은 기린이 될 수 있다 // 구름이 달리면 기린은 둥실 떠오르고 / 기린이 눈을 감으면 구름은 잠이 들고 / 잠이 든 구름 곁으로 초원이 놀러오면 / 초원의 초록 들판을 기린이 가로지르고 // 기린이 그린 구름이 초원 위로 흐를 때 / 초원 위로 흐르는 것은 기린인가 구름인가 // 대답하는 대신 다시 묻는 네가 있고 / 긴 목을 휘저으며 그저 웃는 구름이 있고 / 뭉게뭉게 휘날리며 흩어지는 기린이 있고 / 묻는 대신 대답하는 오늘의 내가 있고 //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린이 그린 구..

문학노트 2023.10.29

[신춘문예 D-33] 글쓰기의 '정년'은? '유언장'까지입니다

[신춘문예 D-33] 글쓰기의 '정년'은? '유언장'까지입니다 :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 벌써 가을이 완연히 접어들었고, 이제 곧 단풍이 오색으로 찬란한 계절을 수놓게 될 예정이겠어요. 저도 몇년 전에야 가보았던 명소들을 (지리산이며 선운사며 또는 소요산과 산정호수와 호수공원을 또 아니면 북한산 기슭이거나 고궁 옆 돌담길이거나 또 아니라면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한적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의 단풍이든간에) 찾아볼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계절은 그렇고요. 이미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신춘문예 이야기를 계속 꺼낼 차례네요. 오늘은 몇 년전에 신문에 실렸던 문태준 시인의 칼럼 한 편을 소개할까 하고요. 시인은 이 글에서 신춘문예의 현 주소와 역대 당선소감들의 면면 그리고 스스로가 신인이었던 시절의 ..

문학노트 2023.10.28

[신춘문예 D-36] 세상에 남길만한 단 하나의 선물, 글

[신춘문예 D-36] 세상에 남길만한 단 하나의 선물, 글 : 최종 퇴고 및 교정기간까지를 고려한다면 약 일주일 남짓, 그 기간을 제외하면 이제 불과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올해의 신춘문예 시즌입니다. 모든 신춘문예 도전자들은 영원한 '청춘'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남은 한 달의 시간 동안 어떤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놓을까를 고민해야 할 계절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가을이죠.) 얼마전에 '단평집' 한 권을 묶어내면서도 최근 5년여의 각종 신춘문예 당선작들과 주요 문학상 수상작들은 모두 다루어본 바 있습니다.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문단의 풍경 또한 사뭇 달라져왔음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죠... 하지만 여전히 신춘문예라는 타이틀 앞에선 그 모든 유행과 시절들이 그저 흘러가는 한 순간 뿐임을 새삼 자각하는 일..

문학노트 2023.10.25

박준, 마음 한철

양주를 향하기 직전, 꽃밭 속에서 내가 찾을 무언가가 있을까 … [필사] 박준, 마음 한철 : 마음 한철 - 박준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울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 당신..

개인노트 2023.10.22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단 한 편의 '당선작'을 뽑는다면? 마지막 시뮬레이션)

[베껴쓰고 다시읽기] 단 한 편의 '당선작'을 뽑는다면? 마지막 시뮬레이션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 "한번도 슬픔을 완성하지 못했고 완성된 것은 슬픔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새벽 거리를 떠도는 불빛 하나가 빗물 고인 웅덩이에 내려와 푸르스름한 떨림을 이루고 있다. 그 속에는 몰래 꿍쳐둔 빨래처럼 잎들이 가지에 꾸욱 달려 있다... 구름, 하늘의 자락이 한쪽 부서진 자리, 파란 눈빛 속에 잃어버린 주소지를 담고 있는 집 나온 고양이, 짙은 숨소리, 고동, 빗물 고인 웅덩이." ('시인의 말' 중에서) 본 연재의 맨 마지막 글입니다. 신춘문예는 이제 한 달 보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신춘문예를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시인으로 평가받기도 한 그를 환갑에 육박하는..

