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곽재구, '도솔암 풍경' ('올드함'을 읽는다는 일)

단정, 2025. 4. 27. 23:47

 

 

 

   도솔암 풍경 

 

  

   칡꽃 향기 달빛 쏟는 

   선운사 도솔암에서 하룻밤 비럭잠을 잤습니다 

   밤늦게 최승자의 시집을 읽는다는 처녀보살은 

   광주에서 왔다는 말 듣고 어쩐지 

   내 행장에 최루탄 냄새 나더라고 웃었습니다 

   지장보살도 산 아래 내려가면 

   최루 가스에 울먹일 것이라 말했더니 

   방금 친 인절미 한 접시 따뜻하게 내왔습니다 

   밤 깊어 머슴새 울음 잠들고 

   창문 열면 노오랗게 불 밝힌 선방 하나 

   계곡물 소리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 곽재구, 서울 세노야 (문지, 1990) 

 

 

   ... 

 

 

   '올드함'을 읽는다는 일 : 

 

 

   곽재구의 오래된 시집 한 권을 읽었습니다. 데뷔작인 '사평역에서' 한 편만으로 '대표작'이라는 수식어를 대체해도 될 만큼 이후의 수작을 찾기가 꽤 힘들게 된 시인입니다만, 그래도 창비뿐만이 아닌 문지에서도 시집을 여러 차례 냈던 터라 이제는 '고전'이라 셈 치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까닭입니다. 그 첫 시집입니다. 

   사월이 저물어 갑니다. 어느덧 오월의 계절, 일명 '오월시' 동원으로도 잘 알려진 곽재구 시집을 꺼내 든 심경은 다시금 싱숭생숭합니다. "광주에서 왔다는 말" 한 마디로도 "방금 친 인절미 한 접시"를 내올 만큼 시대의 민심은 매한가지였었나 봅니다. 다시 그 시절을 떠올리는 일은 그래서 한 편의 반가움과 함께 달갑지 못한 아픔을 함께 갖습니다. 

   한 편의 잘 짜인 그림 한 점을 내놓는 듯한 시풍이지만 시대의 상흔이 역력히 매겨진 탓에 시집을 읽는 내내 불편한 구석도 좀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통일'이거나 '조국' 같은 단어들은 이제 그 시효성마저 잃어 격세지감을 느낄 법합니다.) 

   그래도 오월은 찾아옵니다. 마치 최신 유행가만을 좇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예전에 듣던 아주 고루한 팝송 한 소절에 반가움이 일던 것처럼 '미래파'와 '신서정' 앞에서도 그 기세를 굽히지 않는 또 다른 부류들이 엄연히 존재해 왔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것 같습니다. 그게 설령 '올드함'이라 해도 누군가는 그 시를 읽고 또 반가워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인데, 그걸 문학에서의 '진보' 관념으로 잣대를 들이댈 일도 또 아니겠어서 차라리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한 표를 던지고픕니다. 

   투박한 시어들, 직선적인 화법, 스토리텔링 중심의 기술에 못 미칠 정서와 사유의 깊이 등에서 요즘 같아선 매우 박한 점수를 받을 게 분명한 시편들이지만, 또 그 시대 나름의 정서를 담고 있다는 점 때문에 굳이 그렇게까지 등을 떠밀 엄두가 잘 나진 않는 것도 사실이겠어서요. 그래서 '고전'이라고 퉁쳐놓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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