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266

맹재범, '여기 있다' (2024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베껴쓰고 다시읽기]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는 말 : 여기 있다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

문학노트 2024.01.02

송진권, "원근법 배우는 시간' (한 해의 작도법을 접어놓는 차례)

[베껴쓰고 다시읽기] 한 해의 작도법을 접어놓는 차례 : 원근법 배우는 시간 빼빼 마른 여자가 바닥에 화구를 펼쳐놓고 앉아 있는 집입니다 모르는 돌과 꽃에서 뽑아낸 안료를 색색으로 펼쳐놓고 여자는 처음 보는 새 한 마리를 그려냅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포개지고 겹쳐집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새떼입니다 몇 마리나 되겠냐고 여자는 묻습니다 대답을 못 합니다 덧칠한 그림 위에 또 덧칠된 새들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는 천천히 화구를 걷습니다 문을 닫고 밖을 나옵니다 방 안은 깃 치는 소리 지저귀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옵니다 구름들 지붕들이 쏜살같이 그 집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 새들이 퍼덕이며 날아오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

문학노트 2023.12.29

오규원, '겨울 나그네' (<현대시작법>을 능가할 레토릭에 관하여)

[베껴쓰고 다시읽기] 을 능가할 레토릭에 관하여 : 겨울 나그네 지난 겨울도 나의 발은 발가락 사이 그 차가운 겨울을 딛고 있었다. 아무데서나 심장을 놓고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있었다. 그 곁에서 계절은 귀로를 덮고 있었다. 모음을 분분히 싸고 도는 인식의 나무들이 그냥 서서 하루를 이고 있었다. 지난 겨울도 이번 겨울과 동일했다. 겨울을 밟고 선 내 곁에서 동일했다. 마음할 수 없는 사랑이며, 사랑... 내외들의 사랑을 울고 있는 비둘기 따스한 날을 쏘고 있는 곁에서 동일했다. 모든 나는 왜 이유를 모를까. 어디서나 기우뚱, 기우뚱 하며 나는 획득을 딛고 발은 소멸을 딛고 있었다. 끝없는 축복 떨어진 것은 한대로 다 떨어지고 그 밑에서 무게를 받는 일월이여 모두 떨어져 엄숙히 쌓인 위로 감당할 ..

문학노트 2023.12.27

박준, '숲' (바다가 있던 숲의 기억, 12월 마지막 주)

[베껴쓰고 다시읽기] 바다가 있던 숲의 기억, 12월 마지막 주 : 숲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 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문학노트 2023.12.26

나태주, '화이트 크리스마스'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일)

[베껴쓰고 다시읽기]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일 :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 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문학노트 2023.12.24

박형준, '동지' (영하 20도의 "동지")

[베껴쓰고 다시읽기] 영하 20도의 "동지" : 동지 어느 추운 겨울밤, 머언 옛날이었습니다. 서울역 지하도에 할머니가 박스로 城을 만들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계단으로 눈발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무를 밭에서 막 뽑아낸 듯 사정없이 바람이 허벅지를 도려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갈 곳이 없어 할머니의 성에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습니다. 그 안엔 한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성 담벼락, 할머니의 등뒤에 쪼그려앉아 밀려드는 졸음을 참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느새 나를 향해 돌아앉아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성냥을 그을 때마다 계단으로 밀려드는 눈발이 새벽의 어둠속에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품안에 돋아나는 불꽃이 저의 곱은 손과 차디찬 허벅지에 흰 속살인 듯 속삭이고 있었..

문학노트 2023.12.22

김해자, '꽃잎 세탁소' (그래도 여전히 '양대산맥'... 창비시선의 고군분투)

[베껴쓰고 다시읽기] 그래도 여전히 '양대산맥'... 창비시선의 고군분투 : 꽃잎 세탁소 꽃양귀비 붉은 꽃잎 위에 청개구리가 엎드려 있어서 나도 납작 엎드려 뭐 하나 들여다봤더니, 제 목울대로 꽃의 주름을 펴는 게 아닌가, 그 호박씨만 한 것이 앞발 뒷발로 붉은 천 꽉 부여잡고 꽈리 풍선 불어가며 다림질하는 동안 내 마음도 꽃수건처럼 펴지고 있었다 개망초 하얀 꽃잎 위에 나비가 날개를 접고 있어서 나도 땅두릅 그늘 아래서 올려다봤더니, 계란 노른자 같은 꽃술을 빨아대는 것이 아닌가, 그 상추씨만 한 입으로 꽃잎을 빠는 동안 하얀 베갯잇 같은 구름이 간지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하늘이 갓 세수한 듯 말개지고 있었다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어제는 문지 시인선 594호 소식을 전했는데 오늘..

