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266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시 같은 산문을 한편 더 읽다)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 같은 산문을 한편 더 읽다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산문 :: 새날이여, 이제 우리를 지난해의 무덤에 덮인 수많은 거짓과 거짓..

문학노트 2023.09.22

강은교, '사랑법' (사랑은 썰물처럼 늘 고요한 법)

[베껴쓰고 다시읽기] 사랑은 썰물처럼 늘 고요한 법 (강은교, 사랑법) :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강은교, "꽃을 끌고" (열림원, 2022) - 치열한 청춘의 시절들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법입니다. 유난히 지독한 사랑을 앓던 시절이 있었습..

문학노트 2023.09.21

이형기, '낙화'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 메모 :: 누군가가 제게 물어본 적 있습니다 '그리움'이 무엇이냐고... 생각해보니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 https://youtu.be/XRQjtQ4VoO4?si=GbODtwOUKk1DTv2w

문학노트 2023.09.19

이정화, ‘골조의 미래’ ('당선작'의 최우선 전제조건 둘)

[베껴쓰고 다시읽기] '당선작'의 최우선 전제조건 둘 (이정화, 골조의 미래) : 골조의 미래 푹신한 의자와 비어 있는 벽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선생이 건네주는 사탕 두 알 공기가 더없이 건조해지고 서서히 등이 굽어질 때 묻는다 - 그 집이 제 것이 맞을까요 수년간 지어온 이 집엔 각별한 애정이 있지만 한 발만 들여도 금세 다시 지어야 할 만큼 형편없다 - 전 애인이 가져다준 벽돌 하나. 지문이 남은 채 굳어버린 시멘트. 이유 없이 생긴 자국들. 망치로 못을 내려칠 때 들었던 노래라든가. 한순간에 닫히는 문은 제 것이 아니었는데. 선생과 나는 동시에 나무 집을 만들어간다 니스칠 된 벽이나 바람이끼어들 수 없는 단단함을 떠올리며 코앞 사탕에 손을 뻗는다 사탕 껍질을 벗겨내 입안에 굴린다 - 함께 벽지를 발..

문학노트 2023.09.18

안재찬, '생활' (밀리언셀러 시인 류시화의 등단작)

[베껴쓰고 다시읽기] 밀리언셀러 시인 류시화의 등단작 (안재찬, 생활) : 生活 窓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어둠의 門을 열고 맨 처음 세상으로 나온 아이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아침은 소리없이 움직임만으로 와서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 四方에서 입술을 부비며 스며든다. 손바닥 위에 놓인 生의 조각들을 쪼아먹는 소망의 뜰에 내린 새 몇마리 앉아있다 날아간 자리 버리고 남은, 버릴 수 없이 슬픈 이야기들은 모두 지난 밤의 꿈으로 문질러두고 지금 窓을 닦고 있는 내 손길 아래 세상의 어느 한 곳이 닦여지고 있다. 톱밥처럼 흩어지는 日常의 책장들 良識은 굳은어깨뼈처럼 튼튼하지 못하고 길모퉁이에 잠복해 있는 먼지의 덫, 보이지 않는 손들의 굴레 一部分씩..

문학노트 2023.09.15

박미란, '목재소에서' (등단을 해도 첫 시집은 또 20년)

[베껴쓰고 다시읽기] 등단을 해도 첫 시집은 또 20년 (박미란, 목재소에서) : 목재소에서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신새벽, 새떼들의 향그런 속살거림도 가지 끝 팔랑대던 잎새도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잠 덜 깬 나무들의 이마마다 대못이 박히고 날카로운 톱날 심장을 물어뜯을 때 하얗게 일어서는 생목의 목쉰 울음 꿈 속 깊이 더듬어 보아도 정말 우린 너무 멀리 왔어 눈물처럼 말갛게 목숨 비워 몇 밤을 지새면 누군가 내 몸을 기억하라고 달아놓은 꼬리표 날마다 가벼워져도 먼 하늘 그대, 초록으로 발돋움하는 소리 들릴 때 둥근 목숨 천천히 밀어올리며 잘려지는 노을 어둠에도 눈이 부시다 #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문학노트 2023.09.14

임후성, ‘볼트’ ('관록'의 힘과 스스로 겨루고자 한 '순수'한 내면의 깊이)

[베껴쓰고 다시읽기] '관록'의 힘과 스스로 겨루고자 한 '순수'한 내면의 깊이 (임후성, 볼트) : 볼트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

문학노트 2023.09.13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미래의 '여성성'에 관한 한 조언)

[베껴쓰고 다시읽기] 미래의 '여성성'에 관한 한 조언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서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강은교, “풀잎” (민음, 1974) - 대한민국에..

