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미래의 '여성성'에 관한 한 조언)

단정, 2023. 9. 13. 14:49

   
   
      

[베껴쓰고 다시읽기] 미래의 '여성성'에 관한 한 조언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서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강은교, “풀잎” (민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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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에서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 이름 몇몇을 꼽으라면, 대뜸 떠오르는 이름들 중 하나인 강은교 시인의 작품들은 주로 정갈하면서도 깊이 우려낸 찻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은은한 매력을 갖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이고요.) 

   다만 현대시의 작법과 화풍들이 제법 실험적이다 보니 강은교 시인의 시들이 기대만큼에는 미치지 못할 유명세를, 각종 문학상 수상소식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한 건 꽤 애석할 법한 일입니다. 반대로 두드러진 명성을 쌓아온 김혜순, 김승희, 황인숙 그리고 이제니 등등까지의 계보 및 각종 수상이력들에서 이만한 '정서'가 그동안 담겨지지 못해왔다는 건 국내 문단에서의 '여성성'이라는 담화가 얼마나 전투적인 '실험성'에만 그치면서 또는 어쩌면 오로지 '파격'에만 주되게 매몰되었었는가도 반성하게끔 만드는 대목일 수 있겠습니다. 

   물론 현대문학상과 몇몇의 수상이력들이 시인의 위상을 전혀 깎아내릴 수 없을만한 굵직한 성과들이긴 해도, 좀 더 차분하고 따스한 음성으로 시의 본령 중 하나였을지 모를 일종의 '구원'과도 같을 역할을 기대해본다면 그것 또한 과한 욕심인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끝으로 또 한 명의 걸출한 '서정시' 대표주자 격인 문태준 시인의 예전 단평을 함께 옮겨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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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송시 100편-16편] 우리가 물이 되어 (문태준) 

 

 

 

   물은 선하다. 물은 그 자체로 흐르는 모습이다. 흐르는 에너지이다. 물은 작은 샘에서 솟고, 뿌리에게 스미고, 하나의 의지로 뭉쳐 흐르고, 환희로 넘치고, 작별하듯 하늘로 증발하고, 우수가 되어 떨어져 내리고, 다시 신생의 생명으로 돌아와 이 세계를 흐른다. 

   

   우리가 태어나고 사귀고 웃고 슬프고 울고 아득히 사라질 때에도 물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계에 왔으며 우리보다 먼저 사라졌으며 우리보다 먼저 다시 태어났으니, 유한한 우리에게 물은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고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물은 불과 흙과 공기와 더불어 이 세계가 온존하는 한 온존할 것이다. 해서 물은 모든 탄생과 소멸을 완성하며, 그 자체로 소생하고 순환하는 생명이다. 

 

   이 시를 읽을 때면 '선한 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불이 어떤 부정과 대립이라면 물은 그마저도 끌어안는 어떤 관용. 물은 사랑. 자주 침묵하지만 한 번도 사랑을 잊은 적이 없는 마음 큰 이. 우리도 서로에게 물이 되어 서로의 목숨 속을 흐를 수 없을까.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없을까. 물과 같고 대지와도 같은 침묵의 큰 사랑일 수 없을까. 

  

   강은교(62) 시인이 '사랑法'이라는 시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중략)//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라고 노르했듯이. 

 

   강은교 시인은 1968년에 등단해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초기에 발표한 시들이 강한 허무 의식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녀를 '허무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녀의 시는 민중적인 서정에도 가 닿고, 사소하고 하찮은 생명들을 끌어안기도 하는 등 아주 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나는 어느 해엔가 그녀가 시의 낭송과 울림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 속 질병과 상처를 치료하는 '시 치료' 공연을 하는 것을 감명 깊게 본 적이 있다. 그때에도 지금에도 강은교 시인은 이 세계의 순례자로서 이 세계의 구원을 위해 생명수를 구해오는 바리데기의 현신이다. 

  

  

  

   # 조선일보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