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 16

임어지니, '벙커' (요즘 시들의 풍경)

벙커 집이 무너졌다 미래를 무너트려서 미래는 오래전 알고 지낸 친구의 이름 같고 우리가 함께 골조 작업했던 주소지 같기도 하지 고층 아파트 올려다볼 때 그 끝에 노을이 매달려 있는 것은 일종의 착시 효과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고 한다 믿음이 없어도 무엇이든 믿을 수 있고 헤어진 당신이 죽은 사람이라 믿는 것은 더 잘 살아가기 위한 방식 혹은 살아남기 위한, 아무렴 내가 발굴해낸 생존전략인 것이다 빈 의자 위로 이불 펼치면 미숙한 트라이앵글 그 아래 작은 아지트가 탄생하고 해 들지 않는 그곳에서 먹고 자고 미래에 관해 생각하기로 한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가 그런 것을 생각하다 번뜩 무너지면 그건 의자가 넘어..

문학노트 2025.06.30

김미령, '제너레이션' ('세대'의 단절감)

제너레이션 그러니까 그건 그가 막 죽고 난 후의 일이었는데 그때 모로 잠들어 있던 젊은 엄마의 젖 냄새와 낡은 선풍기 소리가 들리고 커튼 사이로 불어오던 눅눅한 바람도 느껴지고 누워 버둥거리면서도 아기는 그것이 참 좋았는데 그날 이마 위에 어른거리던 햇빛은 작은 엉덩일 흔들며 바닥에 낙서를 하고 아기는 손을 뻗어 그걸 붙잡으려고 했는데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던 그 기억이 이제야 생각난 것이 그는 신기하기도 했다. 그건 어쩌면 그에게 남아 있던 가장 순수한 첫 기억 같기도 하고 예닐곱 살 적 마당을 뛰놀던 뒤꿈치에 밟힐 듯 밟하지 않던 천국의 엽서처럼도 느껴지고 언젠가는 그의 서재에 작은 돌멩이로 머물다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기도 했던 것 같은데 ..

문학노트 2025.06.29

허연, '칠월' (하반기를 맞는 자세)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허연, “밤에 생..

문학노트 2025.06.28

윤상운, '연가' (6월의 끄트머리에서)

연가(戀歌) Ⅰ 그대와 내가 마주보고 그대가 나의 누구인가를 묻고 있을때 그대는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네. 겨울의 눈덮인 들에 서건 별이 숨은 어두운 강에 서건 스스로 가득하며 따뜻했던 우리 우리가 거주할 정원의 나무 목련과 라일락 곁에서 정오가 던지는 은빛 그물 안에서 서로의 모습을 정립하려고 했을 때 우리는 흔들리기 시작했네 빛과 모습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을, 장식하며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입맞춤속에 녹아있는 모든것은 무너지고 있었네. Ⅱ 잠길에도 잠의 끝에 이르기 전에 우리가 걷는 길은 끊어져 있었어. 바람이 뜨락을 채우는 자정 뜨락을 지티는 소롯한 나무 혼자서 키가..

문학노트 2025.06.26

이예진, '다정과 과정' (기억은 소멸될 수 있을까, 굳이 그러려는 목적은?)

다정과 과정 네 말을 믿지 않았다 옷장에서 공룡을 봤다고 음식점에서 먹은 소시지가 사람 손가락인 것 같다고 길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새끼 호랑이였다고 그저 네가 꾼 꿈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네 문장을 읽으면 이 캄캄한 세상도 곧 아침이 올 것 같아 내가 너를 본받고 싶던 점 중 하나는 남을 쉽게 미워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때의 나는 사람을 쉽게 미워하곤 했다 미운 것을 생각하며 쓰고 잠을 못 자고 사랑했다 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 생각이 너무 많다고 생각이 언제든 맹수가 될 수 있다고 소시지처럼 한입에 먹히는 건 내가 될지도 모른다고 이 도시엔 슬픈 것이 너무 많아 아침에 나간 개천에서 흰 새 큰 새 물새 날개를 가..

