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언젠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내 앞에는 두가지 시의 길이 주어져 있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켜보는 길과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잠재워보는 길. 나는 이 두 길을 모두 가보기로 한다." 첫 시집 이후 대략 육칠년 동안 두 작업은 완전히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전자의 결과물이 "초자연적 3D 프린팅"이고 후자의 결과물이 "하얀 사슴 연못"이다. (중략)
이제 앞서 말한 두 길을 모두 가본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시의 길을 두가지로 한정한 것도 좀 우습군. 길 아닌 곳도 걸어가다보면 길이 되어 있겠지.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갈 것이다. 계속.
2023년 입동
황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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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상태
꿈에 백발이 되었다
머릿속에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강을 다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머리 위엔 이미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머릿속이 새하얘서
머릿속엔 아직 눈이 내리나보다
눈보라가 몰아쳐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나보다
보이지 않으면 좋다
아무 데로나 가도 상관없으니까 보이지 않으면
찍힌 발자국들도 다 사라질 테니까
이제 나는 다른 땅 위에 서 있다
거기서 뒤돌아본 강 위론 아직 눈이 내리는 듯하고
이제 저기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 하나가
추위 속에 견고해진다
폭설은 백지에 가깝고
가끔 눈부시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또
백지를 본다
백지를 보여준다
내가 쓴 거라고
내가 쓴 백지가
이토록 환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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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속삭임
시베리아의 야쿠트인들은
입김이 뿜어져 나오자마자 공중에서 얼어붙는 소리를
별들의 속삭임이라고 부른다
별들의 속삭임을 들어본 건 아마
야쿠트인들이 처음이었을 거다
그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소리에
별들의 속삭임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적 없었을 테니까
너무 춥지 않았더라면
너무 추워서 하늘을 날던 새들이 나는 도중 얼어
땅에 쿵,
얼음덩어리로 떨어질 정도가 아니었더라면
별들은 속삭이지도 않았을 거다
별들의 속삭임은 가혹해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가혹한 lo-fi 사운드
그것은 가청주파수 대역의 소리를 원음에 가깝게 재생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아름다움이고
별들의 속삭임을 듣는 자는 시베리아 아닌 그 어디서라도
하늘의 입김이 얼어붙는 소리를 듣는다
추운 날 밖에서 누군가와 나눠 낀 이어폰에서도 별들이 얼어
사탕처럼 깨지며 흩날리는
가루 소리를 듣고
머리가 당장 깨져버릴 것처럼 맑을 때
머리가 벌써 깨져버린 것처럼 맑을 때
그런 맑고 추운 밤이면 사방 어디서라도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 들려온다
무심한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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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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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
현역들 중 가히 '1군'에 해당될만한 시인 중 한 명인 황유원이다
시간 관계상 이번에는 몇 편만 필사를 해보았는데,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