문학노트 2023.12.18

박세미, '뒤로 걷는 사람' (문지 시인선 594호의 위용)

[베껴쓰고 다시읽기] 문지 시인선 594호의 위용 : 뒤로 걷는 사람 그에게 세상은 한 발자국씩 넓어지는 것이었다 한 발자국씩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가 걸을 때 옆에서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한 발자국, 사과나무는 불타며 두 발자국, 사과나무는 검게 식으며 세 발자국, 사과나무는 썩은 사과 한 알이 되며 네 발자국,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더러 썩은 사과 한 알이 눈에 맴돌 때면 눈을 감고 이리저리 굴려 녹여 없앴다 그는 최소화된 것들과의 이별에 익숙했다 눈이 오던 어느 날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점이 있었다 그가 한 발자국씩 뒤로 갈 때마다 점은 세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오며 커지더니 다리를 뻗고 손을 흔들며 마침내 웃어 보였다 달려오던 점은 그의 코앞에서 최대화가 되었다..

문학노트 2023.12.17

최하림, '컬럼버스여 아메리고여' (편집은 기억을 단절시킨다)

[베껴쓰고 다시읽기] 편집은 기억을 단절시킨다 : 컬럼버스여 아메리고여 바람 센 지방에서는 지치고 시달린 사나이들이 오랜 날의 바다로 나와 밤 별이 성성한 거리를 걷는다 바다의 비늘에 어린 아주 순수한 소리를 들으며 소리 속으로 들어간다 한 줄의 도로가 흐르는 소리 속으로 소리의 밑바닥에는 쥐들의 짹짹이는 소리 들리고 굶주림이 들리고 쓴 슬픔을 토해내면서 해안의 개들이 컹컹 짖는다 그 개들의 검디검은 울음이 분별할 수 없는 피부를 물들이면서 이방의 거리를 헤매게 하고 언제나 이방인이게 하고 비열함으로 이루어진 걸음을 흔들면서 사방의 나무잎처럼 있는 그대들의 모습 무얼하고 있는가 그대들이여 무얼하고 있는가 그대들이여 개짖는 소릴 듣는가 그대들을 뒤쫓는 소리가 아닌가 쫓기고 쫓겨서 극지로 가거라 그곳의 풍습..

문학노트 2023.12.16

박정대, ‘음악들’ (‘모작’의 한 형태, 화답시)

[베껴쓰고 다시읽기] ‘모작’의 한 형태, 화답시 :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박정..

문학노트 2023.12.15

박준, '바위' (빼어난 문장, 다음 그리고 또 다음...)

[베껴쓰고 다시읽기] 빼어난 문장, 다음 그리고 또 다음... (박준, 바위) : 바위 마름 없는 물이 흘러나오던 바위 아래에는 녹빛의 작은 소沼도 하나 있었습니다 밤이면 아이들이 서로의 서투름을 가져와 비벼대었고 새벽에는 무구巫具들이 가지런히 놓이던 곳입니다 촛농과 술병과 인간의 기도와 아린 혀 들이 오방으로 섞였습니다 어느 해 겨울부터 바위에는 부처가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한 젊은 무당이 그려두고 간 부처의 그림이 가부좌를 틀고 잔설을 덮고 있던 것입니다 비와 눈이 많았던 몇 해가 더 지나자 아이들은 바위 앞에 겁을 벗어두고 시내로 떠났습니다 빛에 바랜 부처의 상반신이 먼저 지워졌고 무당들도 바위로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위에 그려진 부처 그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이 넓어지려 넓어진 것이 아니고 물..

문학노트 2023.12.14

박정대, '내 청춘이 지나가네' (불혹, 다음)

[베껴쓰고 다시읽기] 불혹, 다음 : 내 청춘이 지나가네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 박정대, 삶이라는 직업 (문지, 20..

문학노트 2023.12.13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문창과도 신춘문예도 아닌, 작가들의 '졸업장'은?)

[베껴쓰고 다시읽기] 문창과도 신춘문예도 아닌, 작가들의 '졸업장'은?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 파일명 서정시* 그들은 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줌 손톱 몇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

문학노트 2023.12.12

박준, '겨울비' (이른 새벽을 찾아온 손님, 겨울비)

[베껴쓰고 다시읽기] 이른 새벽을 찾아온 손님, 겨울비 (박준, 겨울비) : 겨울비 비는 당신 없이 처음 내리고 손에는 어둠인지 주름인지 모를 너울이 지는 밤입니다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광장으로 마음은 곧잘 나섰지만 약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는 일이 오늘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귓병을 안도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고 끓인 물을 식히려 두어 번 저어나가다 여름의 세찬 빗소리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나중의 일이 되었습니다 *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지, 2018) 새벽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습니다. 날씨가 제법 이상고온을 기록하더니 영락없는 겨울비인 듯합니다. 얼마전에 재회한 한 친구로부터 이사 소식을 들어 잠에서 깨자마자 대뜸 걱..

