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습작 67

벚꽃

벚꽃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 진은영, '청혼' 중에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여름을 재촉하는 봄볕 눈밑에 혓바늘이 돋는데 분홍빛 구름을 닮았구나 봄의 천사들이 내려앉았나 연신 사진 속 모델이 되고 순식간에 찾아온 꿈처럼 느닷없는 안부에 놀라고 반갑고 또 아리기만 해서 그해 겨울 함께 먹다 남긴 솜사탕처럼 편지를 주고받던 마음처럼 온기와 함께 녹아 흐르고 꽃잎이 녹아 흐른 냇물에 다시 봄비가 찾아올 테고 봄비가 두드리는 화음을 텅 빈 듯 고즈넉한 지혜를 네게 향하는 법을 배울게 #

글/습작 2024.04.03

촌음의 경계

촌음의 경계 서로가 서로를 돌고 돈다 인간관계의 고민은 서로가 서로 사이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날들로 인해 생긴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밤에 맨발바닥에 모래가 서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땅이 아주 가깝게 발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느낀다 - 박형준, 「밤의 소리」 중에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문학동네, 2023) 촌음의 경계를 마다한 채 우리는 관계라는 낱말의 그림자를 찾아 문밖을 서성댑니다 가파른 달빛이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안 벚꽃이 하나둘 피었다 지고 봄이 금세 저물어감을 알아챕니다 이른 겨울밤마다 온통 기다려온 봄임에도 벌써 이렇듯 저문다는 일에 항상 익숙해져만 갑니다 고민하지 않기 위한 방편을 세월만큼 배워온 까닭입니다 그만큼 늙어간 탓입니다 설렘도 없이 그리움도 없이 무덤..

글/습작 2024.04.02

눈 코 입, 끼리끼리

눈 코 입, 끼리끼리 눈끼리 코끼리 입끼리 끼리끼리 눈끼리 눈끼리 끼리끼리 썩은 눈 꺼져 맑은 눈만 모여 내가 맑은지 누구가 맑은지 아무도 몰라도 그래도 모여 끼리끼리 코끼리 코끼리 끼리끼리 못생긴 코 빠져 잘생긴 코만 잘생긴 코는 기준이 무얼까 아무도 몰라도 그래도 모여 끼리끼리 입끼리 입끼리 끼리끼리 미운 입 찌그러져 예쁜 입만 뭐 할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아무도 몰라도 그래도 모여 끼리끼리 그런데 우리, 왜 모인 거임? 모이라고만 하면 무조건임? 눈끼리 코끼리 입끼리 끼리끼리 #

글/습작 2024.03.27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지극히 어둡고 먼 꿈만 같던 일들도 저렇듯 눈앞에 닥치면 그때 뿐인 걸 봄날은 간다 꽃샘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꽃은 피고 나뭇가지에 돋는 새싹은 하늘을 펴고 내 발걸음도 기지개를 편다 그렇게 봄날은 온다 때 이른 사랑은 쉽게 저물어 슬프고 간밤에 소주 두 병을 마셨다며 울던 친구의 바지도 주름을 편다 그렇게 봄날이 간다 오늘이 퇴직일인데 얼굴도 못 보던 고맙다는 인삿말 뿐인 사내 메일도 용량쿼터제 탓에 금세 지우고 만다 그렇게 계절은 흘러가고 가고 오는 게 익숙해진 늙음 탓에 또 오는 봄날을 간다며 읽는 무심함 진지함 넉넉함 그런 게 멋인 줄 알았다며 또 웃고 또 우는 그런 봄날도 있으련만 오고 가는 게 아니라 남아 있는 걸 그렇게 눈앞에 닥쳐도 그때 뿐인 걸 여전히 어둡고 먼 꿈만 같던 일들 ..

글/습작 2024.03.21

환멸

환멸 지친 봄눈이 녹아내리듯 엉겁결에 사라진 풍경을 놓고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가 흘렀을까, 매일같이 신앙으로 떠받들던 이들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나면 이제 남루한 공터엔 더 이상 '광장'이라는 글자를 붙이지 않아도 좋았다 때때금 찾아드는 까마귀 떼도 오늘은 나뭇가지를 쪼아대지 않고, 수요일마다 시끄럽던 확성기들은 여전히 악을 쓰며 귓가를 어지럽히고 지친 봄눈이 언제 다 녹았냐며 누군가 물었는데, 다들 아무 대답을 않고 침묵했다 그리움의 팔 할은 후회이지만, 시간을 다시 되돌이킬 순 없어 후회를 않는 편이 낫지도 않아 그저 조용히 앉아서 말이 없는 연못을 보고 있어 떠난 이는 떠난 그대로 남은 이도 남은 그대로일 뿐 싹이 또 틀 거야 해마다 되풀이해 온 풍경을 놓고 진작에 알아챈 이들은 이미 떠났고,..

글/습작 2024.03.13

오늘의 시작

오늘의 시작 매일이 똑같지 않아 어떤 날은 여섯 시가 밝고 어떤 날은 어둡고 똑같은 열차 안도 누구는 앉고 누군 못 앉고 요일마다 승객들도 달라 짝꿍이 바뀌곤 해 독실한 노인들만 몇 일정히 좌석을 차지해 이른 아침부터 어딜 향하는 걸까 종삼일까 혹은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려 함일까 매일마다 똑같은 건 손주는 늘 아프고 며느리 전화도 없고 없는 건 돈과 머리칼뿐이고 아침부터 고집도 저절로 주름이 깊고 그래도 제일 싸잖아, 너도 무료잖아 오갈 데도 없는 이들의 가파른 쉼터 온양온천을 돌고 또 병천순대 먹으면 매일 한나절 루틴도 안성맞춤일 텐데 난데없이 고함을 지르던 여성이 있고 사람만 피해 다니는 학생들도 꼭 있어 어지간해선 옴싹달싹도 못하는데 움직일 순 없는데 화는 왜 내는데 열차는 태연하게 제 속도만을..

글/습작 2024.02.27

It's Rainy Day (ft. 'Schol of Rock')

It's Rainy Day (ft. 'School of Rock') 3월 말까지, 벚꽃이 피기 전이면 고전적인 락음악을 계속 틀어줘 메르세데스-벤츠가 선택한 공연 월드투어는? 구글어스로 충분해 한껏 기지개를 켠 아이들은 어젯밤 좋은 꿈들을 꾸었을까? 청춘은 늘 아름다워 노년에는 기지개를 어떻게 펴? 그런 건 관심이 없고 락앤롤이 글로벌 스탠다드야 난 YB의 '잊을게'밖에 모르는데 밥 딜런도 락앤롤은 아니니까 가끔 들으면 신도 나지 좋은 장르야 합법적인 마약들이 판치는 동안 시를 쓴다며 소주 7병 자랑을 해 피식 웃었지, 다 그렇게 먹엉 락은 왜 고전이라고 안 불러? 고전시는 다들 안 읽었잖아 현대시가 락은 더 아닐 텐데 랩의 역사가 벌써 반백 년인데 이십 년도 안 지난 고전시들아, 그대들의 죄를 사하노라..

글/습작 2024.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