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설령' (노동절 아침에 꺼내는 시)
설령 열까지 다 세고 나면 다시 하나둘 올라야 합니다 설령 높고 험하다 해도 딛고 있는 바닥부터 살펴야 합니다 낮고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걸음을 옮깁니다 다만 이후의 시간에 관해서는 얼마간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어차피 나의 기억과 나의 망각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채 닫지 못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들만을 적기로 합니다 "우리는 목소리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닮아간다" "서리고 어리는 것들과 이마를 맞대며 오후를 보냈다" "흙과 종이와 수선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장 하나의 글로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다가오는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