문학노트 2023.09.13

양안다,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대산문학상, 김수영, 그리고 신춘문예)

[베껴쓰고 다시읽기] 대산문학상, 김수영, 그리고 신춘문예 (양안다,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내가 내 문제를 끝낼 수 있게 도와줘. 우리가 혼절한 단어를 너무 많이 받아 적었잖아. 우리는 해롭고 틀린 방식으로 기절합니다. 새벽이면 우리의 방에 청색 리듬이 필요합니다. 등불이 밤새도록 헤엄치고. 목구멍은 가끔 악기가 되어서. 슬픔에 잠긴 돌, 이름을 붙여줄까요? 중력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무너지는 집을 떠나야죠. 척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유연함은 우리의 전공입니다. 그래요. 새벽에 적응하지 못한 짐승이 졸도하는 시간이에요. 어두운 숲에서 눈뜨고 잠든 건 나무가 아니라 우리였습니까? 짐승이 되는 꿈은 해일을 일으킨다. 악몽은 당신을 가파른 협곡으로 몰아붙인다..

문학노트 2023.09.05

원동우, ‘이사’ (사소한 리얼리티와 ‘일상성’)

[베껴쓰고 다시읽기] 사소한 리얼리티와 ‘일상성’ (원동우, 이사) : 이사 아이의 장난감을 꾸리면서 아내가 운다 반지하 네평 방을 모두 치우고 문턱에 새겨진 아이의 키눈금을 만질 때 풀석 습기찬 천장벽지가 떨어졌다 아직 떼지 않은 아이의 그림 속에 우주복을 입은 아내와 나 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 아버님은 아랫목에서 주무시고 이쪽 벽에서 당신과 나 그리고 천장은 동생들 차지 지난번처럼 연탄가스가 새면 아랫목은 안되잖아, 아, 아버지 생활의 빈 서랍들을 싣고 짐차는 어두워지는 한강을 건넌다 (닻을 올리기엔 주인집 아들의 제대가 너무 빠르다) 갑자기 중력을 벗어난 새떼처럼 눈이 날린다 아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웃음을 그치면 중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많은 날들 위에 덜컹거리는 서랍들이 떠다니고 있다 눈..

문학노트 2023.08.30

곽재구, '사평역에서' ('음악'과 '미술' 사이, 시의 본래적 위치)

[베껴쓰고 다시읽기] '음악'과 '미술' 사이, 시의 본래적 위치 : 郭在九, '沙平驛에서' 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待合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琉璃窓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內面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靑色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歸鄕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 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和音에 귀를 적신다 子正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문학노트 2023.08.17

박준, '여름의 일' (과거의 '회상'으로부터 미래의 '예견'까지)

[베껴쓰고 다시읽기] 과거의 '회상'으로부터 미래의 '예견'까지 (박준, 여름의 일) : 여름의 일 - 묵호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함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서 우리가 자주 격랑을 보던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비가 쏟고 걸음이 질척이다 멎고 마른 것들이 다시 젖을 때의 일입니다 배를 타고 나갔던 사내들이 돌아와 침과 욕과 돈을 길바닥으로 내던질 때의 일입니다 와중에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어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 때의 일입니다 아니 갈 곳 없는 이들만 떠나가고 머물 곳 없는 이들만 돌아오던 때의 일입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한동안 눈을 감고 있는 일로 당신으로부터 조금 이르게 멀어져..

