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변혜지는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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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문을 열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너를 기다릴 거야."
목소리를 따라 나는 안내되었다.
아름다운 찻잔을 건넬 준비를 한 채
문 너머의 내가 기다릴 텐데.
결심하는 동안 평생이 지나갔다.
2023년 11월
변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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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는 꿈
가족들은 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박두한 세계를 맞닥뜨리고 내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기를. 떨리는 손으로 나를 받아든 부모의 손길에 울음이 천천히 잦아들기를.
갓 태어난 나는 모두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감격한 부모가 만들어내는 눈물과
포대기에 싸여 금세 잠든 어린 나의 위에 켜켜이 쌓이고 있는 수많은 소원의 형상과
수많은 축복의 선언들
나를 안고 병원을 나올 때, 나는 잠든 부모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내내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나는 품에 안아도 울음을 그치지 않고, 배불리 먹고도 웃지 않는다. 기저귀를 더럽히고도 울지 않고, 짓무른 엉덩이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나는 아직 원망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끈으로 묶어 나의 손목에 걸어둔
나의 이름은 달아나려는 개처럼 자꾸만 몸을 뒤튼다.
나는 가끔 움켜쥔 것들을 화들짝 떨어뜨린다. 이토록 사소하고 아름다운 물건들로
손쉽게 나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워서 떨리는 나의 손을 내려다본다. 그래도
나는 나를 유아차 태우고 밖으로 나간다. 내가 보았던 그 모든 것들을 나에게 보여주려고. 차양을 내린 유아차 안쪽으로 부채질을 해주다 보면
가끔 서로를 깨뜨리면서 나는 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의 말을 남기게 된다.
병원으로 가. 가서 나를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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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꼬마선충
내가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했는데도 꿈틀거리며 네가 다시 도래하였다. 여기가 지옥이랑 좀 닮았어. 그렇게 웃지 말라고 했는데, 사방에 만연한 나를 둘러보면서 도래한 너는 웃음을 멈출 수 없고
생애 첫 심부름을 떠나던 꼬마 하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다.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데, 손에 닿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주머니 속의 지폐를 건네면
전부 네 것이 될 텐데.
주머니 속에 손을 넣으면 자꾸 손이 사라졌다. 배낭을 메고 나간 내가 어깨를 잃고 돌아와서 우리는 웃음을 멈출 수 없고
복도에는 우리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머물렀다. 우리를 지키는 사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또 하나의 내가 문을 나서고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
그렇게 말했는데도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또 너구나.
우리는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두부를 함께 먹는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하지 말자. 둥글게 둥글게 모여 앉아 다음을 기약하는
이따위 꿈은 꾸지 않는 것만 못해. 그러나
사랑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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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손꼽아 기도하던 날이 도래하였고,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엽총과 포도 한 송이를 손에 쥐고 세계를 떠났다. 그것은 풍요를 바라는 의식으로, 이제 와인은 틀렸군. 창밖을 보다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바람에 이번 시도 실패할 것이다. 세계에 홀로 남겨진 사람이 울거나 결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나의 칩거에는 사람들의 눈을 잡아둘 여지가 없다. 떠나지 않으려던 게 아닌데. 하필 잠이 많아서. 하릴없이 나 홀로 이렇게 창문 바깥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인데. 하늘에서는 흰 것과 검은 것이 쏟아져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고 있었다. 충분히 절망해야 하는데. 무릎을 꿇고 주먹을 쥐어야 하는데. 창문 밖에서 쏟아지는 것이 눈인지, 비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을 알기 전에는 도무지 눈물 같은 것은 쏟을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울고 싶은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읽는 사람들이 있다. 울기 시작한다면 나는 바빠질 것이다. 바빠서 가슴을 두드리며 실패한 이야기를 읽는 자들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거울을 보아야 하고, 최대한 아름다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 뺨에 흐른 눈물을 최대한 맛본 뒤에, 눈물의 맛을 적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눈물을 닦아주려는 자가 뒤에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눈물 흘리는 이유를 경멸하는 자가 뒤에 있을 것이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 눈물을 옹호하려는 자 또한 있을 것이다. 눈물 흘리는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자가 있을 것이다. 멸망한 세계에 너무 많은 자들이 남아 있어서 세계는 반쯤 잘려버릴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리고 도 그러는 동안...... 나는 눈으로 길러낸 것들을 다시 눈 속으로 넣겠다. 창밖에 쏟아지는 것이 여전하고, 나는 그것이 눈인지 비인지 여전히 모른다. 아직까지 페이지를 덮지 않은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해주는 사람이 또한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고, 그것은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더 이상 적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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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혜지,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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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4w0wm5UVXY?si=Qp6L0yLUoU3ZCOm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