문학노트 2023.12.11

황지우, '길' (인생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베껴쓰고 다시읽기] 일생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 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문지, 1990) ... "사람들은 희망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거짓말한다. 나는 폐인이 되고 싶다. 나는 완성하고 싶다." "희망의 대답은 대개 둘 중의 하나다. 즉 길흉 중의 하나이다. 이 삶을 다시 살고 싶다고 후회할 때, 그때는 이미 삶을 상당히 살아버린 뒤이다. 거짓말은 끊을 수 없는 유혹이어서 세상에서..

문학노트 2023.12.09

천서봉, '닫히지 않는 골목' - 붉은 집 ('잔인한 일상' 속에서의 감정을 다루는 방식)

[베껴쓰고 다시읽기] '잔인한 일상' 속에서의 감정을 다루는 방식 : 닫히지 않는 골목 - 붉은 집 붉은 집에 사는 여자에게는 어린 남자가 가끔씩 찾아온다 소문에 의하면 여자는 매형의 정부였는데 어린 남자는 찾아올 때마다 누군가의 뼈 한마디씩을 그녀에게 주고 간다는 것이다 누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이 골목을 떠나 돌아오지 못했고 대신 정부를 들인 매형도 몇 해를 더 살지 못했다 집 앞 동산에 묻힌 매형의 무덤에는 누군가 매해 다녀간 흔적이 있지만 누가 다녀가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린 남자가 누구인지 붉은 비 여자는 뼈마디로 또 무엇을 짓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집은 해가 더할수록 점점 더 붉어지고 있다 * 천서봉,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문학동네, 2023) ... '잔인한 일상' ..

문학노트 2023.12.08

김소연, '먼지가 보이는 아침' (이과적 글쓰기가 문과적 감상문을 마주할 때)

[베껴쓰고 다시읽기] 이과적 글쓰기가 문과적 감상문을 마주할 때 (김소연, 먼지가 보이는 아침) : 2014 신춘문예의 중앙일간지 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는 지방일간지들 일부의 잔여일정만을 남겨놓은 첫 아침인데, 오늘 꺼내놓는 시는 김소연 시인의 시집 중에서 골랐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이윤수의 '먼지가 되어'라는 곡을 참 좋아했던 기억이 있는데, 비슷한 제목이 시예요.) 글쓰기의 형태 역시 다시 원래의 시 한 편을 놓는 방식대로 회귀하였으며, 여전히 아침은 촉박하기만 합니다. 김소연 시인이 가장 최근에 주요 공모전 심사들을 맡아온 이력들도 있기 때문에 그 '스타일'에 대해서도 한번쯤 짚어두시라는 측면을 함께 내포합니다. 말의 유희, 간결한 어체, 상징적으로 그려낸 삽화들, 입체감을 갖는 시어들 중에..

문학노트 2023.12.07

신춘문예 D-1.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10선 (#6~#10)

신춘문예 D-1.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10선 :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변신, 회복기의 노래, 사평역에서, 이사) 6. 목재소에서 (박미란)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신새벽, 새떼들의 향그런 속살거림도 가지 끝 팔랑대던 잎새도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잠 덜 깬 나무들의 이마마다 대못이 박히고 날카로운 톱날 심장을 물어뜯을 때 하얗게 일어서는 생목의 목쉰 울음 꿈 속 깊이 더듬어 보아도 정말 우린 너무 멀리 왔어 눈물처럼 말갛게 목숨 비워 몇 밤을 지새면 누군가 내 몸을 기억하라고 달아놓은 꼬리표 날마다 가벼워져도 먼 하늘 그대, 초록으로 발돋움하는 소리 들릴 때 둥근 목숨 천천히 밀어올리며 잘려지는 노을 어둠에..