문학노트 2023.08.11

임동확, '섬진강의 돌' (담담한 어조, 치열한 독백)

[베껴쓰고 다시읽기] 담담한 어조, 치열한 독백 (임동확, 섬진강의 돌) : 섬진강의 돌 한 연대의 멱살을 거머쥔 채 흐르는 강물로 흐르지 않는 풍경을 적시며 지금 섬진강은 골고루 노을 빛으로 깨어나고 있다. 사랑하는 정아, 저 징검다리 건너 몇구비 물목을 지나 희고 둥근 조약돌들이 모래 무지 처럼 살아 있다. 그리하여, 하류에서 상류까지 물장구치며 파닥인다, 뛰쳐오른다, 방향을 잡는다, 그리고 균형을 취하며 정확히 목표물에 내려 앉는다. 바로 이게 사랑의 시작이다. 그런대로 모난데 없이 안정된 형상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람과 함께 떠 다녔으며, 또 얼마나 수고로운 인욕과 침묵이 필요했던가 물으며 돌을 집는다. 사랑은 늘 그런 아픔과 그리움을 한 없이 낮은 곳으로 이동시키는것. 잊지 말자,..

문학노트 2023.08.10

박정대, '음악들' (현대시에서의 '낭만'을 이야기하려거든)

[베껴쓰고 다시읽기] 현대시에서의 '낭만'을 이야기하려거든 (박정대, 음악들) :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

문학노트 2023.08.09

박노해, ‘가리봉 시장’ (“노동자”에서 ‘비정규직/알바’로, “무산계급”에서 ‘자영업/긱경제’로)

[베껴쓰고 다시읽기] “노동자”에서 ‘비정규직/알바’로, “무산계급”에서 ‘자영업/긱경제’로 (박노해, 가리봉 시장) : 가리봉 시장 가리봉 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전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긴 노동 속에 갇혀 있던 우리는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깔깔거리고 껀수 찾는 어깨들도 뿌리뽑힌 전과자도 몸부벼 살아가는 술집여자들도 눈을 빛내며 열이 오른다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 시장을 찾아 친한 친구랑 떡볶이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기분나면 살짜기 생맥주 한 잔이면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고 천오백원짜리 티샤쓰 색깔만 고우면 친구들은 환한 내 얼굴이 귀티난다고 한다 하루 14시간 손발이 퉁퉁 붓도록 유명브..

문학노트 2023.08.08

이제니,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구체시 제1호'에 얽힌 추억, 독일 구체시 70년)

[베껴쓰고 다시읽기] '구체시 제1호'에 얽힌 추억, 독일 구체시 70년 (이제니,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오후의 오로라 오지 않는 비행선 우비는 젖지 않는다 없는 들판의 없는 얼굴 내리지 않는 비를 맞는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길은 물든다 날개 잃은 벌레 입속에 담긴 편지 미세레레 미세레레 여백에서 들리는 노래 몰약처럼 빛나는 눈동자 아직도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아직도 나와 같은 단어를 쓰나요 유리잔 바닥에 가라앉은 녹차 찌꺼기 머릿속을 떠도는 마이너의 피아노 음계 길게 흰 줄을 그으며 날아가는 어제의 비행운 손끝에서 푸른빛이 나온다면 어디를 가리키게 될까 땅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 물방울의 행렬 춥고 그리운 우기의 맛 물고기 가면을 쓰고 걸어가는 우기의 복화술사는 입을 다..

문학노트 2023.08.07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뛰어난 문장’이라는 말, 시인의 산문 쓰기)

[베껴쓰고 다시읽기] ‘뛰어난 문장’이라는 말, 시인의 산문 쓰기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어둠을 겹쳐 입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이 흘러나와 더 자라지 않는,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며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 천변의 소똥 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어슬렁 어슬렁 낮아지는 저녁해에 나를 넣고 키 큰 옥수수밭 쪽으로 사라져간다 퇴근하는 한 떼의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 소리에 맞춰 피멍울 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 낮게 어스름에 잠겨갈 때, 손자를 업고 나온 천변의 노인이 달걀 껍질을 벗기어 먹여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문학노트 2023.08.07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김수영의 시론과 변증법적 상상력, '화엄'과 '자본' 사이

[베껴쓰고 다시 읽기] 김수영의 시론과 변증법적 상상력, '화엄'과 '자본' 사이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삼 도 영하 이십 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 도 영상 십삼 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

문학노트 2023.08.06

진은영, ‘청혼’ : 감각적 사물들이 서정을 빛내는 순간

[베껴쓰고 다시읽기] 감각적 사물들이 서정을 빛내는 순간 (진은영, 청혼) :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 계간 , 2014년 가을호 - “가장 아름다운 시”라는 찬사를 들으며 지난해에 열렸던 창비의 제24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작품입니다. ..

