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관록'의 힘과 스스로 겨루고자 한 '순수'한 내면의 깊이 (임후성, 볼트) :
볼트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 202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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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D-78
지난번에 이어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톺아보는 두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가장 최근인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들 중 한 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들 중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인 박선민의 '버터'와 함께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은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올해 58세의 늦깎이 신인이 된 임후성의 '볼트'였지 않았을까 합니다. 특히 이순을 코앞에 둔 나이임에도 꾸준한 정진 끝에 거둔 성과였던 탓에 많은 이들이 수상작 못지않게 큰 관심을 갖게 된 면도 없지 않았을 것 같군요...
박선민의 '버터'가 맑고 아기자기한 상상력들을 한껏 펼쳐보였다면 반대로 임후성의 작품에선 디테일이 살아 숨쉬는 듯한 철저한 '내공'의 힘이 엿보입니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재능 차원을 넘어선 어떤 '인생의 깊이'와도 연관을 갖게 만드는 힘인데, 이 역시 꾸준한 훈련에 의한 것이지 저절로 형성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 큰 '함정'일 수도 있겠네요. (부단한 습작 또한 물론 중요하겠지만 스스로 얼마나 퇴고의 시간을 잘 연마하며 남은 시간들을 버텨냈는가가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닐까 하는 의견을 함께 보태려 합니다.)
당선소감 또한 큰 화제였습니다. 아내를 향한 무한한 신뢰와 존중, 지인들과 가족을 향한 다사로운 애정, 모국어에 대한 언급과 맨 마지막으로 내놓은 한 마디도 충분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만한 문장입니다.
:: 당선소감 (일부, 인용) ::
당선 소식 후 잠시 자리를 피해 줬던 일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중략) 겨울이 느리게 가는구나. 일상은 왠지 사소한 일에도 조금 더 책임을 요구하는 것 같다. (중략)
하늘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 그립습니다. 존경하는 극작가이신 아내 김성민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늘 저를 보호하고 삶과 문학을 위한 수공업적 자세를 길러 주셨습니다. 저는 문학과 예술의 동료로서 당신에게 속합니다. 외롭고 높게 인문 연극하는 극단 피오르에 감사드립니다. 서현과 진서에게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나의 변증법입니다. (중략)
예선을 거쳐 최종심까지 질식의 시간을 견뎌 준 '볼트'에게 감사합니다. (중략) 아름답고 절실하고 성스러운 모국어에 감사합니다. (중략)
나는 오늘의 관습 앞에서 순결한 존재의 먼 얼굴을 회상한다. -끝-
:: 심사평 (일부, 인용) ::
"한 명". 신춘문예는 한 명을 찾는 일이다. 인파 속에서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예년보다 응모작이 많은 데다가 수준 또한 높아서 심사장은 후끈후끈했다. 한 명이 될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793명이 응모한 3001편의 시들을 집중하며 읽었다. 팬데믹의 여파가 경기 침체, 청년 실업 등의 양상으로 응모작에 나타났다. 삶의 피로와 미래에 대한 비관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고 기후 위기를 염려하는 시도 눈에 띄었다.
본심에 올라온 세 명의 응모자는 개성으로 빛났다. 개와 오리와 코끼리 등 동물이 시를 이끄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중략)
토론 끝에 '볼트' 외 2편을 응모한 임후성을 그 '한 명'으로 결정했다. '볼트'는 코끼리 다리에서 볼트를 연상하고 코끼리 몸집과 사회 구조를 빗대어 전개하는 시다. 코끼를 알기 위해서는 코만 만져 봐서는 안 된다. 펄럭이는 귀, 네 개의 튼튼한 다리, 길쭉한 코, 단단한 상아까지 만져 봐야 한다. 그의 시 쓰기가 톺아보기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막힘없는 상상과 내달리듯 호흡하는 문장은 읽는 맛도 더해 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코끼리처럼 성큼성큼 나아가되 주변의 작은 존재들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응모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신해욱, 오은, 정끝별)