문학노트 2025.06.25

김뉘연, '단번에 나타나겠다면' (시를 통해 추구하는 시학, 그 도전)

단번에 나타나겠다면 창문을 여는 수밖에 없다. 등장해버린 문장. 문장 앞에서 너는 좀처럼 어찌할 수 없다. 등장한 너를 지우지 않는다. 너를 창문 앞에 세운다. 창문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물컵에 차를 따른다. 찻잔에 물을 따른다. 주워 온 상자. 빌린 사다리. 모든 것이 등장하려고 한다. 상자를 한쪽에 둔다. 사다리를 세워놓는다. 창문은...... 창문은. 튕겨진 나는 잠시 앉아 있습니다. 접힌 전개도. 조합된 조각. 세워진 것들은 서 있습니다. 찻물이 따라졌습니다. 창문 앞. 등장한 것. 너는 장면이기를 거부하겠다. 앉아 있음. 서 있음. 장면은 너를 받아들이겠다. 사다리에 올라가지 않음. 상자 하나. 드러나 있는 윤곽. 튕겨진 나는 일어나 서 있습니다. 창문은 여전히 나를 받아들이지 ..

문학노트 2025.06.23

나희덕, '차갑고 둥근 빛' (상반기의 주말)

차갑고 둥근 빛 에너지 없이도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들이 있다 별이나 반딧불이 같은 것 어둠 속에서 짝을 찾기 위해 먹이를 찾기 위해 꽁지를 환하게 밝히는 발광생물들 그날의 바닷가를 기억한다 손바닥 위에 반딧불이들이 내려앉던 저녁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신발 위에, 소리 없이 모여들던 수천의 빛송이들을 차갑고 둥근 빛 별이 깜박이는 것도 마찬가지 1초에 79개의 별들이 타오르며 사라진다지 염포에 저녁이 오고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고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물소리를 내고 바닷가에 서 있던 우리도 멀리서 보면 몇 개의 반딧불이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서로를 맴돌며 희미한 빛을 뿌리는 # 나희덕, 가능주의자 (문학동네,..

문학노트 2025.06.20

손택수, '이별하는 돌' (침잠하는 '서정'과 내러티브의 차용)

이별하는 돌 돌을 쥔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온기가 있다 나의 체온이 건너간 것이다 건너간 것이 체온만은 아니어서 떠나는 거 서운치 않게, 지는 해를 따라가서 민박집에 주저앉았던 옛일도 떠오른다 입파도였나 국화도였나 찬찬히 낙조에 물든 밀물을 몰고 오는 시간 돌을 만지던 손을 코끝으로 당겨본다 희미한 물 냄새가 있다 비가 지나간 걸 기억하고 있는가 가서는 되돌아오고 되돌아오길 왼종일 보리밭을 불어가는 바람처럼 떨어지질 않는 걸음으로 저만치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매어준 머플러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돌을 쥔다 누구의 체온인지 영 구분할 수 없게 # 손택수, 눈물이 움직인다 ..

문학노트 2025.06.18

도종환, '유월이 오면' (유월의 중턱을 넘어서면서)

유월이 오면 아무도 오지 않는 산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 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남북산천을 따라 밀이삭 마늘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리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아침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 사위는 저녁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가리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쪽은..

문학노트 2025.06.17

여태천, '네가 가난한 이 집의 영혼을 말리는 동안' ('민음의 시' 332호)

네가 가난한 이 집의 영혼을 말리는 동안 늦었네. 겨우 한 뼘 햇살이 드는 창가에 서서 두 손을 말리며 너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지 그게 마지막 인사인 줄 몰랐네. 몇 번이나 불렀을까. 하긴 이름도 모르는데, 대답도 없이 등지고 있는 네가 보였어. 반쯤 열린 서랍 속에 어지럽게 놓인 하얀 봉투들 내려다보고 있는 네가 거기 저만치 서 있었지. 아주 조금만 더 적막의 시간을 견뎠다면 정말 그랬다면 또 다른 아침을 볼 수 있었을까. 때를 맞춰 일어나지 못했던 구제불능 밀랍처럼 마음이 굳어 갈 때도 간절했던 생각 그냥 아프지 않게 매달리는 법 함부로 손을 모아 본 적 없는데 이번만은 손과 발도 깨끗이 ..