문학노트 2023.08.04

시리즈, “베껴쓰고 다시읽기” (목록)

최근에 쓴 일련의 시리즈들 중 아무래도 가장 친숙할 법하며 또 자주 시도한 글쓰기는 다름아닌 ‘시평’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 한 편의 시를 놓고서 작가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는 건 사실 꽤 무리라고도 생각하는 편인데, 부득이하게도 짧은 지면과 제한된 시간 탓에 그렇게 글을 쓸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도 했어요. 아무튼, 그동안 몇 편의 글을 유사한 형태로 써놓았던 게 있어 우선은 그것들부터 좀 정리해두려 합니다. (사실 어쩌면 이런 류가 제겐 일종의 ‘시인열전’과도 같은 역할이지 않을까도 해서) ; :: 베껴쓰고 다시읽기::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는 ‘구도와 헌신’ (이제니,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https://dante21.tistory.com/m/4127 이제니,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분노와 슬픔’을 ..

문학노트 2023.08.04

나희덕, "가능주의자" (2022년 제30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2022년 제30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 나희덕, 가능주의자 http://www.daesan.or.kr/business.html?d_code=3327&uid_h=504&view=history 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예심에서 선정된 9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본심에서 1, 2차 심사를 통해 나희덕의 『가능주의자』, 송재학의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신용목의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www.daesan.or.kr "나희덕의 "가능주의자", 송재학의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신용목의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신철규의 "심장보다 높이", 이수명의 "도시가스"가 최종심 대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지속과 변이 사이의 균형을 지키면서 스스로를 진화시켜온 나희덕..

문학노트 2023.08.02

김언, "백지에게" (2021년 제29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2021년 제29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 김언, 백지에게 http://www.daesan.or.kr/business.html?d_code=3327&uid_h=484&view=history 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예심에서 선정된 9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본심에서 1, 2차 심사를 통해 김승희의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김언의 『백지에게』, 김현의 『호시절』, 백은선의 『도움 받는 www.daesan.or.kr "김승희의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김언의 "백지에게", 김현의 "호시절", 백은선의 "도움 받는 기분"이 최종심 대상작으로 올랐다. 단어나 문장을 연쇄적으로 나열하여 자신만의 어휘사전, 단어사전을 만들고 또한 단지 사전을 쓸 뿐만 아니라 문장을 뒤집고 사유하..

문학노트 2023.08.02

김행숙,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2020년 제2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2020년 제2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 김행숙,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https://www.daesan.or.kr/business.html?d_code=3327&uid_h=483&view=history 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문학과지성사刊), 김행숙 예심에서 선정된 10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본심에서는 1, 2차 심사를 통해 고형렬의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조용미 www.daesan.or.kr "고형렬의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조용미의 "당신의 아름다움", 김행숙의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신해욱의 "무족영원"이 최종심 대상작에 올랐다. 고통의 삶에 대한 반추, 미래를 향한 열기 등의 주제의식이 탁월한 리듬감과 결합하여..

문학노트 2023.08.02

오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 (2019년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2019년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 오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 https://www.daesan.or.kr/business.html?d_code=3327&uid_h=467&view=history 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나는 이름이 있었다』(아침달刊), 오은 예심에서 선정된 10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본심에서는 1, 2예심에서 선정된 10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본심에서 1, 2차 심사를 통해 나희 www.daesan.or.kr "예심에서 선정된 10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본심에서는 1, 2차 심사를 통해 나희덕의 "파일명 서정시", 송재학의 "슬프다 풀 끗혜 이슬", 오은의 "나는 이름이 있었다", 이경림의 "급! 고독"이 최종심 대상작에 올랐다. 언어 탐구와 말놀..

