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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산책 2

산책 2 - 후회 얼마나 허망한 시간을 보냈느냐 얼마나 더 살뜰히 이별에 맞서려나 후회는 켜켜이 쌓여 나이테가 되고 낡아가는 음영은 점점 꼰대가 되고 곁에 자란 새싹을 돌볼 틈도 없구나 그 뻔뻔함에 속절없이 익숙해졌다 아서라, 물 한번 뿌리고 거름 주면 오랜 후회가 곧 내 키를 넘어서고 내 키는 점점 더 줄어 싹이 되려니 돌보지 않는 싹, 기억의 출발점 어김없이 자라는 겨울, 또 봄

2021.12.07

[시] 산책 1

산책 1 - 세월 때 늦은 아침, 슬리퍼를 신고 자전거를 타면 어느덧 구름도 단풍에 숨었다 가을, 향기가 사라지는 계절 물줄기의 세월이 더 흐르면 찰나의 행복, 더 초조할 텐데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하는 일 더 늦기 전에 사랑해야 할 너 아직도 기다린다는 걸 안다 겸손해져야겠다 미루고 못한 일에 대한 반성 스스로 게으름을 탓할 염치, 나이가 들수록 배워야 할 것 침묵하는 호수를 본다 잠시의 슬픔, 더 깊을 텐데 더 늦게야 꺼내놓을 얘기들 더 늦도록 울어야 하는 나 방관의 햇살, 너무 이르다

2021.12.07

[시] 직주저널 3

직주저널 3 - 동방불패도 넘다, '다주불패'*의 꿈 영화 동방불패를 본 적 있을까 사람이 하늘을 날고 말이 두동강 나던 그 화면 속 흡사 주인공이 된 것마냥 어이없게 웃던 시절. 정부가 나서서 온 무림고수들의 수법을 구사해도 결국 성룡의 취권이 극장을 평정하듯 고공행진 뿐 투기꾼이 문제다, 재건축은 안된다, 강남 필요 없다 빼곡히 적힌 공직자 명단은 또 하나같이 강남 일색 내로남불, 강남좌파는 허구, 대국민사기라는 거다 삼호어묵, 부의 인문학, 이서기, 그리고 '다주불패' 새로 생긴 말들이 더 많다 취득세부터 난리였다 양도세도 대폭 인상을 했다 종부세는 이미 하늘을 찌른다 Nevertheless, 혹독한 시련 속에서 역대 최대의 다주택자가 생겼다 욕망의 질서는 잔혹하고 치열하며 오히려 냉철한 법 투기꾼..

2021.12.05

[시] 직주저널 2

직주저널 2 - 오피스텔, '1인 가구'의 꿈 딸아이가 휴학을 신청했다 (유학이 아니라 다행이다) 경기도 방4/화2는 멀단다 인서울? 국평 한 채가 10억 아이가 오피스텔도 좋단다 기숙사는 이미 지방 애들 몫 죄 없는 딸만 꼬박 왕복 네 시간 젊어 고생 사서도 할, 못된 핑계 괜스레 미안해진다, 앱을 켠다 - 가족도 제각기 출장중인 삶, 주말가족을 더 꿈꾸는 방1/화1, 최소한의 조건 인서울 삼십만원 기준은 뭘까? 궁금해진다, 보증금 없는 월세는 불가능인데 야반도주 탓이란다 아빠, 요즘 대세는 투룸이야 또 보챈다 분양가가 얼마짜린데? 8억이래, 미쳤다 인터넷으로 찾은 삼십만원 원룸 눈앞에 툭 놓는다, 대뜸 싫단다 돈이 없는데, 어떡해? 나 알바할래, 그래서 휴학이다 집 문제도 휴학 사유가 되는 애당초 돈..

2021.12.05

[시] 직주저널 1

직주저널 1 - 아파트, '사회주의'의 꿈 화창한 해를 보면 집 앞, 유유히 걷고프다 집 앞 산책의 매력은 일상이 건네준 축복 집값이 연일 최고가, 몇억씩 번다는 자랑도 아랑곳없이 함께 모인 밥상이 더 행복하다 누군가의 즐거운 안부를 밥상과 나누는 일 식구라면야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집 앞에 있는 공원, 슬리퍼를 신고 걷는다 유유히 걷는 마당, 자연이 건네주는 인사 오래된 큰 나무들이 신축 조경도 안 부러울 적어도 이 마당에선 모든 집들이 평등하다 대한민국이 왜 아파트에만 다들 미쳤냐고? 가장 '사회주의'적 공동체는 곧 아파트다 귀족의 성도, 나른한 전원주택에도 없는 관리비 몇천원으로 싸우는 이웃이 있고 재건축 사업성을 놓고 토론할 이도 있는 같은 학군인 이웃집의 면학을 걱정해주고 또 다른 이웃의 명문대..

