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앨범/필사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지, 2008)

단테, 정독 2024. 6. 29. 07:36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은 낯선 언어들이 펼쳐놓는 불꽃놀이로 환하다. 우울과 낙관은 터지고 부서진다. 그리하여 어떤 익숙한 자력에 의해 하나의 문장을 이루는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응집은 흐트러지고 깨진다. 이처럼 시 속에 새로운 성좌를 이루어 반짝이는 언어들은 방향도 목적도 없는 야상의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더 깊은 곳에는 이러한 언어들의 기상천외한 혼례가 이루어지는 백지와 펜, 태어나려는 언어로 가득 찬 시인의 손가락이 있다. 

 

 

   - 

 

 

   시인의 말 

 

 

   대학 시절, 성수동에서 이대 입구까지 

   다시 이대 입구에서 성수동까지 

   매일 전철을 타고 가며 그녀를 상상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 만약 당신이 앉아 있다면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에게 

 

 

   2008년 8월 

   진은영 

 

 

   - 

 

 

   아름답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가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 

 

 

   연애의 법칙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 

 

 

   *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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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모 :: 

   

   진은영이 최승자 시인한테 헌사한 시집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알았다 

   실망보다는 내 선입견 탓이 더 크다 (이건 이성복이나 기형도 또는 황인찬도 마찬가지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