문학노트 2023.10.17

황인찬, '기울이기' (석 달만의 화해, 거짓말로도 '보고싶었던' 말)

[베껴쓰고 다시읽기] 석 달만의 화해, 거짓말로도 '보고싶었던' 말 (황인찬, 기울이기) : 신춘문예, D-44. 가장 최근에 쓴 글들을 보면 주로 예전의 정호승이라거나, 진은영과 이제니의 신작들 몇을 꼽았던 것 같습니다. 어저께 읽은 박준의 산문인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역시 꽤 많은 반성들을 갖게 만드는 좋은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번 연재에서도 이 글이 그 '마지막'이 아닐까 해 되도록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을 법한 전범들을 꺼내보고자 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기억을 돌이켜 올 한햇동안 남의 글을 읽고 얼마나 울었을까도 잠시 헤아려 봅니다. 연초에 한겨레에서 읽었던 한 할머니의 사연이 대뜸 먼저 생각났어요... 일흔 평생을 한글도 없이 살던 분은 유방암 수술을 받고 "..

문학노트 2023.10.17

이제니, '남겨진 것 이후에' (When October Goes, 시월 하순의 시작)

[하루한편] When October Goes, 시월 하순의 시작 (이제니, 남겨진 것 이후에) : 남겨진 것 이후에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

문학앨범/필사 2023.10.16

진은영, ‘몽유의 방문객’ (가을에 지는 꽃, 수국에 얽힌 추억)

[하루한편] 가을에 지는 꽃, 수국에 얽힌 추억 (진은영, 몽유의 방문객) : 몽유의 방문객 너는 오겠지, 달의 해안에 꽃들이 하얗게 밀려오는 봄밤에 너는 오겠지, 부서진 간판의 흐느낌을 가로수 검은 가지로 건드리는 여름밤에 오겠지, 추위와 얼음의 투명한 발톱으로 다듬어진 소박한 식탁에 부엌에서 다시 칼국수를 끓이려고 하얀 밀가루가 여주인의 손톱 사이에 실낱 같은 달로 떠오르는 밤에 초록색처럼 사랑스런 연인이었네, 아닌가 첫 눈송이의 흰빛으로 너는 사랑스러웠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가을밤의 어두워가는 남청색 코트 자락에 기어들어가 별빛처럼 부드러운 국수 한 그릇을 나눠 먹었으므로 꿈속을 걸으면서 너는 기억하네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식탁* 부드럽고 위태로운 장소의 이름 속으로 너는..

문학앨범/필사 2023.10.15

정독, 종로학파, "83일 동안의 짤막한 여행" (퍼플, 2023)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83일 동안의 짤막한 여행 정독, 종로학파 단평집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차례 저자의 말 2023년 5월 25일 (목) 2023년 5월 26일 (금) 2023년 5월 27일 (토) 2023년 5월 28일 (일) 2023년 5월 29일 (월) 2023년 5월 30일 (화) 2023년 5월 31일 (수) 2023년 6월 12일 (월) 2023년 6월 13일 (화) 2023년 6월 14일 (수) 2023년 6월 15일 (목) 2023년 6월 16일 (금) 2023년 6월 19일 (월) 2023년 6월 20일 (화) 2023년 6월 21일 (수) 2023년 6월 22일 (목) 2023년 6월 23일 (금) 2023년 ..

2023.10.13

조정권, '산정묘지 1' ('시정신'에 관한 한 교범 또는 '천로역정')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정신'에 관한 한 교범 또는 '천로역정' (조정권, 산정묘지 1) : 신춘문예, D-50. "산시(山詩)를 쓰는 사람들은 '절대고독'을 아는 사람들이다." 주간경향에 실렸던 한 칼럼에서 조정권 시인을 다룬 대목입니다. 새벽공기가 차갑습니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날씨가 이제 곧 단풍을 알릴 것 같은 기별을 해오면, 접어둔 공책을 꺼내 아주 오래된 시들을 다시 찾아 읽습니다. 그윽하다는 말, 불멸의 시편들만이 갖는 거의 유일한 특권이기도 합니다. 황지우가 심사평에서 "놀랍도록 진지함"을 김수영의 시정신에 빗대 추천한 이 작품에서 시인은 정신세계의 고결함을, 그 고독을, 그 절망의 깊이와 의지의 견고함을 노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학의 첫째 봉우리인 '숭고미'를 발견해내는 일은 퍽..