2021.12.05

[시] 그래 이렇게 사랑하고 난 다음

그래 이렇게 사랑하고 난 다음 한 떨기 겨울마저 제 몸을 추스르고 녹아드는 언 땅 새순처럼 맞는 혹은 간밤에 쓰러진 나무 밑동에 더덕더덕 모질게 살 붙은 집착처럼 그대여, 추운 시간들의 길목에서 깊은 시름 거두고 잠을 청하노니 구슬피 우짖던 새도 쉰 울음을 내고 터벅터벅 걷던 길동무도 가방을 건네니 저렇듯 늘어진 어깨처럼 우리네 걸음도 때때로 낯설게 느껴져 간밤 그 어깨들 부여잡고 몇 년을 두고 떠난 이야기를 내놓고 막잔 하나씩 부딪치던 소리처럼 각자가 살아온 사랑은 아껴두는데 멀찍이 떠나갔네 우리네 배 한 척 두고 온 나뭇가지처럼 살랑거리던 그리움처럼 그 흔적들처럼 철 지난 절절함이 모여들던 이곳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던 기억 이제 이곳에서 잠시 잔을 또 들게나 부딪치는 술잔마다 묻는 입술 파르르 떨..

2021.12.03

[시] 바비도 기행

바비도 기행* 화석처럼 굳어버린 기억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영웅을 갈망했는지 모른다. - 새로운 신화가 입법화될 무렵엔 반드시 노여움에 흐느끼는 백성이 생겨났고, 거리마다 북적대는 장님과 벙어리에게서 생활의 위안을 삼고자 했다. 패스가 지나가는 구멍에는 반드시 파란불이 켜져야 했고, 얼굴엔 언제나 검은 태양의 흔적만이 자리를 잡았다. 시내 곳곳에 신전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간혹 첫닭 우는 소리에 놀란 사제는 어깨 가득 면죄부를 지고 풍경소리를 대신했다. 물론, 퇴락하는 골목을 범한 여인들의 죄과 역시 예전처럼 비난받지 못했다. 적어도 이 노련한 신화를 대신할만한 것은 없었다. 때때로 들끓는 도적떼가 모셔온 토템을 제외하고는, 모든 백성이 독실하기를 원했다. 설익은 양심들은 술자리만 잦아졌고, 이교도들의..

2021.12.03

문학3

... 창비가 만든 문학 '플랫폼'? 제목만으로도 벌써 거창해진다 문학의 이름이 소멸해버린 시대 문예지들만 내내 살아남았구나 더러는 여전히 등단을 꿈꾸지만, 어젠 또 김수영 시인을 얘기했다 결국 생계는 양계장 뿐이었다... 한 친구가 책을 냈다며 페이스북 한켠에 안부를 전해온다. 장하다. 몇년째 공사판 막일을 하면서도 결국 포기하지 않는 삶들이 있다. 정치도 스포츠도 연애도 그랬고 집착을 넘어선 사랑은 결국 희생 삶의 무언가를 지불해 얻는 소득 자본주의답게 '가치'관이 된다... '가치'가 있는 '플랫폼'이 화두다. 경제도 취향도 심지어 곧 희망도 정거장만큼 옛스런 운치도 줄까? ...

글/습작노트 2019.07.11

졸업, 선물

책은 참 일방적인 선물이야 문학회 동기들끼리 술먹다 들었던 말 학창시절 때 을 읽었던 나도 를 자취방에서 읽고 무려 도 봤었는데 동녘의 를 사고팠다 김수영의 산문집은 또 어떨까, 소설도 사르트르의 도 곽재구의 도 생각났어 - 요즘 누가 그런 책들을 보냐?... 좀 더 덜 꼰대짓을 하면 어떨까 해 이란 게 필요해졌지 은 또 어때 철 지난 설렘으로 선물을 샀어 아이한테 건네주려는 순간 훽 돌아서며 내동댕이친다 비웃는다 운명은 시대는 공감대는 그렇게 쉽사리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그래봤자 넌 꼰대야, 하면서 책은 참 일방적 선물이야 깨닫는다 - 요즘 누가 책이라는 걸 보냐?... 다신 책 사지 말아야겠구나 * 2019년 2월 13일

글/습작노트 2019.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