문학노트 2023.08.02

강성은, "Lo-fi" (2018년 제26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2018년 제26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 강성은, Lo-fi https://daesan.or.kr/business.html?d_code=3327&uid_h=459&view=history 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Lo-fi』(문학과지성사刊), 강성은 예심에서 선정된 10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본심에서는 1, 2차 심사를 통해 강성은의 『Lo-fi』, 김정환의 『개인의 거울』, 이영광의 『끝없는 사람』, daesan.or.kr "예심에서 선정된 10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본심에서는 1, 2차 심사를 통해 강성은의 "Lo-fi", 김정환의 "개인의 거울", 이영광의 "끝없는 사람", 허만하의 "언어 이전의 별빛"이 최종심 대상작에 올랐다. 유령의 심상세계와 좀비의 상상력으로 암울하고 ..

문학노트 2023.08.02

서효인, "여수" (2017년 제25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2017년 제25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 서효인, 여수 (2017) https://daesan.or.kr/business.html?d_code=3327&uid_h=447&view=history 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여수』(서효인 作, 문학과지성사 刊) 예심에서 선정된 10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본심에서는 1, 2차 심사를 통해 문성해의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박상순의 『슬픈 감자 200그램 daesan.or.kr 시 : 고은, 이형기, 황동규, 정현종, 김춘수, 신경림, 황지우, 최승호, 이성부, 김지하, 김광규, 이성복, 김명인, 김사인, 남진우, 김혜순, 송찬호, 최승자, 신달자, 백무산, 진은영, 박정대, 마종기, 이장욱, 서효인, 강성은, 오은, 김행숙, 김언, 나..

문학노트 2023.08.02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2022년 제24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2022년 제24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https://www.changbi.com/NewsDetail?newsid=6234 창비 Changbi Publishers 한국의 종합출판사로서 문학, 인문, 교양, 어린이, 청소년, 그림책 등 다양한 분야의 양서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과서 발행, 미디어 서비스 제공, 강좌 운영 등을 통해 새로운 지식문화 창 www.changbi.com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일찍이 스스로 제기한 ‘시와 정치’론에 대한 골똘한 시적 응답이자 언어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통해 사랑을 선언하고 약속하는 시집이다. 또한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게 하며 도처에 존재하는 슬픔의 공동체를 묵념의 시간에서 건져..

문학노트 2023.08.02

안상학,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2021년 제23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2021년 제23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 안상학,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https://www.changbi.com/NewsDetail?newsid=5435 창비 Changbi Publishers한국의 종합출판사로서 문학, 인문, 교양, 어린이, 청소년, 그림책 등 다양한 분야의 양서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과서 발행, 미디어 서비스 제공, 강좌 운영 등을 통해 새로운 지식문화 창www.changbi.com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한 시대를 증언하면서도 우리의 미래를 투시해내고 있다. 삶의 터전을 민속학적으로 재현해내는 백석 시와의 친연성뿐 아니라, 개인의 삶이 역사적 사실로 변성되는 과정에서 발산하는 시적 에너지가 어떤 담론의 흔적보다도 곡진한 우리네 삶..

문학노트 2023.08.02

황규관,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2020년 제22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2020년 제22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 황규관,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https://www.changbi.com/newsDetail?newsid=5393 창비 Changbi Publishers한국의 종합출판사로서 문학, 인문, 교양, 어린이, 청소년, 그림책 등 다양한 분야의 양서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과서 발행, 미디어 서비스 제공, 강좌 운영 등을 통해 새로운 지식문화 창www.changbi.com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는 노동 경험의 핍진성을 존재론적 기원의 한 축에 두고, 다른 한 축에 분명하고 서늘한 자연 사물의 운행 원리를 배치해가는 ‘시인 황규관’의 서정성이 보물처럼 빛나는 결실이다. 나태와 일상을 거부하는 평범치 않은 ’발언’이 촘촘히 박힌 이 시집은 한국 리얼리즘시의 한 ..

문학노트 2023.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