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노동자”에서 ‘비정규직/알바’로, “무산계급”에서 ‘자영업/긱경제’로 (박노해, 가리봉 시장) :
가리봉 시장
가리봉 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전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긴 노동 속에 갇혀 있던
우리는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깔깔거리고
껀수 찾는 어깨들도 뿌리뽑힌 전과자도
몸부벼 살아가는 술집여자들도
눈을 빛내며 열이 오른다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 시장을 찾아
친한 친구랑 떡볶이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기분나면 살짜기 생맥주 한 잔이면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고
천오백원짜리 티샤쓰 색깔만 고우면
친구들은 환한 내 얼굴이 귀티난다고 한다
하루 14시간 손발이 퉁퉁 붓도록
유명브랜드 비싼 옷을 만들어도
고급오디오 조립을 해도
우리 몫은 없어,
우리 손으로 만들고도 엄두도 못내
가리봉 시장으로 몰려와
하청공장에서 막 뽑아낸 싸구려 상품을
눈부시게 구경하며
이번 달엔 큰맘 먹고 물색 원피스나
한 벌 사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앞판 시다 명지는 이번 월급 타면
켄터키치킨 한 접시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마무리 때리는 정이는 2,800원짜리
이쁜 샌달 하나 보아둔 게 있다며
잔업 없는 날 시장 가자고 손을 꼽는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익으면
피가 마르게 온 정성으로
만든 제품을
화려한 백화점으로,
물 건너 코 큰 나라로 보내고 난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 두며
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 박노해,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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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시집 한 권으로 100만 부가 넘게 팔린다는 건 도합해서 물경 1,800만 부 이상을 팔았다는 이문열의 소설 전체만큼이나 대단한 기록이자 하나의 큰 상징이겠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박노해의 시집이지만, 학교 때는 표제시를 근간으로 해 ‘팍팍한 대지의 새벽을 고함’이라는 평문도 썼었지만, 고단하고 남루한 일상 속 삶에서의 비애와 좌절과 슬픔과 분노 따위 등은 따로 형용하기 어려운 구석들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에서 드러낸 ‘정서’ 역시 그렇다고 보는 편예요.)
사회주의는 진작 몰락했으며, 21세기를 혼자 주무르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행태는 어쩌면 더는 “노동자”나 “무산계급” 같은 단어들만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한 부분일 테나, 여전히 주변의 삶들 속에선 또 다른 이름을 갖는 ‘소외’들이 있습니다… 그건 또 ‘고용불안’과 ‘취업절벽’과 ‘최저임금’과 ‘가계부도’의 위험들과도 직접적으로 맞닿는 문제들이기도 하고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들에 대한 해법을 연구하는 일이 비단 시인만의 숙제는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눈 딱 감고 묵과할만한 세상은 더더욱 아니기에 이렇게 따로 적어둡니다. (그의 시집이 100만 부가 넘게 팔린 이유도 그렇게 읽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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