문학노트 2023.10.11

박현웅, ‘사막’ (‘등단’보다 더 중요한 ‘출간’을 둘러싼 권력)

[베껴쓰고 다시읽기] ‘등단’보다 더 중요한 ‘출간’을 둘러싼 권력 (박현웅, 사막) : 신춘문예, D-51. 김성태, 성은주, 이길상, 이만섭, 강윤미, 유병록, 권지현, 박현웅. 중앙일간지 여덟군데에서 지난 2010년에 신춘문예를 통해 배출한 시인들 명단입니다. 유독 이 해의 당선자들 이름이 생소해지는 건 이른바 ‘메이저’ 시집들 중 유병록 시인 단 한 명만이 시집을 냈을 뿐, 나머지 시인들은 아직껏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혹은 생소한 출판사였거나 아예 못낸 경우 등) 문단 내에서의 권력은 이렇듯 ‘메이저’라는 이름 하에서의 차별, 배제, 텃세 등을 일컫게 됩니다. 그들의 면면은 창비, 문지, 문학동네, 현대시, 현대문학, 문학사상, 민음사 등이고요. 설령 그 어떤 다른 경로로 ‘등단’을 했..

문학노트 2023.10.10

이제니, ‘페루’ (문예지들이 더 강세? 그렇다면, 신춘문예의 향후 해법과 전망은?)

[베껴쓰고 다시읽기] 문예지들이 더 강세? 그렇다면, 신춘문예의 향후 해법과 전망은? (이제니, 페루) : 신춘문예, D-52. 현 주류 (소위 ‘메이저’ 시집들을 출간하고 있으며, 각종 공모전 심사 및 주요대학 강단에 서있는 이들) 중에서 어쩌면 유일한 신춘문예 출신은 이제니 시인일 것 같군요… 박준, 황인찬, 안희연, 오은 등등이 모두 신춘문예를 아예 거치지 않고 각기 다른 문예지들을 통해 등단했었기 때문인데, 확연히 달라진 시단의 풍경을 대변하기도 하는 대목예요. 따라서 이는 향후 주요 신춘문예 심사를 여전한 관록에 기댄 채 안도현, 문태준, 송경동 등이 맡겠느냐 아니면 다른 문예지들처럼 ‘미래파’ 성격에 훨씬 더 우호적인 이들이 도맡느냐에 따라 그 당선작의 향배도 크게 엇갈릴 수 있을만한 부분이기..

문학노트 2023.10.09

박형준, '가구의 힘' ('90년대식 '신서정'이 아직껏 살아남는 이유)

[베껴쓰고 다시읽기] '90년대식 '신서정'이 아직껏 살아남는 이유 (박형준, 가구의 힘) : 신춘문예, D-54. 1990년대 신춘문예 당선자 출신들 중 이후의 작품성과 활동성 등을 따져 문단 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얻은 시인은 다름아닌 박형준 시인이었습니다. (예전에 그를 '형상화의 달인'이라로 소개했던 제 글도 있는데, 인용을 했던 시인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소외와 결핍을 통해 시를 쓰고, 슬픔을 의지로 전환해서, 또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벌판을 만들겠다"던 담화도 여전히 유의미한 지침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는 편입니다.) 대표작에 해당될만한 첫 시집인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와 얼마전에 창비에서 나온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에 실렸던 몇몇 수작들을 또 꺼낼 법도 한데, ..

문학노트 2023.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