문학노트 2023.11.29

신춘문예 D-2.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10선 (#1~#5)

신춘문예 D-2.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10선 : 1.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 (신동엽) 당신의 입술에선 쓰디쓴 물맛이 샘솟더군요, 잊지 못하겠어요. 몸양은 단 먹뱀처럼 애절하구 참 즐거웠어요, 여름날이었죠. 꽃이 핀 高原 은 난 지나고 있었어요. 무성한 풀섶에서 소와 노닐다가, 당신은 꽃으로 날 불렀죠. 바다 언덕으로 나가고 싶어요. 밤하늘은 참 좋네요. 지금 地球는 旅行을 한다나요? 冠座星雲 좀 보세요. 얼마나 먼 세상일까요....... 기중 넓은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럼 그의 바깥엔 다시 또 딴마당이 없는 것일까요? 자, 손을 주세요 밤이 깊었어요. 먼저 쉬세요. 못잊으려나 봐요-우리가 抱擁턴 하늘에 솟은 바위, 그 밑에 깔린 구름 불 달은 바위 위에서 웃으며 잠들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던..

문학노트 2023.11.28

신춘문예 D-2. 현대시인 20선 (#11~#20)

신춘문예 D-2. 현대시인 20선 : (황지우, 박노해, 이성복, 정호승, 김명인, 나희덕, 장석남, 황인숙, 백무산, 진은영) 11. 간절기 (김경주) 엄마는 아직도 남의 집에 가면 몰래 그 집 냉장고 안을 훔쳐본다 그런 날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유 없이 화를 내던 엄마의 일기를, 고향에 가면 아직도 훔쳐보고 있다 궁금해지면 조금 더 사적이게 된다 애정도 없이 내 입술이 네 입술을 떠난다 너는 카페만 가면 몰래 스푼을 훔친다 우아한 도벽은 엄마의 철자법처럼, 걸인의 차양모자처럼 생기가 있다 세상의 기사(記事)들은 모두 여행기다 내일이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특종들, 사건 뒤에 잊힌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닌 적이 있다 나는 네 가계(家系)에 속해 있다 매일 사라질 가계를 다루고 떠나는 나의 행간은..

문학노트 2023.11.28

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1~#10)

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 1. 게 눈 속의 연꽃 (황지우) 1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 2 게 눈속에 연꽃은 없었다 普光의 거품인 양 눈꼽낀 눈으로 게가 뻐..

문학노트 2023.11.27

신춘문예 D-4. 세계/조선/한국일보 신춘문예

신춘문예 D-4. (중앙일간지 리뷰, 5/6//7) 세계/조선/한국일보 신춘문예 : 이제 올해 신춘문예도 그 막바지 단계에 접어드네요... 주말특집인 관계로 나머지 세군데의 신춘문예를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세계/조선/한국일보) 세계일보, 조선일보 및 한국일보까지의 최근 5년간 당선작 및 심사평 요약입니다. ; 1) 세계일보 2019년 : 박신우,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 (심사 - 천양희, 최동호) "「풍선론」은 이미지도 분명하고 시적 언어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는 옥탑방의 화자를 통해 발견이라는 새로움을 무리 없이 전개하고 있었다. 먼저 시적 완성도라는 점에서는 「풍선론」이 앞서 있었으나 그로 인해 발전 가능성은 작아 보였고 마지막 결말의 처리가 추상적이..

문학노트 2023.11.26

신춘문예 D-5. 서울신문 신춘문예

신춘문예 D-5. (중앙일간지 리뷰, 4/7) 서울신문 신춘문예 : 거리에서, 너에게, 말하지 못한 내 사랑, 그리고 나무... 김광석이 있었습니다. 문득 동영상 한 편을 찾아 틀고선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저께는 점심시간에 문득 생각이 나서 대학로를 찾았고 학전 앞에서 한참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전의 대구에서도 그랬나 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그리워하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회복기의 노래, 사평역에서, 이사, 목재소에서, 그리고 볼트... 신춘문예가 있었습니다. 인생에서의 시 한 편도 그런 부분일 것으로 늘 믿어온 편입니다. 어느 한 시절을 대변할 그 시편과 그 시인의 삶들을 늘 그리워했나 봅니다. 어쩌면 이 부분 역시 앞으로도 누군가..

문학노트 2023.11.25

신춘문예 D-6. 문화일보 신춘문예

신춘문예 D-6. (중앙일간지 리뷰, 3/6) 문화일보 신춘문예 : 새벽녘에야 비로소 제법 늦어진 평론을 탈고하였습니다. 제목을 고쳤는데 "시대를 넘어서는 '신서정'과의 대화 : 그 오래된 미래"로 하였고요. 중앙일간지 리뷰를 계속 이어서 쓰려 하니, 벌써 새벽 네 시를 넘어섰네요? 좀 서두르겠습니다. 우선 최근 5년간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및 심사평들을 요약해봅니다. ; 2019년 : 조온윤,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심사 - 정호승, 김기택) "이 시는 지상의 수많은 삶과 죽음을 자신의 몸으로 겪어낸 것 같은 할머니가 자신의 마지막을 풍경화처럼 바라보는 시선과 개개의 삶을 넘어 생태계에 각인된 기억에 따라 움직이는 호랑이의 시선을 교차시키고 있다. 서로 얽히면서 소멸되어가는 두 시선은 자연의..

