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가르닉 위령제
아주 작은 접점에서 관찰된 모습은 숟가락으로 살짝 눌러 동글납작하게 만들고 돌려 구우면 버터 향이 천천히 올라옵니다 녹진합니다
종이로 된 소식들은 비를 맞으며 글자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거죠 우천 시에도 자이가르닉 위령제는 우산 속에서 열리니까요!
일요일 아침이니, 노래 한 곡 어때요
종이에 싼 빵과 튤립 한 다발
영어인지 프랑스어인지가 막 적힌 신문 한 부에
샹송이 좋겠네요
아무래도 신청주의니까요
나는 오래된 재생기입니다 주로 의미 없는 것들을 재생합니다
한 곡조 한 곡조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집니다
지난 일은
지난 일,
여태 말로 태어나지 못한 것들이 옹송그려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것들도 같이 구워줍니다 살짝 둥글고 살진 흰 엉덩이들, 우린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정말 그럴까?
발에 채이고 젖어 찢어진 비 오는 날의 무가지를 기억하나요? 테이프 엉키는 건 순식간이죠 단 한순간에 끌려들어 갑니다 숨 막히는 습기 찬 대기 속 먼지 섞인 둥근 얼룩들의 냄새가 지금 당장 콧속을 명료히 떠돌고 있습니다 밀려오는 없는 것들의 끓어오르는 노심으로, 그 한가운데로
떠밀려가는 홍수, 태풍, 공습, 무엇이든간에 경보! 붙잡을 기둥이 없는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준비해 두었던 몇 마디 대사를 외쳐봅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고장 난 재생기처럼
그러면 이미 세상에 없는 마음들과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일들이 무대 뒤에서 잠시 시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태풍의 눈으로 상냥히 나를 들여다봅니다
누구?
이제 다 노릇하게 구워졌습니다
뒤집을 때가 되었습니다
# 태이, 시와 지성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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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1주년을 맞는 아침 :
진은영의 '청혼'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아침입니다. 세월호 11주년, 작년에도 10주년을 맞아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본 적 있었는데 또다시 그 시간을 맞이합니다. 고갱의 제목처럼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철학적 물음 앞에서 시인들은 늘 고뇌하고 늘 사색하고 늘 치열히 도전하면서 좌절하고 또다시 이를 극복하며 한 걸음씩을 더 내딛습니다. 그게 시인들의 삶이요 숙명이자 주어진 책무일 수도 있겠습니다.
날씨가 비교적 차갑습니다. 오늘 아침 기온 역시 오 도라는 기록적 수치를 나타내는데, 환경의 변화를 비단 사람들의 탓만으로 돌리기엔 너무 늦은 감도 없지 않아서 이를 어떻게 돌려세울까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시대인 것 같습니다. 트럼프 정부가 내놓은 관세정책으로 온 세계가 죽 끓듯 이 난리인데도 무사태평히 자기 영업이익만을 좇는 자들도 있어 이를 일컬어 '자본'이라는 단어를 쓰곤 합니다. 바야흐로 '자본주의'인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를 쓴다는 일만큼 무책임한 경우도 드물 것인가를 또다시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진은영 시인은 지난 시기의 세월호 사태를 겪으면서도 이를 "나는 시인이 아닌 한 시민으로서 봉사한다"는 말로 대답한 적 있었습니다. 어쩌면 시인들한테도 시인이라는 타이틀 외에 별도로 부여된 '시민'이라는 책무 역시 묵과해선 안될 부분이겠어서 굳이 한 마디를 더 적어두려고 합니다. 그 둘 중에서 무엇이 먼저일까를 논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둘 중 어느 하나도 불필요하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제가 이 글을 연재하면서 어쩌면 최초로 (이미 "메이저 등단"을 한 걸출한 동인도 있어서 이를 제외한다면) 동인 시를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이번 시의 주제는 어쩌면 '첫사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이가르닉' 효과는 한 마디로 말해 "미완성 상태가 지속되면서 갖는 긴장이 불러일으키는 지배적인 심리" 효과일 수 있겠는데, 특히 그 일이 매우 중요한 부분일 경우에는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의 '영원성'까지 부여될 법합니다. 어떤 이한테는 불멸의 '사랑'일 테며, 또 어떤 이한테는 크디큰 좌절을 겪어야만 했던 '희망' 내지 '전망'에 관한 사실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시인들한테도 이와 비슷한 '운명' 같은 게 평생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시인은 무언가를 굽고 있습니다. "버터 향이 천천히 올라"오는 "녹진"한 모습의 그것은 "우천 시에도" "주로 의미 없는 것들" 중 하나인 것처럼 "재생"하는 "지난 일"의 일부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 "지난 일"은 "여태 말로 태어나지 못한 것들"이며, 그래서 "침묵"하고 또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건 "없는 것들의 끓어오르는 노심"일 뿐입니다. 때로는 반성이 필요했던 일이기에 "내가 잘못했어!" 하며 외치기도 하지만, "이미 세상에 없는 마음들과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일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누구?"라는 첫인사로 되돌아섭니다. 일종의 순환체계를 갖는 이 알레고리야말로 어쩌면 시인의 '숙명'과도 같을 일을 대변하는 역할을 합니다.
때때금 시인의 삶 전체를 "시지프스의 신화"로도 표현하곤 합니다만, 그 쳇바퀴 같은 인생에서도 가끔 오아시스처럼 건져낸 빛나는 서정과 독자들의 힘을 얻는다면 어쩌면 시인만큼 축복받은 삶을 사는 이들도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갖습니다. 한강 시인이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에서도 밝혔듯이 "수많은 일인칭들을 경험한 경이의 순간"을 기억하는 시인들이라면 아마도 평생 그 순간들을 잊지 못할 것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반대로, 독자들은 그런 시인들을 조우하는 순간순간들마다를 평생 기억하고도 남을만한 아주 멋진 일일 테지만요.
세월호 11주년의 아침에 꺼내보는, 시인과 독자의 '만남' 내지는 '사랑'에 관한 첫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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