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마
창가가 환해졌네, 말했습니다
그가 나를 처음 이곳으로 데려오던 날이었습니다
율마는 측백나무과에 해당됩니다
강한 빛을 좋아하며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지요
어린나무일수록 물을 더 자주 주어야 합니다
그는 동봉된 메모를 꼼꼼히 읽으며
내 앞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하루를 지켜봅니다
잠에서 깨어나 상을 차리고 먹다 만 밥을 치우고 티브이를 보다 다시 잠드는 생활입니다
그는 좀처럼 외출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에게 발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아주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것 외엔 미동도 없습니다
물과 햇빛이 필요한 건 오히려 그쪽인 것 같습니다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가 왜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있는지
다만 나의 잎은 뾰족하여 악몽을 터트리기 좋고
흙은 비밀을 감추기에 적당한 재료인 것입니다
내가 아주 작은 씨앗이었을 때
누군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너는 추위에 강하게 설계되었단다
찌르거라 다만 찌르거라
이제 세상은 일요일
어김없이 그의 잠꼬대가 들려옵니다
아마도 그는 측백나무숲을 헤매고 있는 모양입니다
밤은 깊고 땅은 얼고
짐승 울음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의 잠을 지키는 일
나는 그의 갈퀴가 되고자 합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이 되고자 합니다
슬픔이 작동하는 회로를 아는 사이
나는 그것을 가족이라 부릅니다
# 안희연, 당근밭 걷기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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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정' 또는 '서정시'의 새 시대 :
안희연이 4년만에 내놓은 시집을 이제야 비로소 읽습니다만, 이건 순전히 국내 공공도서관들의 신간도서 입고일정이 서점가랑은 사뭇 다르다는 데 기인한 것일 뿐입니다. (모든 시집들을 일일이 사서 읽지 못하는 형편은 비단 제 문제만은 아닐 것이기에)
어쩌면 창비 그룹에서 가장 유력하게 밀고 있던 주자들 중 한 명이 안희연 시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최근 일련의 앤솔로지와 심사평에서 이름을 드러낸 이들의 면면을 놓고 보면 오히려 황인찬 시인보다도 신용목의 백석문학상, 안희연의 신동엽문학상이 갖는 위치가 훨씬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며, 이 잣대와 시각에서만큼은 황유원과 박준이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서 있습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던 그는 "측백나무 숲을 헤매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추위에 강하게 설계"된 시인은 오히려 "그의 잠을 지키는 일"에 매진하며 "그것을 가족이라 부릅니다". 새로운 '서정'이 싹트는 순간이며, 이 순간만큼은 전혀 신파조도 아니거니와 아쉬움도 그리움도 없는 그저 쓸쓸한 자기연민이거나 혹은/어쩌면 서늘한 조소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한 장면을 묘사함에 있어 기존 창비 그룹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인 '드러냄'의 미학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그래서 그 장면마다의 심상에 귀를 기울이고 시인의 고백과 자신의 느낌이 다를 적마다 순순히 그 차이를 드러낼 줄 아는 독자들의 반응이 있었다면... 반대로 이 '심상'에서는 독자들 스스로가 마치 관음증 환자들처럼 흐릿한 장면 하나하나를 놓고 어떤 장면일까를 한참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기존의 '서정'과는 뚜렷하게 다른 지점을 획득합니다. 이를 일컬어 '신서정'이라고 한다면 그건 타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장면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은 채로의, 오해를 감수할 것만 같은 위태로운 곡예는 과연 테크닉일까 아니면 '히키코모리' 같은 내면으로의 '은둔' 같은 한계일까를 애써 따지고 물을 필요는 좀 있겠습니다. 드러내지 못한 자아가 짐짓 그 어떤 '멋'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반대로 그에 못지 않은 '드러내지 못함'에 따른 '정서적 고갈' 역시 그것에 상응하는 아쉬운 구석인 탓에 이를 대놓고 "요즘 시들은 원래 이런 거야"라며 떠벌일 재간은 영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습작생들의 초기작들처럼. 아니면 말고 식. 어려운 대목입니다... 기존의 '전통적' 서정시들과는 분명히 다른 대목이니까요.
봄의 향기가 완연한 저녁입니다. 가장 잘 어울릴 법한 시인 중 한 명인 안희연의 작품을 꺼내보는 일이 오히려 '축복'에 해당될만큼, 훨씬 더 벅찬 시대를 맞는 중이고요. 이제 곧 오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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