문학노트 2023.11.24

신춘문예 D-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신춘문예 D-7. (중앙일간지 리뷰, 2/8) 동아일보 신춘문예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는 신춘문예는? 1915년의 매일신보였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서울신문이 되겠군요. 정식으로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게 1920년, 동아일보에서 최초로 '신춘문예' 타이틀을 걸고 시작한 해가 1925년이므로 이제는 거의 백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합니다. (조선일보는 1928년부터 시행했다고 합니다.) 그 역사만큼이나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도 기라성 같은 면면을 자랑해온 편이죠. 또 여전히 가장 명성이 높고 영향력도 큰 곳들 중 하나예요. 그만큼 경쟁률 또한 가장 치열하기도 하고요. 유독 심사평들도 매우 쌀쌀맞기만 합니다. 동아일보의 최근 5년간 신춘문예 당선작 및 심사위원들..

문학노트 2023.11.23

신춘문예 D-8. 경향신문 신춘문예

신춘문예 D-8. (중앙일간지 리뷰, 1/8) 경향신문 신춘문예 : 이제 신춘문예도 불과 8일밖에 응모기간이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8일은 각 중앙일간지별로 주요 이력 및 시사점 등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해 공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일명 '총정리' 기간에 해당될까요?) 해당 신문사들은 가나다 순으로 해서 경향, 동아, 문화, 서울, 세계, 조선, 한국, 한국경제 등이며 특히 경제지임에도 당대의 최고 가객 중 한 명인 진은영 시인이 심사를 맡은 한국경제까지를 포함하여 총 여덟 군데입니다. 습작량이 많은 분들이라면 총 40~50편 정도로 각 신문사를 모두 다 도전해볼 수도 있겠네요... 그 첫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경향신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경향신문의 최근 5년간 신춘문예 당선작 및 심사위원들의 심사평 ..

문학노트 2023.11.22

신춘문예 D-9. 녹번동 (이해존)

신춘문예 D-9. 녹번동 (이해존)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놓았다 네모를 그려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 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내린다 무릎 꺾인..

문학노트 2023.11.21

신춘문예 D-10. 사평역에서 (곽재구)

신춘문예 D-10.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 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

문학노트 2023.11.20

신춘문예 D-11. 회복기의 노래 (송기원)

신춘문예 D-11.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회복기의 노래 (송기원) 1 무엇일까. 나의 육체를 헤집어,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것들은. 육체 중의 어느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차라리 무섭고 죄스러운 육체를 바람 속에 내던졌을 때, 그때 바람이 나의 육체에서 꺼낸 것들은.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은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저것들은 무엇일까. 바람을 따라 한없이 풀려나며 버려진 땅, 시든 풀잎, 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어디론가 날려가는 것들은. 저것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든 풀잎들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꽃무더기가 흐드러지고, 죽어있던 소리들이 이슬처럼 깨쳐나 나팔꽃 같은 귓바퀴를 찾아서 비상하고…… 2 누님. 저것들이 정말 저의 육체일까요? 저것..

문학노트 2023.11.19

신춘문예 D-12. 꽃은 봄을 웅성거리지 않았다 (창작동인 뿔)

신춘문예 D-12. 꽃은 봄을 웅성거리지 않았다 (창작동인 뿔) 영원히 비가 오지 않을 세계 아래로 유유히 지나가는 장마들 눈 뜬 채 죽어간 화가의 동맥과 흰 수목의 하엽들과 바람을 긋던 새 떼가 허공에 부서져 썩어가고 있을 때 먼 생을 돌아 한으로 추락하는 숨을 놓친다 자정의 수평선에 먹구름이 돌면 해안가를 따라 휩쓸릴 때까지 떠오르다가 터지는 빛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어서 그곳으로 간다지만 봄은 끝까지 꽃을 살아가고 있다 두 명의 아이는 사라지고 수천만 시간의 바다만 몰아칠 것이다 심장도 찬란히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별들이 몰락하기도 전에 너의 계절이 왔다 *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 짧은 편지 :: 새벽 바람이 거세게 창문을 두드립니다. 가..

문학노트 2023.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