문학노트 2025.06.16

최현우, '나의 실패 - 날개 달린 것들' (하지 못한 말들)

나의 실패 - 날개 달린 것들 여름과 매미 평범한 짝꿍 이제 짐짓 아는 체하는 일에 지쳤어 여름이고 다 자라버려서 매미가 울고 있을 뿐인데 거기서 비의와 교의를 찾는 일 따위 매미가 우는 일에 매미처럼 울지도 못할 거면서 통곡은 몸에서 멀고 늦은 오후, 흑색 도시는 매연으로 부풀어 사람의 마음에 기관지를 달고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게 있다는 걸 틀어막아야 할 검은 입가가 있다는 걸 알게 한다 어디를 가려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대충 눈을 감고 팔짱을 낀다 길인지 굴인지 모를 갱도의 각도로 자신을 접는 방식으로 지하철과 버스에 앉아 퇴근을 하고 너는 높은 곳으로 갔다 나약하고 조악한 사람 우리가 조금 더 ..

문학노트 2025.06.13

차정은, '나의 첫 번째 여름' (자가출판의 '대박', 베스트셀러 1위 시집)

나의 첫 번째 여름 사랑을 말한다 했던 우리의 여름은 자유로운 배영과 같았다 숨 쉬듯 말하던 사랑은 닳고 닳아서 낡아버렸고 우리의 언어는 더 이상 사랑이라 칭할 수 없었다. 우리는 왜 우리의 숨결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을까 당연하다 생각했던 모든 것들의 일부는 결국 찰나의 기억일 뿐인데 서로를 전부라 매료시켜 마법에 감긴 듯 영원을 뱉는다 매일을 사랑했던 우리의 헛됨이 사랑하지 말자는 후회도 늦은 지 오래 추억이 잔뜩 묻은 우리의 흔적을 분리하자 수많은 감정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가 말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의 여름은 사랑으로 시작해 여름으로 끝났다 나의 첫 번째 여름에는 너의 전부가 스며들었는데 나는 이제 무슨 여름을 추억해야..

문학노트 2025.06.12

이규리, '어느 명랑' (부단한 퇴고, 시인의 '숙명')

어느 명랑 취한 사람들은 한쪽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 저녁에 취기들이 모여 모처럼 명랑했다 조금 후에 제가 저를 모른다 하더라도 저녁은 자유한가 시절은 듣고 있는가 따위 일행이 조금씩 더 기울어지고 있을 때 자신을 남쪽에 산다고 소개한 사람이 일어나 내 슬픔을 수신하겠다고 했다 내 것이랄 수도 아니랄 수도 없는 이 헛헛한 소유에 대해 더 기울어져야 하나 그러자 다음에 일어선 사람은 내 유언을 받겠다고 했다 불빛에 사람들의 무늬가 어른거렸다 네모 안에 고인 잡다한 공기, 어렴풋한 웃음소리 슬픔 너머 있음과 없음 너머 그 전부를 받겠다는 건 서늘한 의지로 읽어도 좋다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무엇보다 나의 것엔 불운이 깃들어 있다 말해버렸는데, 취하다가..

문학노트 2025.06.11

이장욱, '오른손은 모르게'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오른손은 모르게 왼손은 수십 개의 사소한 실망들을 알고 있다. 왼손은 조금 더 가까운 데서 생각한다. 왼손은 먼저 떨린다. 지붕 위에 내려앉는 새들의 무게와 함께 밤의 이동속도로 나의 왼쪽에서는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색. 왼손에겐 친구가 필요해. 아주 분명한 친구.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목으로 악수를 청하는 친구. 왼손이 좋아하는 것은 갑자기 왼손이 되는 것. 안개야 양떼처럼 흩어질 수 있겠지만 그 순간 왼손은 사냥개가 되는 것. 그것에 꽂히는 것. 매일 오른손도 모르게 왼손이 사라진다. 세어야 할 것들이 많은데 가리켜야 할 것들이 많은데 스르르 펴진 뒤에 왼손은 낯선 이에게 인사하는 데 천..

문학노트 2025.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